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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많은 손들― 김소형과 송승언의 시

비평/전체의 바깥

by POETIKA 2013. 3. 17.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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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많은 손들

― 김소형과 송승언의 시

 

 

송승환

 

 

시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탄생한다. 미지의 시가 시인의 언어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시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확정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시적 전통의 지평에 출현하여 그 전통을 계승하고 확장시킨다는 의미 또한 지닌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집은 시인의 시세계뿐만 아니라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시적 전통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시의 전통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시가 출현하기 전까지 시의 정의와 질서를 완전히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낯설고 이질적인 시가 출현하여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시의 전통에 제기할 때 전통적인 시의 정의와 질서는 균열을 일으키고 희미해진다. 1920년대 김억이 번역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쓴 프랑스 상징주의 풍의 시, 1930년대 이상의 시, 한국 전쟁 이후의 김수영과 전봉건, 김종삼과 김춘수, 조향과 김구용의 시, 1980년대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 등은 모두 당대의 시적 정의와 질서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전통의 위반과 확장을 주도해왔다.

2000년대 한국시는 매우 이질적이고 낯선 언어들을 비조직적이면서 분열증적으로 일제히 발산함으로써 시의 정의와 시의 소통 등에 관한 숱한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이른바 ‘미래파’, ‘뉴웨이브’, ‘외계인의 언어’, ‘측위의 감각’ 등으로 명명되어 한국시의 전통으로 수렴할 수 없다는 입장과 전통을 위반함으로써 한국시의 전통을 재정립하고 한국시의 미래를 개진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크게 나뉘었다. 2000년대 한국시에 관한 논쟁이 남긴 문학사적인 의미는 보다 객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미적 거리와 시간이 필요할 터이지만 그 논쟁은 이제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시의 근본적인 성찰과 물음을 발생시켰다. 서정시에서 ‘서정’이란 무엇인가. 시의 ‘화자’와 ‘자아’라고 호명하는 것은 자명한가. ‘시적 주체’란 무엇인가. 전통 서정시에서 ‘자연’은 ‘실재의 자연’인가. 시적 주체는 시적 대상에 대한 우위 속에서 새로운 시적 인식과 발견이 언제나 가능한 존재인가. 시와 정치의 균형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와 같은 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은 이른바 전통 서정시를 써온 시인들이 지금까지 시적 대상을 삼아온 ‘자연’에 대한 성찰과 시적 인식의 ‘주체’에 대한 반성을 동시에 요구함으로써 지금까지 쓰인 전통 서정시와는 다른 시를 모색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2000년대 한국시에 대한 논쟁은 현대적이고 전위적인 시를 써온 시인들에게 무엇보다 다른 개성의 언어와 첨예한 미학적 완성도를 지닌 언어를 모색하도록 요구했다.

2000년대 한국시의 폭발을 일으킨 진원지는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나 2000년대 초반에 등단하고 2005년 전후로 첫 시집을 출간한 젊은 시인들이다. 그들은 이제 두세 권의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자신들의 미학적 개성과 시세계를 개진하면서 한국시의 다양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그들의 미학적 성취와 자산 속에서 김승일, 박성준, 이우성, 김상혁, 백상웅, 박지혜, 황인찬, 이이체 등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한 (무)의식적인 영향과 불안을 극복하고 1980년대생이라는 세대적 감수성과 고유한 미학적 실험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이번 계절에 주목한 김소형과 송승언의 시는 최근에 등단한 신인들의 시로써 2010년대 한국시의 또 다른 개성과 시대적 징후를 예감하게 한다.

 

정전이었다

촛불을 켰을 때 그가 날 찾아왔어

창문을 열자 밖은 더 밝았지

창가 식탁에 앉아 낡은 항아리에 물 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네

그는 나가자고 했지

 

정전이었어

옥상의 길 따라 옆 담벼락으로, 또 담벼락으로

우리는 꽤 걸었지

거리는 조용했어

그가 묘지로 가자고 하더군

 

정전이었네

유리관을 만들어 누운 사람들

묘지는 조용했지

관 위에 올라 그들을 바라보았어

그들은 쩍 벌어진 눈으로 쳐다볼 뿐

입은 앙 다물고 있었지

관을 반만 열어 허연 가슴팍에 꽂힌

유리 몇 조각 뽑아 주었어

 

그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

살아가는 게 겁이 날 때가 있어

발밑에 무언가 웅크리고 있지 않소

벌리고 마시고 주무르던 사람들

여전히 정전이었다

 

길게 혀를 빼고 눈 끔벅이는 사람들

세상은 온통 그들이 낳은 자들로 가득하더군

머리만 빼놓고 파묻힌 아이들

한 소년 땅에서 꺼내 흙을 털어 주었지

얼굴을 알아보긴 어려웠어

그가 발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지

뼈대가 보이는 건물에서 태어났군

 

