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의 바깥과 오늘의 감각
― 이원의 시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현대문학』 2012년 6월호)
송승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가.
전체의 내부에서 시작할 것인가. 전체의 바깥에서 시작할 것인가.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끊임없이 시를 배반하면서 미학적 갱신을 지속한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전체에 대한 통찰을. 시인에게 전체는 지금까지 살아낸 시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시에서 지금까지 써온 시의 궤적과 범주, 성공과 실패를 엄밀하게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할 줄 아는 시인의 정신이다. 시인의 정신이 지닌 최고의 능력이다. 더 나아가 그 정신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감각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는 직관의 예각을 점검할 줄 아는 육체의 능력이다. 그것은 예민한 감각으로 사태의 한 국면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다.
최고의 정신과 최대한의 육체로 전체에 대한 통찰을 수행할 때 시인은 시와 삶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까지 써온 시의 영역과 경계를 극단적으로 파악한다. 전체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빈 곳 또한 전체의 바깥이다. 시인은 전체의 내부와 바깥을 가로지르는 경계마다 빗금을 긋는다. 정신의 극단과 육체의 극단으로 밀고 나가서 가능했던 시의 모든 것과 불가능했던 모든 것의 구획을 짓는다. 그것은 언어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으로서 성공과 실패의 삶을 적시하는 일이다. 시인은 전체를 바라보며 자신의 소유지를 둘러본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전체의 내부를 돌아보며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때 시인은 어제의 시와 안주하는 삶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전체의 바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하려 할 때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시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무시한다. 자신의 시와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두 도려내고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하려 할 때 시인은 죽음과 무(無)를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전체의 바깥을 바라보며 경계에 서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제와 오늘의 경계. 오늘과 내일의 경계. ‘지금―여기’와 ‘미지―거기’의 경계. 이쪽 절벽과 저쪽 절벽의 경계. 시인은 자신이 소유한 시의 영토를 뒤로 하고 경계 너머로 저쪽 절벽을 향해 내딛는다. 이쪽 절벽 끝에서 저쪽 절벽 끝을 향해 눈을 감고 허공 속으로 내딛는 한 발. 미약한 언어에 실존을 걸고 온몸을 던지는 시적 도약의 순간.
어제는 참을 수 없어. 들킨 것은 빈 곳을 골라 파고들던 발. 신발이 시킨 일. 발자국은 정렬되고 싶었을 뿐.
어제는 참을 수 없어. 엉킨 몸으로라도 걸었는데. 줄이 늘어났어. 엉킨 몸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몸은 오늘의 소문. 너는 거기서 태어났다. 태어났으므로 입을 벌려라.
너는 노래하는 사람. 2분 22초. 리듬이 멈추면 뒤로 사라지는 사람. 뒤에서 더 뒤로 걸어 나가는 사람. 당장 터져 나오는 말이 있어요. 리듬은 어디에서 가져 오나요. 메아리를 버려라.
흰 접시에는 소 혓바닥 요리. 다만 너는 오늘의 가수. 두 팔쯤은 자를 수도 있다
너는 가지를 자르는 사람. 뻗고 있는 길을 보란 듯이 잘라내는 사람. 좁은 숨통을 골라내 끊어내는 사람. 내일을 잘라 오늘을 보는 사람.
다만 나는 오늘의 정원사. 한때 인간이 되고자 했던 것은
태양 속에 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
태양 아래 서게 되었을 때 내내 꼼짝할 수 없던 것은
불빛처럼 햇빛도 구부러지지 않았기 때문.
오래 아팠다고.
잘라버린 가지는 나의 두 팔이었던 것.
끝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끊어진 두 팔을 뚫고 이제야 나오는 손. 징그러운 새순.
허공은 햇빛에게 그토록 오래 칼을 쥐어주고 있었던 것.
어쩌자고 길부터 건너놓고 보니 가져가야 할 것들은 모두 맞은편에 있다.
발목쯤은 자를 수도 있다
그토록 믿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한 것. 우세한 것. 정렬된 것.
발이 그토록 오래 묻고 있었던 것
다시 태어난다면 가수나 정원사가 될 거야
설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니 하겠지만
흙 속에 파묻혔던 것들만이 안다. 새순이 올라오는 일.
고독을 품고 토마토가 다시 거리로 나오는 일.
퍼드덕거리는 새를 펴면 종이가 된다
새 속에는 아무것도 써 있지 않다
덜 펴진 곳은 뼈의 흔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사람. 방금 전을 지우는 사람.
두 팔이 없는 사람. 두 발이 없는 사람.
없는 두 다리로 줄밖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
첫 페이지는 비워둔다
언젠가 결핍이 필요하리라
―이원,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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