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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없는 실패 -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2013)

비평/전체의 바깥

by POETIKA 2013. 8. 1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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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없는 실패*

―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

 

  *이 글은 웹진 <문지>(http://webzine.moonji.com)에 발표한 글 「실패 없는 실패」(2013.6.3)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송승환

 

 

패배와 실패는 다르다. 패배는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있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것을 뜻하고 싸움에 져서 도주하는 패주와도 같은 말이다. 이와 달리 실패는 일을 잘못해서 뜻한 대로 이루지 못하거나 일을 그르친 것을 뜻한다. 패배의 반대어는 승리인데 실패의 반대어는 성공이다. 시는 싸움에서 오직 승자와 패자만 있는 글쓰기가 아니고 승자가 되기 위한 글쓰기도 아니다. 시는 시인이 언어를 통해 삶과 세계의 사태를 포착하고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를 형상화하고 성찰함으로써 ‘지금-여기’의 결핍과 난관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미지-거기’의 세계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글쓰기이다. 그러나 언어는 실재의 삶과 세계와는 자의적 관계이고 그 실재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시는 실재가 부재하는 언어로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미지-거기’의 세계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실패가 예견되어있고 완전한 삶과 미(美)의 이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는 실패의 글쓰기이고 실패담의 기록이다.

황병승의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은 무엇보다 그 실패의 글쓰기와 실패한 삶의 기록을 끝까지 보여준다.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2005)와 두 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2007)을 거친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은 다양한 주체들을 통해 발언하던 전작들과 달리 무엇보다 적극적인 1인칭의 고백이 두드러진다. 그의 고백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변화의 지점인데, 그것은 여전한 황병승의 언어 리듬과 서사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실패하는 시인의 삶과 시의 알레고리로 구현된다.

그의 시 「Cul de Sac」은 로만 폴란스키가 제작한 동명의 영화 「Cul de Sac」(1966)과 다른 상황에 있지만 ‘자루 밑바닥’을 뜻하는 프랑스어 “Cul de Sac”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결국은 비슷한 궁지에 몰린다는 점에서 현재 시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과 그의 시가 직면한 곤궁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그 알레고리는 고딕체의 파편적 문장으로 서술되는 서사와 명조체의 고백적 진술이 교차하면서 구현되는데, 고딕체 문장의 서사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객관적 사건의 음악적 환기 효과를 낳고 명조체 문장의 진술은 주체의 고백을 주체의 내부뿐만 아니라 주체의 바깥인 독자에게까지 질문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어설픈 감정의 과잉과 직설의 함정을 간단히 넘어서게 하고 주체의 고백을 깊이 있는 성찰의 목소리로 심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은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서 두드러지는 형식과 내용의 특질로서 전작들보다 일관된 주체의 목소리와 171페이지에 이르는 시집의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Cul de Sac」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막다른 골목’이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한 남자가 깊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다가 이틀 만에 눈을 떠서 심한 고통을 느끼지만 구조되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만다는 파편적 서사가 시의 얼개를 이룬다. 그 파편적 서사와 서사 사이에 삽입된 주체의 목소리는 구덩이에 빠진 남자와 시인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치고 또한 어긋나면서 서사와 진술 사이에 여백과 물음을 만든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 여백과 물음의 의미에 답하면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굶주린 사자가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독실한 마음가짐에 따라 점차 멀어지고 하고 반대로 우리의 침대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오기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면 선생은 누구의 형제입니까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와 공포는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새가 날아와 앉으면 나뭇가지는 흔들리지요 작은 소리를 내며 부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대화를 원한다면 다가가서 대화를 하세요 큰 의미는 없습니다 시계가 멈추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걸어가서 시계 밥을 줍니다

― 「Cul de Sac」 부분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와 공포”는 언제나 전망 없는 현재의 현실로부터 발생한다. 그것들은 “굶주린 사자”처럼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시인의 육성이 드리워진 저 목소리는 묻는다. “굶주린 사자”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인지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형제인지 묻는다. “굶주린 사자”는 누구로부터 기원한 것인지를 묻고 “통찰해”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그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다. 시계가 멈추면 태엽을 감아서 다시 시계를 돌아가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존재의 근원적 고통의 기원과 존재의 원리에 대하여 답할 수도 없고 마음가짐만으로 “굶주린 사자”를 물러나게 할 수도 없다. “나에게는 창문이 없었다/그 어떤 세계도 동경하지 않았고/나와 만나기를 두려워”(「자수정」) 하지만 나는 다만 존재한다는 이유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모터와 사이클」)을 겪고 언제나 궁지에 처해 있는 현재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시인은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소거하지 못하고 존재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실패한 삶이지만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는 ‘출구 없는 장소’와 ‘막다른 골목’까지 나아가서 “굶주린 사자”와 거짓 화해하지 않고 실재하는 존재의 고통을 부인하지 않는 성찰을 통해 “오로지―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오로지―불과하다는 처음에 도달하기 위해” 삶은 실재하고 “큰 의미는 없”다는 것을 처참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인이 찰나적인 시적 순간의 체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실존을 내걸고 실제적인 삶의 모든 고통과 실패를 감내하면서 인식한 삶의 성찰인 까닭에 그 중심에는 삶의 윤리와 미적 윤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전망 없는 현재의 현실 속에서 궁지에 몰린 시와 삶 모두를 동시에 갱신하면서 돌파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거는 삶의 윤리와 시의 윤리이다. 그것은 시와 삶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무(無)를 직면한다. “진창에서 태어나 진창으로 사라지는 날까지”(「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시와 삶의 결론과 처음은 무(無)라는 성찰. 그리하여 시인은 “나는 이름이 없”(「솜브레로의 잠벌레」)다고 선언한다.

