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쓺』 2017년 하권
특집: 문학성과 정치성
재현의 정치성에서 상상의 정치성으로
― 김시종과 김혜순의 시
너는 말도, 추측도 할 수 없다, 너는 다만
부서진 이미지들 더미만 알기 때문에……
이 파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왔다
송승환
1. 기억하기 위해서는 상상해야 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58)는 폴란드 모노비츠 마을에 소재한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그의 처참한 체험을 기록한 증언 ‘문학’이다. 이탈리아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 1943년 12월 3일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1945년 1월 27일까지 갇혀있던 수용소의 삶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작가의 말」에서 책을 쓴 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내 책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당혹스러운 주제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잔학상에 관해 덧붙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2
그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체험한 폭력과 굶주림, 강제 노역과 수많은 죽임을 분노와 증오의 언어로 폭로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을 개인적 원한과 분노의 큰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서구 문명의 합리성 속에서 정립된 이성적 인간이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여 만든 ‘수용소’에 대해 경악하며 그 수용소의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담담하게 기록한다. 더 나아가 그는 수용소의 일상을 정밀한 사실 기록과 연대기적 순서로만 기술하지 않는다. 그는 단테의 『신곡』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책의 근간으로 삼음으로써 『이것이 인간인가』를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문학적 전통 속에 자리매김한다.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되어 떠나는 「여행」으로 시작한 글은 곳곳에서 단테의 지옥 묘사를 인용하며 극적으로 귀환하게 되는 마지막 「열흘간의 이야기」로 끝난다. 그 서사는 아우슈비츠의 현실이 단테가 묘사한 ‘지옥’과 다르지 않음을 제시하며 고난과 모험의 여정 끝에 극적으로 귀환한 오뒷세우스처럼 인간에 대한 본질과 새로운 통찰에 도달한 그의 성찰을 드러낸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54)
이 문장들은 『이것이 인간인가』가 나치스의 ‘쇼아(shoah, ‘절멸’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고발하는 르포르타주(reportage)의 증언록이 아니라 증언 ‘문학’으로 성립시키는 근거이다. 「독자들에게 답한다」에서 “나는 증오란 동물적이고 거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가 겪은 수용소의 폭력을 단지 증오의 언어로 고발했다면 그 언어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개인의 증언에 그쳤을 것이다. 폭로와 증오로 가득 찬 언어는 개인적 분노의 표출일 뿐이다.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하며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더불어 그는 사태의 경험자로서 자신이 겪은 사태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사태의 발생과 과정과 결과를 되묻는다. 동물과 다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자인하는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어떤 감정도 없는 사물처럼 처리하면서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 물음을 통해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으며 동물과 다른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그들의 범죄를 문학의 언어로 기억해내려 한다. 그는 쇼아로부터 살아남은 개인의 증언이 그 자체로 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주요한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지만 홀로코스트라는 사태의 전체가 아님을 인식한다. 증언이 개인의 증언으로만 표출될 때 증언은 역사적 사실의 한 파편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체험을 사태의 전체로 간주하는 오만 대신 최대한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 형식을 채택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것이 인간인가』를 역사적 사실의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문학’으로 성립시킨다. 그리하여 『이것이 인간인가』는 역사적 사실의 증언으로 정치성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성찰을 제기하는 문학적 언어로써 문학의 정치성을 발현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증언 ‘문학’의 정치성을 성취했다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최초로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 1985)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가자와 목격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사태의 증언을 집적한 역사적 사실로서 그 정치성을 성취한 바 있다. 초판과 개정판의 집필에 모두 참여한 이재의는 “초판이 피해자인 광주시민의 증언과 기록만을 토대로 집필된 데 반해, 개정판은 그 이후 밝혀진 ‘계엄군의 군사작전’ 내용과 5․18재판 결과를 반영하여 ‘역사적․법률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5․18을 현장에서 목격한 내외신 기자들의 객관적인 증언” 3도 개정판에 수록하였음을 밝힌다.
