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바알과 시의 정치성
―〈304낭독회〉 팜플렛의 시
송승환
시인 바알(Baal)의 「익사한 소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익사한 소녀Vom ertrunkenen Mädchen」(1919)는 비사회적인 시인, 바알(Baal)을 통해 사회적 규범과 인습에 대한 저항을 그린 그의 첫 희곡 「바알Baal」(1918)에 등장하는 물질적 회귀의 서정시로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자살하는 ‘오필리아’와 랭보의 시 「오필리아Ophélie」의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다.
1
그녀가 물에 빠져 죽어 냇물로부터
넓은 강물로 떠내려갔을 때
하늘의 오팔(蛋白石)은 마치 그 시체를
위안하려는 듯 매우 찬란하게 비추었다.
2
수초와 해초가 그녀에게 엉겨 붙어
그녀는 차츰 아주 무거워졌다.
물고기들은 그녀의 발치에서 서늘하게 헤엄쳤고
식물과 동물들이 그녀의 마지막 여행을 더욱 힘들게 했다.
3
하늘은 저녁이면 연기처럼 어두워졌고
밤이 되면 별빛이 떠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아침과 저녁이 있도록
하늘은 일찍 밝아졌다.
4
그녀의 창백한 몸통이 물 속에서 썩었을 때
(매우 천천히) 일어난 일이지만, 하느님은 서서히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녀의 얼굴을, 다음에는 손을, 그리고 맨 마지막에야 비로소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 뒤에 그녀는 많은 짐승의 시체가 가라앉은 강물 속에서 썩은 시체가 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익사한 소녀」(김광규 옮김) 전문(1919)
희곡 「바알Baal」의 주인공 바알은 시민들로부터 천재라고 불리는 향락적인 시인인데, 그는 인습 파괴와 향락을 일삼음으로써 타인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스스로 파멸과 소멸의 길로 치닫는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사회적 인습과 도덕과 예술적 의미에 대해 총체적으로 대항하면서 스스로 몰락하는 데카당스적인 시인이다. 브레히트는 본래 프랑스 중세 시인 프랑수와 비용(Francois Villon, 1431-1463)을 바알의 모델로 생각했지만 당대성을 고려하여 『바알』에서는 프랑수와 비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 1844-1896)을 모델로 삼았다. 폴 베를렌은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랭보와 동성애적 관계를 유지하는 여행을 떠났으며 말년에는 약물과 알콜 중독, 빈곤으로 치닫다가 삶을 마쳤다.
브레히트는 『바알』에서 바알과 에카르트의 관계를 베를렌과 랭보의 동성애적 관계처럼 묘사하는데, 「익사한 소녀」는 술에 취한 바알이 완성한 작품이라며 잠자던 에카르트를 깨워서 읽어주던 시이다. 첫 시집 『가정기도서Die hauspostille』(1927)에 수록되기도 한 「익사한 소녀」는 물에 빠진 소녀의 죽음과 시체의 부패 과정 속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육체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작품이며 바알 자신의 행로를 암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첫 시집 『가정기도서』가 다양한 의도의 무목적성을 품고 있는 시집이라고 브레히트가 밝혔다고 하더라도 「익사한 소녀」는 인습 파괴와 향락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제도에 의해 타살당한 바알과 소녀를 그린 작품이라고 적극 해석할 수 있다. 즉, 바알은 사회적 제도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용인될 수 없는 범죄자이지만 그 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예외적 존재로서 정치성을 실천하는 시인이다. “폭력이 법의 수중에 있지 않을 경우 법이 위태롭게 느껴진다는 것은 폭력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법 밖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라는 놀라운 가능성”(발터 벤야민,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1921), 이성원 옮김, 『외국문학』 11호, 전예원, 1986.12. p.23.)에 속하는 존재로서의 시인이다. 바알이 사회적 제도와 법의 외부에서 인습 파괴와 향락을 향유하면서 파멸로 치달을수록 합법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사회적 제도의 허구성은 추문과 함께 극명하게 드러난다. 바알이라는 시인 자체가 법과 사회적 제도를 위협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익사한 소녀」는 비극의 아름다움을 성취한 서정시가 정치성을 획득하는 알레고리적 의미의 지점을 마련한다. 「익사한 소녀」는 비극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소녀가 죽게 된 사회적 상황과 「익사한 소녀」를 쓴 시인 바알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
『304낭독회』 팜플렛의 시
브레히트의 「익사한 소녀」는 김광규의 번역으로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 1985.9.10.)과 계간 『외국문학』(전예원, 1985.9.25.)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읽혀왔으며 희곡 『바알』의 맥락과는 별도로 대부분 자연으로 회귀하는 육체의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해석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한국에서 브레히트의 시 「익사한 소녀」는 단지 ‘오필리아’의 문학적 계보 속에서만 읽고 해석할 수 없는 국면에 처해 있다. 2014년 4월 16일. 