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_시인. 문학평론가
2015년 이후 한국시의 새로운 시적 흐름을 성찰할 수 있는 영화 한 편이 있다. 헝가리 출신 라슬로 네메시(László Nemes, 1977- )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사울의 아들Saul fia>(2015)은 1944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의 살육 현장을 담고 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사울의 아들>에 대해 라슬로 네메시가 “2001년 저널 『쇼아의 역사』가 발간한 특집호 「재에 묻힌 목소리」에 담긴 어마어마한 비밀 수고들을 발견”했으며 <사울의 아들>에서 “자료와 증언에 근거하지 않은 숏, 이 기록에 기초하지 않은 숏은 영화 속에 하나도 없”다고 밝힌다.
영화는 첫 자막에 기술하는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존더코만도'는 ‘특수팀’이라는 독일어 뜻과 함께 ‘비밀을 지닌 자(Geheimnisträger)’ 또는 ‘비밀 운반자’로도 불리는데, 유대인 특수 조직을 가리킨다. 그들은 나치 친위대의 명령과 감독 아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발가벗기고 가스실로 입소시키는 한편, 사람들이 남긴 옷에서 금품을 수집하고 나치에게 상납하는 임무를 맡았다. 존더코만도는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으면 소각장으로 시신더미를 운반하고 타다 남은 재와 함께 매장하였다. 바닥에 흘린 피를 닦는 청소와 소독도, 사람들을 강제로 구덩이로 밀어넣고 생매장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존더코만도는 다른 수용자들과 분리되어 생활하였으며 보통 몇 달 동안의 노역 후에 기밀 유지를 위해 다른 유대인들처럼 가스실에서 처형당했다.
영화의 주인공 헝가리인 아우슬렌더 사울(Ausländer Saul)은 존더코만도이다. 사울과 동료들은 존더코만도로서 지금까지 4개월여 동안 일을 해왔다. 그들은 앞서 처형된 존더코만도들처럼 곧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는다. 작업반장 격의 존더코만도는 나치 장교로부터 70명의 존더코만도 동료들 명단을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에 그들 일부는 처형되기 전에 수용소 내부로 화약을 몰래 들여와서 봉기를 일으키고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나치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수용소의 학살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와 소각장을 은밀히 촬영한 카메라를 흙속에 파묻는다. 1944년 10월 7일. 역사적 기록으로 남은 바와 같이 그들은 봉기를 일으켜서 소각장을 불태우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신속히 전원 진압되고 탈출한 소수마저도 나치의 추적 끝에 살해된다.
이상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은 문서와 사진에 근거한 존더코만도의 봉기와 실패, 그들의 임무와 역할에 대한 기록이며 라슬로 네메시의 영화 <사울의 아들>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사울의 아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다. 사울은 가스실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서 점점 죽어가는 소년을 목격한다. 그 순간부터 사울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소년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너는 아들이 없어”라고 말하는 동료에게 “내 아들을 묻어줘야 해”라고 응수한다. 그는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한 모든 행동을 감행한다. “죽은 자 때문에 산 자가 죽게 되었다”고 말하는 다른 동료에게 사울은 “우린 예전에 죽었다”고 답한다. 사울은 부검의에게 소년의 시신을 대체할 다른 시신을 부탁하고 시신의 재를 삽으로 퍼서 내다버리는 강가에서도 안식의 기도를 올려줄 랍비를 찾는다. 그는 수용소의 학살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를 나치에게 알리겠다는 협박까지 해가면서 동료에게 랍비를 요청한다. 이것은 모두 나치에게 발각되면 즉결 처분을 받을 일들이다. 마침내 랍비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소년의 시신을 땅속에 묻어주고자 흙을 급히 파내지만 흙은 시신을 묻을 수 없을 만큼 딱딱하다. 더욱이 랍비는 기도조차 할 줄 모르는 가짜였다. 사울은 나치의 추격 속에서 시신을 묻어주지 못한 채 시신과 함께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는 강에서 시신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는 강을 건넌 동료들과 함께 숲속 창고에 도착한다. 사울은 숲속 창고에 환영처럼 나타난 낯선 소년에게 영화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소를 보낸다. 소년은 나치에게 존더코만도의 위치를 알려주고 도망간다. 곧이어 총성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서 서사는 끝난다.