최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51만발이 넘는 각종 실탄을 사용했다는 군 기록문서가 처음 발견 4되었는가 하면 ‘헬기 기관총 사격(기총소사)’을 유력하게 뒷받침하는 내용 5도 발굴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증언은 새롭게 채록되고 있으며 사료는 더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이 증언들과 사료들은 그 자체로 무구한 시민들을 학살한 계엄군의 위법성과 폭력성을 입증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치성을 발휘하지만 시의 언어와는 성격을 달리 한다. 새로운 증거들은 현재까지 수집된 증언과 사료의 파편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진실과 정치성을 품고 있지만 그 파편들로도 완성하지 못한 공백의 어둠이 남아있다. 공백의 어둠 속에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자의 행방과 이름 없이 죽은 자의 목소리와 채록되지 않은 목격자의 표현하지 못한 말과 진실이 있다. 서른네 명의 단원고 아이들 목소리를 서른네 명의 시인이 받아쓴 육성 생일시 모음집 『엄마. 나야.』(난다, 2015)처럼 시인은 기록하고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저 공백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파편들로 남아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그들에게 ‘들린’ 언어의 형식으로 받아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있음’을 한꺼번에 ‘없음’으로 만들어버린 끔찍한 현실에서 그들이 여전히 ‘여기에 함께 있음’을―“우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우리는 곁에 있어요” 6―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현실과 그들에 대한 망각을 비판적으로 암시하는 형식, 그 언어에서 시의 정치성이 발현된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자들의, 무덤 없이 죽은 자들의, 이름 없는 것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받아쓰는 언어가 ‘시’이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로 되살아난 그들의 목소리가 미지의 독자를 향해 나아가는 열린 공간에서 시의 정치성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 위해 상상” 7하는 언어, 그것이 시의 형식이며 시의 정치성이다.
2.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김시종 시집 『광주시편』(1983)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있어도 상관없을 만큼
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 김시종, 「바래지는 시간 속」 부분
재일한국인 김시종(金時種, 1929~ ) 시인의 시집 『광주시편光州詩篇』(福武書店, 1983) 8은 총 21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21편의 모든 시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편들이다. 김시종은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에 맞이한 조국 해방의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기성세대의 행태에 의문을 품으며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1948년 제주 4․3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결국 1949년 5월 연로한 부모님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며 “오사카의 조선인 거주지 이카이노에 정착한 후 지금껏 ‘재일(在日)’의 삶을 살면서 일본어로 시를 써 오고” 9 있다.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파울 첼란이 동족을 절멸시킨 독일인의 독일어를 모어(母語)로 삼아 「죽음의 푸가」를 쓴 것과 유사하게 김시종은 동족을 학살하고 피식민지인으로 만든 일본인의 일본어를 모어로 삼아 시를 쓰는데, 그는 “일본어를 향해 ‘복수’하는 심정”(「옮긴이의 말」)으로 시 10를 써왔다. 그러한 김시종이 1980년 5월 20일, 일본의 언론을 통해 광주 ‘사태’ 소식을 접하고 일본어로 쓴 시가 「바래지는 시간 속」이다. 이것은 그가 1948년 4․3 제주 사건에 적극 참여하였다가 일본으로 밀항한 후, 장편시집 『니이가타新潟』(構造社, 1970) 11에서야 4․3 제주 사건을 언급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빠른 반응의 시쓰기였다. 그 후 ‘광주’라는 말이 금기시되던 일본에서 3년간 여러 잡지에 ‘광주’ 시편들을 발표하고 묶었는데, 그 시집이 『광주시편』(1983)이다.