발에 차인 한 아이 머리칼 헤쳐

작은 머리핀 빼냈지

잔머리 정돈해 꽂고 일어섰을 때 이곳은 조용했어

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건

정전 속에서 들리는 건

오직 그들의 눈 깜빡임뿐이었지

― 김소형의 「정전」 전문(『작가세계』 2011년 겨울)

 

201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1984년생 김소형의 시는 그녀가 인식한 시대적 징후와 고유한 미학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녀가 인식한 시대적 징후는 “정전”이다. 정전은 밤과 낮의 순환과 계절의 순환에 따른 자연적 삶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전기’를 사용하는 도시의 삶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김소형이 (무)의식적으로 제목으로 삼은 ‘정전’이라는 시어는 세계 인식의 공간적 배경이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며 ‘밤’이 아니라 ‘전기 없는 세계의 어둠’임을 암시한다. 시의 주된 시적 공간으로서 자연이거나 회귀의 공간으로서 자연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 전통 서정 시인들의 세대적 경험과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이제 1980년대 세대의 시인들은 1970년대 세대의 시인들이 관통해온 도시의 하위 문화와 디지털 문화, 전망이 부재하는 도시의 일상과 인공 자연으로서의 도시 미학을 더욱 생래적으로 체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정전으로 암흑인 세계로서의 집. 김소형의 시는 집의 외부보다 집의 내부가 더욱 어두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세계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창문 밖의 세계가 더욱 밝아서 나선 길은 지상의 길이 아니라 지상으로부터 높이 올려지은 옥탑방과 그 옥상에서 이어진 담장 위의 길이다. 그녀에게 세계는 두 발 딛고 서 있을 만한 지상이 아니라 도시의 안온한 일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고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는 담장 위의 길인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묘지가 있다. 그 길로 이끈 이는 ‘그’다. 촛불을 켜고 낡은 항아리에 물을 담고 내가 그 물을 바라보자 암흑 속에서 나타난 ‘그’이기에 그는, 다름 아닌 ‘나’다. 그는 거울에 비친 나의 음영이고 나의 분신이다. 어둠으로 가득 찬 집의 내부를 응시하고 다시 전기가 흘러 집과 세계의 내부에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려는 나와 달리 또 다른 나는, 어두운 현실 세계보다 더욱 밝은 다른 세계로의 나아감을 권유한다. 그러나 내가 도착해서 직면한 곳은 죽은 자들의 세계인 묘지이다. 그 묘지로의 이동까지 이어진 모든 담장 위의 길 또한 고요한 정전의 세계이다. 김소형에게 세계는 정전이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세계는 죽은 자들이 낳은 사람들로 가득한 정전 상황이고 가슴에 꽂힌 유리 조각을 뽑아주거나 뽑지 않거나 유리관 속에서 눈만 끔벅이는 죽은 자들로 가득한 무덤이다. 내가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소년을 덮고 있는 흙을 털어주거나 죽은 아이의 흩어진 잔머리를 정돈해주면서 다시 머리핀을 꽂아주는 일밖에 없다. 정적 속에서 움직이고 들리는 것은 오직 죽은 이들의 “눈 깜박임”뿐이다. 김소형의 「정전」은 전망 없는 암흑 세계에서 거의 죽은 듯이 살아가거나 죽은 자들의 “눈 깜박임”만을 들으며 죽어가는 세계 인식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전망 부재의 세계 인식 속에서 김소형의 시가 고유한 미학적 가능성을 지닌 지점은 일종의 ‘젊은 마녀적 상상력’이라 불러야 할 것처럼 보이는 시적 주체의 태도이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주체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표출하지 않는다. “넌 비옷인형 같았어/죽은 자를 두려워않고/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는(「하임의 아이들」, 문학웹진 『뿔』 2011년 10월)” 어조로 죽음과 친연성을 드러낸다. 죽음과 전망 부재의 삶을 태연하게 수용하는 시적 주체의 담담한 화법은 김소형 시의 개성적 시세계가 발화하고 있는 자리이다. 또한 그녀의 미학적 발성이 의지하고 있는 알레고리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현실 너머의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강성은의 알레고리와도 다르고 반복되는 도시 일상의 삶을 서사성과 함께 담아내는 김중일의 알레고리와도 다르고 전망 부재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으로서 풍자를 알레고리로 담아내는 황성희와도 다르다. 김소형의 ‘젊은 마녀적 상상력’이 구축할 시세계를 기다린다.