한국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로 브레히트의 「익사한 소녀」는 도저히 ‘오필리아’의 의미로만 읽히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은 국가의 총체적 부실과 부재 및 폭력적인 자본의 이윤추구와 언론의 무능, 그 실재를 온전히 시민들에게 드러냈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탈출하지 못한 소년과 소녀들은 구조되지 못하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건의 진실과 대안이 전혀 제시되지 못한 한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브레히트의 「익사한 소녀」는 매우 정치적이다. 시민의 생명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와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비판을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사한 소녀」의 정치성은 시가 품고 있는 역사적 사건과 현실의 문제에 대한 사실적 재현의 크기와 현실 비판의 강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규정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작가들은 세월호 침몰과 함께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304낭독회(http://304recital.tumblr.com)’를 조직하였다. ‘304낭독회’는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306명의 한 줄 선언을 읽는 첫 낭독회로 출발하여 2016년 5월 28일까지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오후 4시 16분에 시작하는 낭독회를 21번째 개최해왔다. 304낭독회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쓰지 않은 글이라 하더라도 자유롭게 참여하여 시와 소설과 산문을 매월 ‘팜플렛’으로 만들어서 광화문 광장과 여러 거리에서,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서점과 창작촌에서, 단원고등학교와 철거명령을 받은 건물 등에서 함께 나누며 읽어왔다. 낭독회가 끝나면 PDF파일로 만든 팜플렛을 온라인으로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각각의 글 낭독 이전에 읽는 304낭독회 팜플렛의 서문은 한 작가의 글이 아니라 낭독회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공동선언문의 성격을 지닌다. 매번 조금씩 다른 서문 중에서 “가라앉은 진실을 들어 올려 이 캄캄함을 밝힐 수 있도록, 서로의 목소리가 공명하여 더 크고 넓게 울려 나갈 수 있도록, ‘사람의 말’을 이어 가겠습니다. 지금 서 있는 시간으로부터, 슬픔과 분노로 멈춘 우리의 시계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계속 읽고, 쓰고, 행동하겠습니다.”는 304낭독회의 분명한 목적과 작가로서의 소명과 문학의 윤리를 되새기는 문장이다. 그렇지만 『304낭독회』 팜플렛에 발표한 시인들의 시편들은 304낭독회의 목적과 문학의 윤리를 직접적으로 표출하거나 프로파간다의 구호로 체현하고 있지만은 않다.
당신의 봄 셔츠를 구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져 본 팔이 들어갈 곳이 두 군데
맹목이 나타날 곳이 한 군데 뚫려 있어야 하고
색은 푸르고
일정하지 않은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면 했습니다
봄 셔츠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차돌을 닮은 첫 번째 단추와
새알을 닮은 두 번째 단추와
위장을 모르는 세 번째 단추와
전력(全力)만 아는 네 번째 단추와
잘 돌아왔다는 인사의 다섯 번째 단추가
눈동자처럼 끼워지는 셔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도
사명감으로 달린 여섯 번째 단추가
심장과 겹쳐지는 곳에 주머니가
숨어서 빛나고 있는
셔츠를 입고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당신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목에서 얼굴이 뻗어나가며,
보라는 것입니다
굳지 않은 피로 만든 단추.
우리의 셔츠 가장 안쪽에 달려 있는
―이원의 「봄 셔츠」 전문(세번째 『304 낭독회-돌아오라 사람이여』, 2014.11.29.)
이원은 언어와 전자 문명에 대한 세심한 성찰과 실험을 감행해온 현대주의 시인인데, 『304낭독회』에 시를 발표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직접 낭독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현대주의자로의 전회를 암시한다. 그런데 「봄 셔츠」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후 7개월이 지나고 광화문 광장에서 낭독되었다는 시공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시편이다. 「봄 셔츠」 자체는 당신의 봄 셔츠를 구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간명한 시편이지만 『304낭독회』 팜플렛과 광화문 광장이라는 시공간의 문맥 속에서 읽으면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갈망과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살아남은 자의 무력함과 무책임한 국가에 대한 비판을 품고 있는 정치적인 시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시의 다양한 해석을 고려한 시인이 의도한 시쓰기의 결과이다. 이원은 시를 하나의 해석과 도그마로 굳어지기를 거부하며 “우리의 셔츠 가장 안쪽에 달려 있는” 심장처럼 시를 “굳지 않은 피로 만든 단추”로 파악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1980년대 정치시와 다른 시쓰기의 입장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시의 윤리를 표명하는 언어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가지두부찜
한 시인이 올린 가지두부찜
열무얼갈이 김치찌개도 있었지만
가지두부찜
나중에
반 남은 가지두부찜이 올라왔지
열무얼갈이 김치찌개도 맛있었으나
……반 남은 가지두부찜
너 내일 와서 먹어봐
반 남은 가지두부찜
저번에……병어찜 양념에서
쪽파만 빠진 가지두부찜
반 남은 가지두부찜
너 내일 와서 먹어봐
너 쓰러짐 ㅋㅋ
가지두부찜
반 남은 가지두부찜
너 내일 와서 먹어봐
조용히 너
쓰러짐
(그럴 수 있을까?)
