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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형식과 시의 형식―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

비평/전체의 바깥

by POETIKA 2013. 3. 17.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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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형식과 시의 형식

―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현대문학』, 2011년 5월)

 

 

송승환

끌로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듣는다. 무엇보다 몽환적인 플루트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주선율을 이끄는 플루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매우 회화적이고 다채로운 색채와 깊이와 긴장을 지녔다. 10여 분 안팎의 음악은 플루트 소리의 등장과 함께 시작하고 플루트 소리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침묵.

저 플루트가 길어 올리는 음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음악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음악은 침묵 속에서 솟아올랐다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음악은 침묵을 찢고 나왔다가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음악이 사라진 뒤에 떠오르는 침묵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침묵은 음악을 되새기게 하고 침묵 속의 음악을 바라보게 한다. 침묵은 음악의 기원이고 사라져가는 음악의 미지(未知)이다. 그런 점에서 침묵은 ‘소리―존재’의 생성을 준비하고 귀환의 자리를 마련하는 무(無)이다. 무(無)는 없음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생성과 귀환 운동을 무한히 발생시키는 없음이다.

바다는 무(無)의 운동 형식과 존재 양식을 잘 보여준다. 바다의 수평선은 하나의 거대한 물방울 표면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끝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파도는 서로 다른 크기로 일어나서 해변까지 치닫고 부서진다. 해변에 부서진 파도는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수없이 많은 파도와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바다에서 생성된 각각의 존재이자 각각의 존재가 빚어낸 음악이다. 모두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존재의 파동이다. 파도는 서로 다른 크기로 일어나서 서로 다른 크기로 부서지고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바다의 솟아오름과 사라짐의 현존을 보여주는 무(無)의 음악이다. 하나의 바다와 수없이 많은 파도의 음악.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플루트는 하나의 파도에 해당한다. 플루트가 아니라 클라리넷이라면, 오보에라면,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전혀 다른 소리의 빛깔로 태어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플루트라는 악기를 통해 음악은 플루트의 선율로 솟아오르고 플루트가 지닌 고유한 음색으로 육체성을 얻는다. 침묵과 무(無)에서 솟아오르는 음악이 하나의 육체성을 얻는다는 것은 플루트로 가능한 음악의 고유성과 플루트로 불가능한 음악을 동시에 지닌다는 뜻이다. 곧 플루트는 플루트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음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를 긋는다. 침묵이 플루트를 통해 얻는 음악의 육체성과 그 육체에 구축되는 음악의 형식. 시가 시인의 언어를 통해 확립되는 하나의 시세계.

 

나에게 체조가 있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땅을 파고 체조가 서 있다. 마른 풀을 헤치고 다른 풀을 따라 웃는다. 사투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대기의 층과 층 사이에 체조가 서 있다.

 

누가 체조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구령이 터져 나온다.

수목에 다름없는 수목을 잃는다.

 

체조는 심심하다. 체조가 나에게 휘어져 들어올 때 나는 체조를 이긴다. 체조는 나를 이긴다.

 

아래층과 위층이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 나는 참 시끄럽다. 나는 체조를 감추든가 체조가 나를 영 감추든가 하였다.

 

그렇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다.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물끄러미 아침을 퍼 담는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가를 가리켜 보인다.

 

무너지느라고 체조가 서 있다.

―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 전문(『현대문학』, 2011년 5월)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은 내가 육체를 통해 구축하려는 체조와 내가 무너뜨려야 할 육체의 체조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체조는 주어진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정한 순서로 움직이는 몸의 동작을 반복하고 외우면서 확립하는 육체의 형식이다. “나에게 체조가 있다”는 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몸의 동작을 반복하고 외우면서 확립한 육체의 형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는 것은 일정한 육체의 형식으로 확립된 체조가 육체에 새겨져서 내 의지보다 먼저 육체의 동작을 기억하고 불러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체조의 형식과 내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가 관성적으로 불러오는 체조의 형식. 시인이 확립하려는 시세계와 이미 확립된 시세계에서 관성적으로 씌어지는 시.

하나의 형식으로 완성된 체조는 육체의 특정 부위를 강화시키는 효과와 익숙함이 있지만 육체의 모든 부위를 강화시켜주지 않는다. 그 체조의 형식은 내가 확립한 것이므로 언제나 수행해야 할 의무가 없고 완전한 형식도 아니다. 체조는 본래 무정형의 형식이므로 체조의 형식은 없다. 체조의 형식은 그 ‘없음’에서 발생한다. 음악이 침묵 속에서 솟아올라 플루트를 통해 고유한 음색으로 현현하고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무정형의 체조는 내 육체를 통해 하나의 형식을 드러내고 동작의 멈춤과 함께 사라진다. 무(無)의 체조와 내 육체의 체조와 수없이 많은 체조의 형식.

시인에게 하나의 시세계 확립은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시가 시인의 언어를 통해 하나의 형식으로 현현하고 고유한 시세계로 확립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확립된 시의 형식으로 고착되어 관성적으로 씌어지는 시쓰기가 될 때 그 시세계는 무너뜨리고 무너져야 한다. 시인이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시세계는 구축과 해체가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체조의 구축만이 있을 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고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의 구축만이 있을 때 화석화된 시의 형식만 있고 시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체조는 “무너지느라고” 서 있고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시는 무너지느라고 씌어져왔다. 지금 쓰는 시는 모두 무너뜨리고 다시 써야 할 시이다. 한 편의 시와 하나의 시세계는 시인의 언어라는 육체를 통해 구축한 시의 한 형식일 뿐이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이듯이 시는 시인에게 투명한 무(無)의 형식으로 있는 시를 가리켜 보인다.

 

문지 웹진 <주간문학리뷰>

201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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