김시종의 시집 『광주시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시구는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이다. 김시종은 4․3 제주 사건 경험을 제주에서 쓰지 않은 것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에서 쓰지 않았다. 아니다. 그는 사태로부터 도피하거나 부재하였던 탓에 시를 쓰지 못했다. “말은 힘 앞에서도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사실 또한 말을 다시 입 속으로 밀어 넣고 꼼짝 못하게 한다. 말에는 어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평온한 공간이 있는 듯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은 황폐한 그대로” 있다고 그는 시집 「후기」에서 밝힌 바 있다.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 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중략…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중략…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동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부분 12
1987년 돌연 자살로 삶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불편한 개념”을 빌린다면, 김시종은 4․3 제주 사건에서 “구조된 자”로서 “압도적인 사실” 앞에서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평온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벙어리”로서 4․3 제주 사건 및 5․18 광주 사태와 일정한 거리를 둔 일본에서 “황폐한 그대로”인 “마음”을 살아낸 다음에서야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고 시는, 사태 이후에 온다. 사태 이후에 오는 시는, “가라앉은 자”의 “완전한 증인들”의 증언이 될 수 없는, 구조된 자의 기억과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도래한다. 13시집 『광주시편』(1983)은 사태 이후에 김시종에게 도래한 시로서 “나는 잊지 않겠다./세상이 잊는다 해도/나는, 나로부터는 결코 잊지 않게 하겠다”라는 「서시」를 서두로 시작하는데, 그 「서시」에는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고 ‘시’가 없었던 사태의 현장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과 상상력의 형식이 내포되어 있다.
기억과 상상력의 형식은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라는 시구에 암시되어 있다. 이 시구는 세 가지 의미의 층위를 품고 있는데, 첫째, 사태의 현장에 언제나 부재하는 ‘나’의 실존을 고백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은/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처럼 구조된 자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둘째, 사태의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한 ‘죽임’에 대한 저항을 하지 못한 ‘나’의 현실적 무력감이 스며있다. 셋째, 끔찍한 사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시인, ‘나’의 말할 수 없음의 ‘언어적 무력감’을 함의하고 있다.
때로 말은
입을 다물고 색을 낼 때가 있다.
표시가 전달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거절의 요구에는 말이 없는 거다.
예외적으로 구조된 자이며 시인으로서 김시종은 “입을 다물고 색을 낼” 침묵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은 사태를 재현하려는 “표시가 전달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처참한 사태를 직접 표현할 수 있는 시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말은 이미 빼앗긴 사상(事象)에서조차 멀어져 있고/의미는 원래의 말에서 완전히 박리(剝離)”(「입 다문 말-박관현에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시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기 이전의 광주 ‘사태’를 시집 『광주시편』(1983)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총 3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특히, 1부에 수록된 6편의 시편들(「바람」, 「흐트러져 펄럭이는」, 「먼 천둥」, 「아직도 있다면」, 「점화(點火)」, 「벼랑」)은 시집 표제 『광주시편』이 없었다면 단순히 ‘바람’과 ‘천둥’, ‘봄’과 ‘불’, ‘벼랑’과 ‘꽃잎’의 자연소재로 쓴 시로만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 표제 『광주시편』으로 인해 자연물들은 사태의 비극성을 암시하는 시의 언어로 전환됨으로써 상상력에 의한 문학적 정치성을 표출한다.
말이 이미 말이 아닐 때
그곳이 어디인지 묻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중략…
바람은 끝없는 상(喪)의 사제이다.
― 「바람」 부분
날이 갈수록 눈[眼] 저 안쪽에서
흐트러져 있는 것은 기억의 떨림이다.
― 「흐트러져 펄럭이는」 부분
소리는 언제나 하나의 모양을 새깁니다.
― 「먼 천둥」 부분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피로 물든 돌의 침묵.
― 「아직도 있다면」 부분
그 희뿌연 그림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점화(點火)」 부분
그저 꽃잎만이
무변의 정적을 흩날려 간다.
― 「벼랑」 부분
김시종은 ‘바람’과 ‘천둥’, ‘돌의 침묵’과 ‘희뿌연 그림자’, 그리고 ‘꽃잎’을 통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행방불명된 광주 시민들을 비유하고 애도하며 계엄군의 폭력을 암시적으로 비판하는 시의 형식을 고안한다. 그것은 「서시」의 “결코 잊지 않겠다”는 시인의 기억 의지를 통해 “흐트러져 있는” “기억의 떨림”을 다시 붙잡고 시적 상상력의 정치성을 구현하는 형식이다. 2부의 시편들 역시 1부의 시편들처럼 자연물에 의탁한 비유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우렁찬 피의 절규”(「바래지는 시간 속」)이며, “광주는, 왁자지껄한/빛의/암흑이다”(「뼈」)처럼 보다 직접적인 진술의 은유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여전히 사실적 재현을 통한 정치성의 추구가 아니라 “죽음은 죽음을 죽음답게 하는 산 증거의 전부였다”(「입 다문 말-박관현에게」)는 시적 인식을 드러내는 시적 진술의 정치성이다.
