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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의 연작소설집『어디에도 어디서도』

독서

by POETIKA 2017. 3. 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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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소설가인 김선재의 연작소설집 『어디에도 어디서도』(문학실험실, 2017)은 시적 사유와 직관적 문장으로 현존하는 존재와 사태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며 그 삶의 비의에 도달한다. 특히, 4편의 연작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틈>은 일상적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기이한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그 환상적 알레고리는 소설이 아닌 시의 자리를 마련한다.

p.011. 아시겠지만 이 세계는 많은 것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저희가 할 일은 그들이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가장 독이 되는 것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건 선생도 아셔야 합니다....자세히 보세요. 나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저 숲과 눈뿐이었다. 아니, 뭔가가 더 있기는 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눈 덮인 들판에 얼룩 같은 것이 군데군데 보였고 숲 언저리에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맹세코 그뿐이었다. 그건 얼마든지 카메라 렌즈에 실수로 먼지가 묻었거나 눈 덮인 대지의 음영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 얼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그(염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 동그랗고 까만 눈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까만 색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중략...

 

염소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나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있었다. 숲과 눈을 더 숲과 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다 마침내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됐을 때, 나는 길든 짐승처럼 컴퓨터를 켰다.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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