이와 같은 서사 전개로 인해 <사울의 아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다. <사울의 아들>은 전적으로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영화이지만 그 역사적 기록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살육 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려는 ‘사울’이라는 인물의 허구적 서사, 그 불가능에 가까운 서사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울의 아들>은 소년의 친자 여부와 관계없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 눈앞에서 죽어가는 소년에 대한 인간의 윤리를 죽음을 무릅쓰고 실천하는 인물, ‘사울’을 창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크레온의 포고령을 위반하면서까지 적군의 편에 섰던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러주는 소녀 ‘안티고네’와 다르지 않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하계의 불문율에 근거하여 국왕 크레온의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오빠의 장례를 치르는 행위는 크레온이 금령으로 삼은 법의 효력을 중지시키고 ‘인간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안티고네의 장례 행위는 법을 위반하면서 정치적인 것과 시적인 것을 동시에 출현시킨다. 안티고네의 장례 행위가 ‘지금-여기’를 지배하는 법의 효력을 무력화하고 ‘인간다움’을 되물으면서 “진정한 시는 법들의 바깥에 있”음을 환기시켰던 것처럼 사울의 장례 행위는 나치의 법과 그 명령에 협력한 조력자들의 암묵적 동조를 위반하는 정치성, 그 정치적인 것의 시적인 것, 그 시적 진실과 울림을 전한다. 그런 점에서 시적인 것의 정치성과 그 ‘리얼리즘’은 ‘아우슈비츠’로 지칭되는 역사적 기록과 사태를 증언한 자료의 재현에 절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살육의 현장에 없다. 시는 사태의 징후, 또는 사태의 사후로서 도래한다. 시는 사태의 현장에서 그 긴박한 사태를 체험한 자의 죽음으로 인해 당장 표현될 수 없다. 시는 사태의 발발을 예고하는 사건의 징후에서 현현하고 사태의 사후에 살아남은 자의 증언이 촉발시킨 재현의 불가능성과 그 실패의 기록 속에서 도래한다. 역사적 기록과 증언은 사태의 완전한 형태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며 매번 발굴될 때마다 새롭게 구성된다. 시는 그 사태의 파편적 재현뿐만 아니라 언어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체감 속에서 그 증언과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비록 허구적 인물의 서사라고 할지라도 그 ‘픽션’의 미지와 시적 진실까지 상상할 때, 불현듯 출현한다. 이것이 ‘증언과 기록’을 초과하는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까지 껴안는 시의 ‘리얼리즘’이며, ‘있지 않은 존재의 함께 있음’까지 암시하는 리얼리즘, 그 시적인 것의 정치성을 발생시키는 시이다. “기억하기 위해 상상해야” 하고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상상’해야” 하는 언어가 곧 시다.
<사울의 아들>은 ‘증언과 기록’을 초과하는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까지 표현한다. <사울의 아들>은 「안티고네」처럼 애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안티고네」와 다른 현대의 시적인 표현 형식을 제시한다. 라슬로 네메시는 “앞서 각인된 표현가치들의 형식 세계와 씨름해야 한다는 압박”을 이겨내고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창안한다. <사울의 아들>에서 압도적인 것은 영화의 기본 문법인 이미지의 영사(映寫)가 아니라 사운드의 공습이다. <사울의 아들> 첫 장면은 존더코만도에 관한 자막인데, 그 자막이 끝나면 암전 속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사울과 동료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총성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면 암전 속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영화가 어둠 속의 새소리로 시작하여 어둠 속의 빗소리로 끝나는 것인데, 그 사운드는 새소리에 깃든 어떤 평화를 기대하는 관객의 심리를 온갖 폭력과 살인이 자행되는 빛의 영사 속에서 전복하고 어둠 속에서 애도하는 눈물을 빗소리와 함께 조용히 흐르게 한다.
영화는 어둠과 어둠 사이에 빛이 쏟아지는 이미지의 잔상과 그 연속 운동이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그 이미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클로즈업된 사울의 흔들리는 얼굴과 소년의 시신이 선명한 것과 달리 어둠 속 다수의 유태인들은 대부분 흐릿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인간들”이다. 그들은 안식의 기도도 없이, 편안히 묻힐 한 줌 흙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가시적인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거나 흐릿하게 잔존하는 이미지의 존재들이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선명한 현존은 가시적인 프레임 바깥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운드 속에 있다. 그들은 프레임 바깥에서 끊임없이 프레임 안으로 공습하는 사운드의 폭력 속에 놓여있다. 프레임 바깥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들, 그 사운드는 나치의 딱딱한 독일어 발음으로 명령하는 소리, 시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피 묻은 바닥을 닦는 거친 솔질 소리, 시체를 태우는 불길소리,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재를 삽으로 퍼서 강으로 내다버리는 소리, 연이은 총성과 절규, 매질소리, 또 사람들을 태우고 도착하는 기차소리를 비롯해 분별할 수 없는 익명의 소리들로서 상영시간 내내 끝없이 이어진다.