반 남은 가지두부찜
―함성호의 「팔레스타인, 용산, 세월호 90일―이런 학살을 지켜봐야 하는가? 나는 어쩌다 전쟁의 시대도 아닌 학살의 시대를 사는가?」 전문(네번째『304 낭독회-없는 사람처럼』, 2014.12.27.)
함성호의 「팔레스타인, 용산, 세월호 90일―이런 학살을 지켜봐야 하는가? 나는 어쩌다 전쟁의 시대도 아닌 학살의 시대를 사는가?」는 시의 제목을 생략한다면 결코 학살과 관련된 시로 읽을 수 없을 만큼의 비정치적인 시이다. 시의 제목과 무관하게 본문을 읽으면 “‘가지두부찜”이라는 음식과 소리의 반복에서 발생되는 즐거움과 함께 먹을 수 없는 상황의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 2009년 1월 20일 공권력에 의한 용산 철거민의 죽음,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304명의 죽음은 모두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에 의한 무고한 생명의 학살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학살의 시대에 대한 물음과 성찰을 제기하는 제목을 상기하며 다시, “반 남은 가지두부찜”과 “내일”, 그리고 괄호 속 “그럴 수 있을까?”를 함께 읽을 때, 함성호의 시는 결코 함께 나눌 수 없는 내일의 음식, ‘반 남은 가지두부찜’이 됨으로써 매우 비극적이며 정치적인 시로 확장된다.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 실천을 고민하고 유도한다. 함성호의 시는 이원의 시보다 정치성을 직접 드러낸 제목의 효과를 통해 현실 비판의 목적을 보다 쉽게 성취하면서도 이원의 시만큼 본문에서 정치적 구호와 프로파간다의 선언을 배제함으로써 1980년대 정치시와 또 다른 언어의 정치적 시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소녀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그들을 따라 붉은 열매가 떨어지고
그들의 열매를 따라 눈 속을 걷는 사람들
소녀들이 찬송을 부를 때
이건 어떤 노래일까
따라 부르고 싶었지만
입을 벌릴수록 벌어지는 거리가 있어
그들을 따라 걷기만 했고
이제 죽은 소녀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생일을 지나
나와 같은 계절을 지나
우는 사람만 울고
죽는 사람만 죽을 때
너는 무엇을 지키는 거지?
그들이 묻는 것 같았고
아, 아, 벌릴수록
벌어지는 빛을 따라
그림자만 마구 죽은 채
끌려왔다
그들의 열매를 따라
눈 속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김소형의 「위」(열여섯번째 『304낭독회-지상으로 이어진 계단』, 2015.12.26.)
창문이라고 써 놓고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볼 수도 없고, 창문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알고 있다
창문이라고 벽에 창문이라고 쓰고
거기 앞에 서 있지 않아도 괜찮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창문이 아니어도 나쁘지 않고
하나뿐인 창문이 아니라도 세상모르고
주먹을 날리는 동안
주먹 속에 실은 몸은 더욱 차갑고 무거워진다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한 점이
멀리 떨어진 얼굴을 향해 날아갈 때
기적을 이기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젊고 건강하고
창문 뒤에 나만 서있지 않다고, 제발
사진 앞에 국화를 놓고
창문이라고 써놓고
파고라는 말을 몰라서 전부 파도라는 말로 고쳤다
―김복희의 「우리가 본 것」 전문(스무번째 『304낭독회-한 아이를 한 아이로 두지 않는 것』, 2016.4.30.)
1980년대 한국의 정치적 영향 속에서도 1963년생 함성호와 1968년생 이원은 프로파간다의 정치시와 다른 언어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쓰기를 실천한 기성 시인이라면 1984년생 김소형과 1986년생 김복희는 21세기에 등단한 시인으로서 세월호 사건을 목격한 현실에 대해 자신만의 언어로 발화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김소형의 「위」와 김복희의 「우리가 본 것」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기보다는 말해야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곤궁과 무거운 시인의 윤리와 무력한 시인의 자리를 성찰한다.