 

저는 생각이 없어요 전집이 없습니다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골방의 아이들은

뒤죽박죽 서로를 배신하기로 협약을 맺었고

어두워진 창가를 서성이는 검은 육체의 그림자와

누구의 부모인지 모를 백 년 전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 「육체쇼와 전집」 부분

 

“악착같이 꿈꾸면서 악착같이 전진하면 악착같은 현실”(「육체쇼와 전집」)이 기다리는 현재의 나는, 이름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여줄 육체도 없고 전집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있다. 나는 “검은 육체의 그림자”로 있다. 나는 그 모든 ‘없음’의 형식, 즉 ‘무(無)’로 있다. 무(無)는 시인이 삶을 희생하고 실패하면서까지 도달한 실재이다. 무(無)의 제전에서 시인은 시적 순간을 체험할 때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고 세계를 최초로 바라보는 시선을 얻는다. 최초의 시선으로 시인은 시와 삶을 바라보고 “쓰고 버리는 일을 반복”(「Cul de Sac」)하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무(無)라는 것에 다시 다다른다. 무(無)는 죽음에 다름 아니다. 시인이 체현하는 시적 순간은 죽음을 체험하고 죽음에 다다르면서 실패하는 시쓰기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지막 시편으로 수록된 「내일은 프로」는 2003년 등단 이후 그가 10년 동안 무엇을 시도하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실패의 실제 기록이자 그의 자화상이다. 「내일은 프로」 역시 고딕체의 서사와 명조체의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고딕체의 소제목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영원’이 되고 말겠지” “세탁기하곤 말이 안 통하니까” “차와 간식이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앞으로의 인생은 둘째 치고” “벙어리는 침묵과 절름발이는 목발과라는 소제목들은 시인으로서 직면한 시와 삶의 파국 속에서도 끝까지 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윤리를 드러낸다. 파편적인 문장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거나 쓰지 않으면서 맞이한 고독과 죽음 앞에서 삶의 파국을 체감하지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시인의 육성이 내포된 알레고리다.

파편적인 문장의 알레고리는 균열되지 않은 시의 서사를 유추하고 깨진 항아리 조각처럼 깨지기 전의 항아리 원형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깨지기 전의 항아리 원형이 시를 쓰기 전의 삶과 완전한 시의 이상이라면 깨진 항아리 조각은 시를 쓰자마자 실패한 시와 삶이다. 항아리는 깨졌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 깨져서 튀어나간 항아리 조각은 모두 긁어모을 수 없을 뿐더러 그 모든 조각을 이어붙인다고 해도 상처 없는 본래의 항아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깨진 항아리 조각을 그대로 둘 것인가. 깨지기 전의 항아리 원형을 기억해내고 유추하면서 깨진 항아리 조각을 아예 산산이 부수어 새로운 항아리로 다시 빚을 것인가. 황병승은 후자를 선택한다. 그는 실패한 시를 그대로 방치하는 실패자가 아니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의 삶을 더욱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시로 인해 실패한 삶을 더욱 산산이 부수어 최초의 항아리, 최초의 시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생명을 담보로 내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시와 삶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깨진 항아리 조각을 산산이 부수는 것처럼 미완의 시 앞에서 지금 당장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저버릴 수도 없다. 여기서 죽고 싶지만 지금 죽을 수도 없는 시인의 실존적 비극과 비애가 발원한다.

더 나아가 그가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을 결행한다고 하더라도 최초의 항아리 복원은 불가능하다. 삶의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깨진 항아리를 산산이 부수고 다시 빚은 항아리는 최초의 항아리와 유사한 것이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실패한 시를 폐기하고 다시 쓴 시는 최초의 시와 유사할 뿐이지 최초의 시가 아니다. 시는 부서져서 시편들이 된다. 황병승이 “소설”이라 호명하는 시는 그 시편들 중의 하나로서 본래의 시와 삶을 모두 복원하지 못하고 황병승의 방식으로 실패하면서 쓴 시편이다. 그리하여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실패한 시와 삶의 지점을 복기하는 일이다.

소제목에 따른 파편적 서사에서 그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복기한다. 시쓰기의 실패, 시가 실패한 지점을 독자에게 보여주지 못한 실패, 죽음에 근접한 고독의 체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한 사랑의 실패, 부모님과의 단절, 여자와의 이별 후에 찾아온 “아름답고 근사한 것”에 대한 회의. 모두 미완의 시와 그 시의 실패로 점철된 삶의 실패담이다. 그러나 그는 실패의 복기를 통해 과거보다 덜 실패할 수 있는 내일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확신하고 다시 시쓰기를 시도하기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소가 쓰러질 때까지 투우가 계속”되듯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만들기 위해 실패한 삶의 전부를 내걸고 끝까지 시쓰기를 감행하기에 그의 실패는 실패 없는 실패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실패의 경험을 통해 보다 덜 실패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미지-거기’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기 때문이다. 황병승은 실패담을 통해 최초의 시와 완전한 삶을 기억해내고 그 원형을 유추하면서 ‘지금-여기’의 실패한 시와 다른 시의 미래가 현재의 삶 속에 자리잡도록 복기한다. 이제 황병승의 실패담의 전모를 직접 읽을 차례다.

 

 

월간 <현대시>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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