이 모든 사운드의 공습은 프레임 안에 머물면서 재현하는 시각적 이미지의 한계를 넘어서서 프레임 바깥에서 끝없이 자행되는 나치의 폭력과 학살을 상상하도록 신체에 각인시키는 감응을 낳는다. 사운드의 공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학살의 체감을 청각적으로 직접 전달함으로써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그 사운드가 촉발하는 절규의 환청까지 들리게 한다. 가시적인 프레임 안의 이미지에 고정된 감각을 뒤흔들고 비가시적인 프레임 바깥의 사운드가 촉발하는 감각을 되살려냄으로써 신체를 지배하는 감각의 재배치를 일으키는 시적인 것과 정치적 감응을 발생시킨다. 저 영화 속 빛의 폭력, 나치의 학살에 비춰진 죽음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이름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언하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상상하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로 지칭되는 역사적 사태에 대하여 즉각적인 고발과 분노, 증언과 기록의 재현 언어가 아니라 ‘사운드의 공습’이라는 감각적인 것의 재배치와 새로운 표현 형식을 통해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감응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만약, 문학이, 그리고 시가 증언에만 멈춘다면, 사태의 (불)가능한 사실적 재현에만 멈춰야 한다면,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사태를 증언하는 언어만을 절대화한다면, 시의 언어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사실에서 연원하는 부채감과 죄의식 탓에 침묵해야 하거나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무력함, 그 무(無)의 언어가 되어야 하거나 역사가에 의해 수집된 수많은 사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라슬로 네메시가 ‘사운드의 공습’을 통해 아우슈비츠, 그 역사적 사태에 대응하는 영화의 시적인 것과 시적인 언어의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였다면 2015년 이후 한국시, 그 중에서도 첫 시집의 새로운 언어 형식은 안희연과 황유원, 송승언과 김복희 등의 소수 언어가 제시하였다. 그 외의 첫 시집들에서는 장기적 불황과 자본의 예속에서 삶의 생존을 더욱 민감하게 고려하고 반응하는 알레고리 시의 ‘염려’하는 주체들이 빈번히 등장하였다. 그들의 시에서 염려, 즉 쿠라(Cura, 라틴어)는 ‘지금-여기’의 삶에서 다른 시간의 도래를 희망하지만 다른 삶의 어떤 가능성도 품지 못하는 주체의 불안을 드러내는 심리적 특성을 함의한다. 염려는 ‘지금-여기’ 한국의 시간과 장소에서 “시들지 않는 꽃들을 심어 세계를 뒤덮”는 상상력과 다른 삶에 대한 ‘동경(憧憬)’을 가로막는다. 다른 삶을 향해 도전하고 고통과 마주하고 싸우면서 ‘절대’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2015년 이후 한국시의 첫 시집에서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언어의 형식과 상상력이다. 새로운 언어의 형식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
지금, 무엇보다, 언어의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서, 있는 그대로, 김언과 이제니의 시를, 다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시적인 것과 새로운 언어의 형식을 위하여. 두 편의 시로 이 글의 끝을 대신하기로 한다.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김언, 「지금」 전문, 『한 문장』, 문학과지성사, 2018.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빛을 통해 낯선 것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미래에도 보이는 세상입니다. 익숙한 것들이 놓여있는 방이 나옵니다.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보다 더 큰 것을 남겼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들어간 곳에서 나온 사람이다. 들어갔는가를 알기 위해 다시 나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가. 많은 것들에 뒤덮여 살아왔다.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수많은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은 두 개의 방이 있는 구조이다. 공간과 공간 사이의 빛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 같은 것들에 대해 쓰고 있다. 눈을 감은 채로 회랑과 복도를 더듬고 있다.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미래의 방은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후의 구조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무척 어지러운 그림자의 그물이다. 흘러가는 비행운을 통해 구름의 과거를 본다. 하얀 눈 위에 검은 잉크를 떨어뜨리며 누군가의 미래를 점칠 수도 있다. 옛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옛날로 거슬러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지속적인 무대가 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어두운 생각뿐이다.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해 이 문장들을 쓰고 있다. 그러나 분명 태양은 흑점을 품고 있다. 꾸며낸 이야기가 가본 적 없는 거리의 풍경을 불러들인다. 한곳으로 모이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항해는 계속될 것이다. 구름에서 태양을 향한 항해는 지속될 것이다. 이 모든 목소리를 듣는 입장이라면 너는 이미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문장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 또한 가지고 있었다. 구석진 사각의 방을 통해 우리는 단순한 소음을 듣기도 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꾸미지 않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오래된 목소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배열이 필요하다. 그는 덧붙이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 낱말 연습을 하고 난 뒤에는 기억의 기록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막힌 부분을 골라냅니다. 나날이 새로워질 사건과 물건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습니다. 새로운 세기에 살고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너를 한 문장 이전으로 옮겨둔다. 정확히 나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냉담한 목소리가 흘러들어도 너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구형이고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낱말 상자에서 낱말 종이를 꺼낸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청색 갈색 문장을 수집한다. 연극은 행복한 결말로 끝은 맺는다. 이제 우리는 주변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아무도 모르는 사건들 속에서도. 대팻밥과 나무 먼지 사이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낱말과 문장 사이에서도. 소수의 의견으로 선택된 산책로와 선언문 사이에서도. 이제 드디어 준비가 끝난 것이다. 모두 모여들 수 있도록 나아갈 때 흰색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끝날 때까지 음지의 양치식물을 기르기로 한다. 그것을 제대로 보고 싶지만 다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합니다. 함축을 위한 문장을 버렸을 때 다시 들려옵니다. 그것은 미래의 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당신은 이 세계에 대해 당신의 문장으로 무엇을 왜곡시켰습니까. 너는 순간의 풍경을 순간의 그림으로 남겼다. 순간의 그림은 그림자 저편에서 흐르고 있다. 네가 느꼈던 순간의 느낌을 네가 느꼈던 순간의 느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빛을 통해 낯선 것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니, 「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전문,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사, 2019.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폴란드 비르케나우에 독일 제3제국이 세운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가 있다. 수용소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온전히 보여준다. 역사적인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0,000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http://heritage.unesco.or.kr 참고.