김소형의 「위」는 죽은 소녀들의 예배에 참석한 ‘나’를 등장시킨다. 떨어지는 “붉은 열매”와 “눈 속을 걷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나’의 자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죽은 소녀들을 애도하는 지하의 노래, 즉 ‘아래’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없는 지상, 그 ‘위’에 남은 나의 곤궁한 처지를 고백한다. 그녀는 죽은 소녀들에 대해 “입을 벌릴수록 벌어지는 거리가 있”음을 확인한다. 죽은 소녀들을 어떤 언어로도 담아낼 수 없고 어떤 애도조차 할 수 없는 살아있는 자의 부끄러움을 “너는 무엇을 지키는 거지?”라는 존재론적 물음 안에 담는다. 김소형의 「위」는 그 존재론적 물음을 통해 소녀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과 충분한 애도의 필요성과 시인의 윤리를 되새긴다. 김소형의 존재론적 물음은 그 물음조차 망각시키려는 현실에 저항하는 시인의 윤리 표명이며 그 물음 자체가 기억의 정치성을 획득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김복희의 「우리가 본 것」은 부재하는 다른 삶의 가능성과 직시해야 할 처참한 현실의 목격을 담고 있다. ‘창문’은 벽 너머의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여기’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종이에 쓴 ‘창문’이라는 글자와 ‘창문’을 향한 글쓰기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는 현실에서 시인의 “몸은 더욱 차갑고 무거워진다”며 삶의 위기를 고백한다.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한 점”, 죽음으로 모든 삶이 치달을 때, 시인은 “창문 뒤에 나만 서있지 않다고, 제발”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 죽은 사람들의 영정 앞에 ‘국화’를 놓으면서 시인은, 의도적으로 “창문이라고 써놓고/파고라는 말을 몰라서 전부 파도라는 말로 고”친다. 그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이 봉쇄된 현실이 높은 파고에 의해 휩쓸려서 끝장나기보다는 거센 밀물일지라도 언젠가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실의 ‘파도’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창문 없는 현실에서 「우리가 본 것」은 ‘파고’가 아니라 ‘파도’이다. 김복희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윤리를 내보인다.
지금까지 읽은 『304낭독회』 팜플렛의 시편들은 고도의 정치성과 프로파간다의 구호를 주창하지 않는다는 공통의 특성을 갖고 있다. 21회까지 배포된 『304낭독회』 팜플렛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 즉 직접적으로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시편들과 격정적인 슬픔의 시편들에 비하면 최소의 정치성과 극도로 절제된 슬픔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 바알의 존재와 바알의 시 「익사한 소녀」 자체가 사회적 제도와 법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서 정치적 성격을 지니듯이 이원과 함성호, 김소형과 김복희의 시편들은 낭독되는 시공간과 비공식적 출판물인 팜플렛,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더 나아가 낭독이 끝난 후에 『304낭독회』 팜플렛의 안팎으로 확장될 그들의 시편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시적이면서 정치적이고 예언적이면서 반성적인 해석의 다양성을 기다린다. 그 시편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고 작다. 작지만 발화된 시의 언어는 멈추지 않으면서 지속되고 지속되면서 독자에게 기억됨으로써 “장미가 여기에 피어 있기 전에는, 장미를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듯이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시의 효력이 확대되고 재생산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시 자체로 정치적이며 예술적이다. 시는 법의 테두리 안에 삶을 규정하려는 모든 법의 폭력에 저항하며 법의 바깥에서 법 자체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정치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시는 항상 시 자체를 스스로 배반하는 시의 바깥에서 규범적인 삶과 관성적인 삶을 타격한다. 시의 정치성은 독자와 대중을 즉각적인 프로파간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무엇보다 시를 읽고 쓰는 주체가 타자로 이행하려는 실천으로부터 발현되며 각각의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시 읽고 재해석하며 그 시를 살아내려는 독자의 실행 능력으로부터 산출된다. 시는, 장미는, 우리는, 여기에 있다. 그것이 정치적이며 예술적이다.
아, 우리가 어떻게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하겠는가?
검붉은 봉오리에서 갑자기 여린 꽃망울이 터져 우리 가까이 다가서는데.
아,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여기에 피어 있었다.
장미가 여기에 피어 있기 전에는, 장미를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미가 여기에 피었을 때는, 장미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 결코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 우리가 어떻게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하겠는가?Ach, wie sollen wir die kleine Rose buchen?」(서경하 옮김) 전문(1954)
『문학들』 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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