3부에 이르러서야 “미군 병사”와 “공수부대”(「그리하여 지금」), “자네가 유신의 우두머리가 되었구먼”(「돌고 돌아서」), “총구에 거스러미 지는 도시”(「마음에게」) 정도의 사실적 지시어가 등장하지만 그 지시어들도 생경한 구호와 선동을 동반하는 정치적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우의(愚意)를 믿는”(「미친 우의(寓意)」) 시인의 상상력을 매개로 전개되는 시적 언어의 일부로써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김시종은 사태를 정밀하게 바라보고 사태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해 사태의 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정치적 언어의 사용자가 아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어서 생긴 부채감과 무력감 속에서 “언제나 저 멀리 바라다보는 마음”(「거리」)과 “어디로든 불러내 주는, 줄어들지 않는 관심”(「거리」)을 잊지 않고 광주 사태를 기억하는 시적 언어의 발화자이다. 그는 사태와 일정한 “거리(距離)”를 유지하면서 그 “간격”에서 발원하는 상상력을 통해 광주 사태의 비극성과 정치성을 ‘우의(寓意)’의 시적 언어로 발현시키는 시인이다. 시집 『광주시편』(1983)은 피식민지인으로서 지닌 일본인 정체성, 4․3 제주 사건의 참가자, 밀항자,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삼은 재일(在日)조선인 시인, 그리고 재일(在日)한국인 시인이 되기까지 겪은 김시종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이 새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가로질러 우리 시대에 도착한 파울 첼란의 ‘유리병 편지(Flaschenpost)’에 담긴 시편들이다. 언어와 시공간의 벽을 뚫어낸 시적 언어의 상상력이 시의 정치성을 발현한 시집이다.
3.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2016)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 김혜순, 「피어라 돼지」 부분
사르트르는 1947년 프랑스 작가의 상황에 대해 “우리가 써야 했던 것은 그들의 전쟁과 그들의 죽음에 관해서였다. 역사 속으로 무참히 끼여든 우리는 역사성의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린 것” 15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그의 진술은 지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의 시인이 처한 상황을 미리 예고한 것과 다름없다.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역사적 시공간의 특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성의 문학과 재난의 글쓰기를 강요하는 상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구제역 파동과 세월호 사건, 강남역 살인사건과 예술가 블랙리스트, 촛불집회와 탄핵 사건 등은 동시대 한국 시인들의 무의식에 강한 흔적을 남겼고 언어 실험과 존재의 탐구를 추구하던 시인들조차 시의 언어로 공동체의 윤리와 사회적 책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시인 김혜순은 ‘바리데기’의 후예임을 자임하며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 16인 여성의 언어로 시의 규범에 대항하면서 시의 타자성을 부단히 실천해왔는데,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가/아무것도 소리치지 않기가//시의 체면을 세워주기가/너무도 힘든 시절이었다”(「시인의 말」)고 밝히는 시집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지난 한국 사회의 상황과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선 미학적 응전을 표출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시집 표제와 동일한 한 편의 장시 「피어라 돼지」(시집의 1부)는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전면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정치적 언어를 결코 취하지 않는다. 정치적 언어는 합리성으로 위장한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의 논리로 작동하는 남성의 언어이며 허위의 규율과 규범으로 여성과 약자, 소수자와 몫이 없는 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대상화하는 주체의 언어임을 김혜순은 분명히 인지하고 배제한다.