 

몸을 잃어가며 장작이 빛난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거실의 음악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이곳에는 질문도 없고 답도 없다

간밤에 잃어버린 회문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눈이 내렸으며 믿음은 새로웠다 골목은 안으로 굽어 바람을 가두며,

눈은 눈과 겹치고 있다 첫눈이 겹칠 때는 눈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밤이 밤을 넘어서 지붕을 덮고 있고 눈은 밤을 덮고 있다 덮이는 건 없다 해도 좋았지만

악사들은 수백 년째 쉬지도 않고 밴조와 피들 따위를 연주중이다 밤이 계속되니까 이제 우리는 연주의 슬픔도 지겨움도 다 잊고 이 음악에 고립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눈은 왜 자력을 얻나 이곳에서 우리는 몇백 명쯤 되는 것이지, 저벅이는 소리 들리지만 괜찮다 아무런 답도 없다

그림자 한 덩어리가 어둠의 외곽으로 뻗어나갔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고 그것을 내밀었다 겹치는 그것들 너무 많은데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게 이상하다 눈이 자꾸 겹치는데 손등에 진 그늘의 열기는 식으려 하지 않는다 몸을 잃어가며,

거실은 무너지고 우리는 이 손들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며 밤이 오고 밤이 쌓이면 한밤을 함께 넘어서

― 송승언의 「많은 손들을 잡고」 전문(『문학동네』 2011년 겨울)

 

201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1986년생 송승언의 시가 제시하는 시공간은 눈이 내리는 밤의 거실이다. 김소형에게 세계가 정전된 도시와 묘지라면 송승언에게 세계는 오랫동안 그치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는 밤의 거실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음악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그 끝을 알 수 없다. “질문도 없고 답도 없”으면서 음악이 지속되는 밤의 거실. 낮은 오지 않고 밤은 계속된다. 밤은 밤을 덮고 눈은 눈을 덮는 시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음악을 듣고 있는 까닭에 어떤 정서적 감흥도 없다. 음악은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고 삶의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악사들은 수백 년째 쉬지도 않고 밴조와 피들 따위를 연주중”이고 “우리는 연주의 슬픔도 지겨움도 다 잊고 이 음악에 고립”된 삶을 살아야 한다. 송승언의 세계 인식이 드러나는 진술이다. 밤과 눈이 끝없이 덮이고 정적에 가까운 음악이 흐르는 “이곳”에 우리는 몇 백 명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고 서로에게 그림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실체로서 서로를 지각하지 못하고 허상으로만 서로를 인식한다. 김소형이 묘지에서 죽은 자들의 “눈 깜빡임”을 들었듯이 송승언은 보이지 않는 거실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움직이는 우리들의 “저벅이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몸을 잃어가며” “거실이 무너지고” 있는 삶을 “영원히”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도 답도 없는 세계에서 송승언은 삶의 윤리를 침묵으로 제기한다. 우리는 전망이 부재하고 죽음이 임재한 세계에서 삶의 윤리에 관한 물음을 외면할 수 없다. 송승언은 삶의 윤리에 관한 물음에 대해 대답한다. “몸을 잃어가며 장작이 빛난다”는 그의 시적 인식. 밤과 눈이 끝없이 덮이는 세계에서 육체의 “저벅거리는 소리”만 들으며 사라져갈 것인가. 아니면 어둠을 사르고 조금이라도 세계를 밝히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불태움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될 것인가. 송승언은 장작처럼 자신의 육체를 불태워 어둠을 사르려는 입장을 드러낸다. 사라져가는 육체로 연명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영원히 살아간다면 그 삶은 유령의 삶과 다르지 않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오르는 불 속으로 자신의 육체를 던짐으로써 세계를 불 밝히는 데카당스가 죽음을 통해 세계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육체의 삶이다. 더욱 뜨겁고 더욱 환하게 세계를 불 밝히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장작이 필요하다. 서로의 육체에 대한 연민어린 연대가 필요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많은 손들을 잡고” “이 손들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결의한다. 서로 맞잡은 “손들에 진 그늘의 열기는 식으려 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수용하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죽음 속으로 내던짐으로써 타오르는 삶의 불꽃. 전망이 부재하고 죽음이 임재한 세계에서 송승언이 내보이는 삶의 윤리적 태도이다.

1980년대생 김소형과 송승언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것은 전망 부재의 삶과 죽음이 임재한 삶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윤리에 관한 물음은 살아있는 한 우리 모두에게 제기되는 물음이지만 존재론적 성찰과 모색을 통해 그 물음의 해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세대는 다름 아닌 젊은 세대이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젊은 세대는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실현과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확신하면서 적대적 대상과 싸움을 벌였고 그 싸움의 결과를 승리로 이끈 경험과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2010년대 젊은 세대가 직면한 삶의 전망은 매우 암울하다. 적대적 대상은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어 보이지 않고 보다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확신은 부재하다. 무한한 자유의 주체처럼 보이는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속박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1980년대생 김소형과 송승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많은 손들을 잡고 죽음을 향해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끝까지 죽음의 그림자와 싸우면서 적극적으로 죽는 삶을 살아내려는 그들의 삶의 윤리와 시대 인식이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난다.

 

『문학나무』, 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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