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명명과 윤리의 출현
― 황인찬의 「법원」(『현대문학』 2012년 3월)
송승환
검은 나뭇가지 사이로 눈이 내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눈발이 흩날린다. 새 떠난 나뭇가지 사이 바람이 지나간다. 나무가 흔들린다. 풍광의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고 12월이 아니라 4월이다. 이 풍경을 어떤 이름으로 명명할 것인가. 풍경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시인은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투시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모국어로 번역하고 명명하는 자이다. 시인이 바라본 것을 언어로 명명하지 않을 때 세계는 인간의 언어 바깥의 세계로 남아있고 의미 이전의 사태로 현존한다. 시인이 그 사태를 가장 적확하고 최적의 언어로 명명하고자 고심할 때 이미 주어진 언어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언어는 저 풍경의 사태를 최초로 명명한 순간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죽은 언어이다. 명명한 언어가 곧 사태 자체인 순간의 물질성을 상실하고 지시적 기능에 충실한 언어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시인이 직면한 사태를 명명하려는 언어는 이미 주어진 언어의 바깥에 있다. 시인은 기성 언어의 내부가 아니라 그 언어의 바깥에서 사태를 가장 적확하게 제시할 언어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기성 언어에 대한 부정(否定)이자 언어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모험이다. 시인으로서는 당면한 사태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실존의 모험이다. 그 모험은 사태를 응시하면서 언어의 바깥에서 명명할 언어를 탐색하는 시인을 침묵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사태를 응시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바깥의 언어를 향해 나아가고 발화되기를 기다린다.
돌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바깥의 언어는 시인의 입을 통해 내뱉어진다. 바깥의 언어는 시인의 입을 통해 발화되지만 시인에게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언어인 까닭에 낯설다. 그런데 바깥의 언어는 매우 낯설면서도 사태를 가장 적확하고 가장 신선하게 표현한 신생(新生) 언어의 성격을 지녀서 사태를 재인식하고 사태가 지닌 의미와 본질에 대해 다시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바깥의 언어는 사태를 최초로 명명한 순간의 순수성과 물질성을 지닌 시의 언어인 것이다. 시인이 바깥의 언어를 발화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바깥으로 모험을 떠나 시인이 직면한 사태를 직접 살아냈기에 가능하다. 시인이 살아낸 사태는 타자의 삶과 그 시간의 깊이를 살아낸 것과 다르지 않다. 사태를 명명하는 바깥의 언어는 시인이 사태를 응시하고 침묵 속에서 주체의 삶 대신 타자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발화하는 타자의 언어이다. 곧 시의 언어이다.
아침마다 쥐가 죽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밤새 놓은 쥐덫을 양동이에 빠뜨렸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할머니는 흔들리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고, 어느새 죽은 것이 물 밖으로 꺼내지곤 하였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대체 저걸 어떻게 하셨나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대문 밖에 나와서 앉아 있는데 하얀색 경찰차가 유령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 황인찬의 「법원」 전문(『현대문학』 2012년 3월)
첫 시집이 기다려지는 젊은 시인 황인찬은 동세대 신인들의 시가 보여주는 장황하고 화려한 산문체 언술 방식과 거리를 두고 최소의 언어와 간결한 형식으로 시적 주체의 실존과 기원을 응시하는 시를 써왔다. 황인찬의 시 「법원」은 사태에 대한 명명이 언어의 내부가 아니라 언어의 바깥에서 발화된 것임을 예증한다. 할머니는 덫에 걸려 바동거리는 쥐를 양동이에 빠뜨리고 쥐가 죽을 때까지 바라본다. 쥐가 살기 위해 몸을 뒤틀 때마다 양동이의 물은 흔들린다. “흔들리는 물”은 쥐라는 생명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태의 현장이자 삶이 곧 죽음으로 전환되고 있는 장소이다. 할머니는 “흔들리는 물”을 가리키며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쥐가 인간의 곡식을 탐한 까닭에 짓는 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할머니가 살아있는 쥐를 죽이는 까닭에 짓는 죄일 수도 있다. 죄의 의미 파악을 잠시 미루고 “흔들리는 물”을 명명하는 시인의 언어에 주목하자. 시인이 “흔들리는 물”의 사태를 돌연,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언덕 위의 법원”이라고 명명하자마자 사태의 국면은 돌변한다.
쥐가 죽으면서 “흔들리는 물”의 사태를 새롭게 명명한 “언덕 위의 법원”은 시의 흐름에서 매우 낯선 바깥의 언어이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시인이 목격한 할머니의 언행을 되살아냄으로써 시인이 받아 쓴 할머니의 언어, 타자의 언어이다. 그리하여 “언덕 위의 법원”은 일상적이고 표면적인 사태, “흔들리는 물”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일상 언어의 내부에 틈입하여 일상 너머의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 저 사태의 내부에 침잠하고 있는 삶과 죽음과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언어의 내부에 갇힌 일상 세계의 깊이 없는 삶과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사는 삶의 한계를 노출시킨다. 삶은 보이는 것과 일상 언어의 표면적 의미로만 구성되지 않음을 각성시킨다.
“흔들리는 물”이 “언덕 위의 법원”으로 명명되자마자 일상과 현실 세계의 장막이 사라지고 삶 이후의 세계가 도래한다. 삶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법원”이 출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사라지고 죽음은 삶의 연속선상에 놓인다. “법원”은 현실 세계의 범법을 판단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세계에서 저지른 죄를 심판하는 죽음의 장소가 된다. “법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죄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죄를 심판하는 타자의 윤리를 전제한다. 그 타자의 윤리가 발생하는 “법원”은 할머니의 전언에 의하면 “흔들리는 물”에 있다. 타자의 윤리는 삶이 죽음으로 전환되는 장소에 현존하고 주체의 삶에 보이지 않게 관여한다. 타자의 윤리는 죽음의 세계에서 주체가 살고 있는 삶의 세계로 출현하여 주체의 죄를 판단하는 심급으로 작동한다. 타자의 윤리는 주체로 하여금 삶의 윤리에 대해 성찰하도록 한다. 시인이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가 말한 “죄”는 현실 세계의 성문법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서 망자(亡子)의 죄를 선고하는 일종의 율법에 속한다.
죽은 쥐. “언덕 위의 법원”에 상정되고 죄의 유무가 심판된 존재이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은 분명히 살아있던 존재의 죽음 자체이며 시인에게 도래할 미래의 삶이다. 쥐는 돌아가신 할머니도 상기시킨다. 쥐와 할머니는 모두 시인의 삶과 연계되어 있다. 삶에는 죽음과 죄의 심판이 내재되어 있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와도 연계되어 있다. 쥐의 사체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세계와 법원의 현존을 드러낸다. 시인은 운구차를 연상시키는 “하얀색 경찰차”를 바라보며 삶과 죽음과 죄에 대해 성찰한다. 시인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삶과 자신에게 도래할 미래의 삶을 현재 시간에 모두 함께 산다. 그 순간은 시인이 바깥의 언어를 통해 사태를 새롭게 명명함으로써 획득한 말과 시간의 깊이이다. 그것은 주체의 삶이 죽음과 타자의 삶과 연계되어 있으며 타자의 윤리와 함께 구성된다는 깨달음을 준다.
웹진 문지 <주간 문학 리뷰>(201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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