정치적 언어와 경제적 효율성이 작동하는 주체의 합리성은 돼지를 사육하는 방법에도 깃들어있다. 돼지는 비좁고 불결한 ‘공장식 축산’ 환경 속에서 단 한 번도 바깥을 나오지 못한 채 ‘생산’된다.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어미 돼지는 몸을 조금도 돌릴 수 없는 폭 60센티미터와 길이 210센티미터의 차가운 금속 틀에 감금되어 있다가 새끼를 콘크리트 바닥에 낳는다. 어미 돼지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새끼 돼지는 마취도 없이 송곳니와 꼬리를 제거당한다. 돼지는 3세 아이의 인간 지능을 지니고 있다. 한 식구의 일원이었다면 불렸을 이름도 없이 번호로 불리는 새끼 돼지는 생후 3개월만에 도축당한다. 출산하지 못하는 어미 돼지는 6개월 만에 도축당한다. 도축장행 트럭에 오르는 순간이 돼지의 최초 바깥 여행 17이다. 그리하여 구제역은 열악한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질병이었다. 2010년과 2011년 구제역 사건 당시에 살아있던 돼지들은 집단으로 구덩이에 파묻혔다. 18 평소 밟지도 못하던 흙에 파묻힌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밤부터 새벽까지 들렸다는 뉴스기사도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이성적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집단 학살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 인간이 합리적이며 경제적인 수익을 위해 돼지들을 ‘고기 생산 기계’처럼 사육하고 도축하며 비경제적일 때 집단 학살하는 경우에도 해당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언론 기사는 미학적 언어와 반성적 사유가 매개 19되지 않는 도구적 언어로서 사실의 정확성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성을 표출한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구제역 사건을 시발점으로 삼아 생매장당한 돼지들, 위안부, 부엌의 여성과 엄마, 육체에 갇힌 사람들, 폭력적인 현실에 감금된 도시인, 그들의 죽음과 부활의 파편적 서사를 15편의 시편에 담아내면서 오로지 시를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알레고리의 미학적 정치성을 표출한다. 김혜순은 구제역으로 인해 돼지 320만여 마리가 살처분되거나 생매장된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죽음의 상상력으로, 증언할 언어조차 없이 파묻힌 생명들, 절멸되어가는 육체들의 목소리를 받아적고 애도한다.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 「돼지는 말한다」 부분
이렇게 꽃 흐드러진 대낮에
돼지9 원피스돼지, 돼지9 투피스돼지, 돼지9 넥타이돼지 걸어온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 부분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원히 생존할 자아를 위한 장기(臟器) 농장 프로젝트 촬영중이다…중략…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 「돼지에게 돼지가」 부분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중략…
벽을 나가면 벽 바깥에 갇히는 기분이에요
― 「돼지禪」 부분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마를린 먼로」 부분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 「지뢰에 붙은 입술」 부분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 「피어라 돼지」 부분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36도 5부 방에서 나왔으니 춥겠지?
― 「산문을 나서며」 부분
장시 「피어라 돼지」의 시적 주체는 공장식 축산 환경에서 사육되고 장기이식센터에서 실험받고 도축장에서 살육당하며 흙구덩이에 생매장당한 돼지의 입장에서 말한다. “뒈지는” 돼지의 편에서 “q q q q”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 돼지의 입장에서 말한다. 「피어라 돼지」의 시적 주체는 이미 타자적이며 정치적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대상화된 돼지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과 대립되는 시인의 ‘돼지-되기’의 타자화를 거친 시적 주체인 까닭이다. ‘고기’ 돼지에 불과했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돼지의 목소리는 ‘돼지가 된’ 시인의 육성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하여 돼지이며 여성이고 타자인 시인의 파편적 말들로 재구성된 「피어라 돼지」는 순환적 구조의 재생 신화로 나타난다.