쇼아(Shoah). ‘파국’, ‘절멸’을 뜻하는 히브리어로서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가리킨다.
「재에 묻힌 목소리」: Revue d'histoire de la Shoah, n° 171, 2001("Des voix sous la cendre. Manuscrits des Sonderkommandos d'Auschuwitz-Birkenau").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Sortir du noir, Les Éditions de Minuit, 2015.』, 이나라 옮김, 만일, 2016, p.11 재인용.
문서와 소각장을 은밀히 촬영한 카메라를 흙속에 파묻는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라슬로 네메시가 언급한 “1944년 비르케나우 5호 소각장의 존더코만도 멤버들이 찍은 네 장의 사진”을 재언급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존더코만도가 남긴 ‘네 장의 사진’을 분석한 자신의 저서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Images malgré tout, Les Éditions de Minuit, 2003.』 출간 이후에 희소한 쇼아의 생존자들이 사진을 찍은 이의 신분에 대한 개연성 있는 증언을 제공했다고 기록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같은 책, pp.15-17 참고.
다큐멘터리: 끌로드 란쯔만(Claude Lanzmann)의 영화 <쇼아Shoah>(1985)가 대표적인 다큐멘터리이다. 영화 <쇼아>(1985)는 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556분으로 편집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의 증언만으로 만든 인터뷰, 그 자체의 영화이다. 끌로드 란쯔만은 다른 어떤 필름도 사용하지 않고 유태인들의 증언만을 담아낸 필름으로 유태인 학살을 재현한다.
“진정한 시는 법들의 바깥에 있”음: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L'Impossible(1962)』, 성귀수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 p.186. 번역은 수정.
그 정치적인 것의 시적인 것: 여기서 시적인 것이란 삶과 예술 전반에서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법의 효력, 문화적 관습, 제도의 권한, 언어의 문법, 주체의 권력이 과연 자명한 것인가를 되묻는 물음을 통해 법‘들’의 효력과 주체의 권력을 중지시키고 무력화하면서 출현하는 타자와 소수자의 목소리, 미시적이고 흐릿한 존재들의 현존이다. 시적인 것은 자명한 법과 윤리, 관습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삶과 다른 존재의 현존과 그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과 사태를 증언: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은 증언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들이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 다른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차츰차츰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메두사)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pp.98-99.
사태의 사후에 살아남은 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의사, 재봉사, 구두 수선공, 음악가, 매력적인 젊은 동성애자, 수용소 권력자의 친구이거나 동향 사람이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125.
“기억하기 위해 상상해야” 하고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상상’해야”: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오윤성 옮김, 레베카, 2017, p.51., p.246. 번역은 수정.
“앞서 각인된 표현가치들의 형식 세계와 씨름해야 한다는 압박”: 아비 바르부르크, 「『므네모시네』 머리말」, 신동화 옮김, 『인문예술잡지F』, 문지문화원 사이, 2013.4., p.70.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인간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앞의 책, p.125.
그 사운드가 촉발하는 절규의 환청: 프랑스 화가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7~1964)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파리의 교외 남쪽 샤트네-말라브리(Châtenay-Malabry)의 어느 병원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병원 옆의 숲에서 독일군이 연일 인질을 사살하는 총성에 시달리면서 '인질'을 주제로 작업하였는데, 그 「인질Otage」 연작을 사실적인 처형과 고문의 재현이 아니라 처형당한 인질의 찢기고 뭉개진 상흔을 암시하는 재료의 두터운 질감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재현이 불가능한 비가시적인 소리의 공포를 단순한 슬픔과 두려움의 감정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신체의 감응을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표현 형식으로 구현함으로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다채로운 양상과 그 고통으로부터 승화된 정신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장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앵포르멜(Informel) 즉, 비정형 추상회화의 한 기원이 되었다.
『현대시』 201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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