시의 시작은 ‘선방(禪房)의 벽’이며 끝은 ‘육체의 방’이다. “벽”과 “방”이 공통적으로 비유하면서 함의하는 바는 생존하고 있는 한 해탈할 수 없는 육체의 한계이다. 선방에서 해탈하려는 스님도 면벽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데, 돼지도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그러나 스님이든 돼지든 ‘벽’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 벽은, 육체의 벽이어서 도축장행 트럭을 타거나 스님의 열반으로만 나갈 수 있는 벽이다. “벽”은 돼지 축사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과 금속 틀이며 스님이 면벽중인 사면의 벽이다. 돼지 축사처럼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방이다. 그 ‘벽’과 ‘방’에 갇힌 육체는 현존하는 삶과 역사적 삶의 “슬픔과 불안”으로 가득하다.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폐하!”가 다스리는 세계는 합리적 이성과 경제적 효율과 도구적 언어로 무장한 ‘남성-주체’의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는 세계다. 살아있는 한 육체의 굶주림으로부터 해탈할 수 없는 생명의 “우울”한 세계다. ‘돼지이며 여성이고 타자인 시인’에게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실존의 조건이다. 그런데 ‘여기’는 단지 돼지들의 축사만이 아니라 경제적 효율을 최고 가치로 삼고 비인간적인 삶과 일상적인 죽임을 일삼는 동시대 한국 사회와 다르지 않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산 채로 쇼아의 구덩이로 매일 끌려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고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라 돼지들”에 대한 슬픈 풍자인 것이다.
사벽에 갇힌 것은 돼지와 스님뿐만이 아니다. “부엌”에 여자들도, “새끼”에 엄마들도 갇혀있다. “돼지9”로 불리는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도 현대 도시의 익명적 삶에 감금되어 있다. “이곳”은 “차마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곳이다. 인간이 영원한 삶을 위해 돼지의 장기를 이식받는 날이 멀지 않은 곳이다. 돼지가 인간의 장기로 되기 위해 사육되는 곳이다. 인간의 얼굴을 지닌 돼지들의 공장 축사다. “하루만 걸러도 냄새 진동하는” 돼지인 줄 모르고 사는 시인과 선생의 부엌이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 우리의 방이다. “훔치지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하고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하고 “재판도 없이/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하는 직장이다. 육체와 한국 사회에 감금된 ‘돼지이며 여성이고 시인이며 선생’인 김혜순은, 살아있는 돼지들, 그 생명들을 집단으로 생매장하는 현실에 대하여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오로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간이 돼지들을, 인간이 인간들을 산 채로 무참히 학살하는 현실에 대하여 “못 견디”게 아파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여성들과 위안부, 돼지들의 무고한 죽음에 대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절멸하여 증언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증인들’을 향해 외친다. “피어라 돼지!/날아라 돼지!”. 외침의 기저에는 가해자들을 대신한 대속(代贖)과 용서의 간청이, 구덩이 속으로 ‘가라앉은 자들’의 무고한 죽음을 기리는 애도가, 부활의 기도가 있다. 부활은 파묻힌 돼지의 살과 돼지를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고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을 때 이뤄진다. 돼지 육체의 ‘방’을 벗어날 때 부활한다.
그러나 죽음을 통한 돼지의 부활은 쉽사리 구원이 되지 못한다. 죽음을 통한 부활조차도 구원이 되지 못하는 세계가 한국 사회임을 암시한다.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따라온 것은, “글의 집”이 “너무 좁은데 피할 줄도 모르는” 여자, 돼지다. “36도 5부 방”, 육체에서 벗어났으나 쇼아의 지상을 유령처럼 떠돌며 여성들, 타자들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나는, 시인이다. 죽어서도 떠나지 못한 채 나는, 돼지로 부활한다. “기쁘다 돼지 오셨네/만백성 맞으라!”는 마지막 시구로 탄생한다. 구원자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돼지로 부활한 나의 탄생은, 경제적 효율의 ‘홀로코스트 구덩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런 점에서 한 편의 장시 「피어라 돼지」는 ‘공장형 축산 사회’라고 호명해도 부족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더 나아가 구제역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파편적 사실들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못한 공백의 어둠속에서 증언도 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돼지들, 여성들, 위안부들, 성소수자와 난민들, 그 모든 타자의 죽음과 현존을 상상하고 기억하며 그들의 잔존을, “내가 돼지! 돼지!”, “뒈지는” 절규를 표출한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이성적 주체의 합리성으로 운용되는 자본에 의한 대량 학살을 재현하고 비판하는 언론 기사의 정치성이 아니라 구제역 사태의 파편들이 불러일으킨 상상력을 통해 타자들의 죽음을 기억해내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알레고리적 미학의 정치성을 적극 개진한다.
총체성의 소멸과 전망의 부재가 일상적인 현대 사회에서 알레고리적 미학은 현대의 파편적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시의 형식이다. 현대성과 자본주의를 지향하면서 파괴된 전통적인 삶과 사회의 윤리가 여전히 개인과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리로 남아있는 한편,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운용되는 현실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전통적 규범과 물적 토대의 파괴 속에서 자본의 증식 속도 만큼 파생되는 삶의 편린들과 정신적 외상은 한국 사회의 주요한 병적 증상이다. 장시 「피어라 돼지」에서 그 병적 증상은 15편의 시편들로 이뤄진 시편들뿐만 아니라 시편들 사이의 여백에 현존하는 타자들, 억압받고 살육당하고 죽어서도 배회하는 유령의 목소리까지 서로 메아리치며 알레고리적 미학의 정치성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시집 『피어라 돼지』는 장시 「피어라 돼지」에서 드러낸 주제들을 확장하고 심화함으로써 여성의 시쓰기가 지닌 타자성과 정치성을 첨예하게 제기한 문제적 시집이다.
4. 파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왔다
김시종과 김혜순의 시처럼 문학의 정치성은 사태의 증언과 재현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문학의 정치성은 르포르타주처럼 사태의 증언과 재현의 직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저 사태의 파편적 진실을 품고 있는 증언의 배후와 공백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으로부터 발생한다. 문학은, 그리고 시의 정치성은,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증언과 고발에서 직접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언자가 미처 말하지 못한 공백과 증언의 심층에 놓인 상처와 기억, 어둠 속에서 밝혀지지 않고 잊혀진 파편적 사실들을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언어에서 발현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언어적으로는 도저히 재현 불가능한 것에 가까워질수록, 작가는 그것을 언어화할 형식을 고안” 20해야 한다. 만약, 문학이, 그리고 시가 증언에만 멈춘다면, 사태의 (불)가능한 사실적 재현에만 멈춰야 한다면,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사태를 증언하는 언어만을 절대화한다면, 시의 언어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사실에서 연원하는 부채감과 죄의식 탓에 침묵해야 하거나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무력함, 그 무(無)의 언어 21가 되어야 하거나 역사가에 의해 수집된 수많은 사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재현의 정치성을 옹호하는 이에게 엘리엇의 시를 빌려 말해본다면, “너는 말도, 추측도 할 수 없다, 너는 다만/부서진 이미지들 더미만 알기 때문에”(「황무지」). 그러나 문학은, 시는, 사태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왔”(「황무지」)기 때문에 증언의 파편성이 지닌 의미를 되묻고 의심하면서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태의 전체와 그 망각의 파편들을 복원해내는 상상의 언어이다. 아우슈비츠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구제역 사건처럼, 세월호 사건처럼, 말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사태에 대하여, ‘사태! 그 자체로!’ 향하는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상상하고 말하는 시의 언어. 시의 정치성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22 상상력의 언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태의 자리에, 아우슈비츠에, 광주민주화운동에, 구제역 사건에, 세월호 사건에, 그 현장에 시는 없었다. 시는 없는데, 노래와 구호, 사이렌과 총성, 비명과 죽음이 있었다. 시는, 사태의 자리에 부재하다. 시는, 사태 이후에 온다. 시는, 사태 이후에 오기 때문에 사태, 그 자체의 끔찍함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고 경악스러운 고통을 즉각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부채감과 무력감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말을 해야만 하는 시인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의 언어는, 그리하여 매번 다시, 고쳐서 말해야만 하는 언어는, 사태를 기억하기 위해 상상하는 언어는, 언제나 나중에 도래한다. 상상을 통해, 시인의 육성이 아니라 사태의 어둠 속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름 없는 타자의 목소리로, 사태의 어둠 속 하나의 파편에서 비롯된 상상력으로, 온전히 고통스럽게 사태를 살아낸, 시인의 온몸을 빌어서 돌연, 도래한다.
<원고지 9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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