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김현문학패 수상 작가론
"나는 당신을 그토록 꿈꾸었기에
당신은 당신의 실재를 잃는다"
―로베르 데스노스, 「나는 당신을 그토록 꿈꾸었다」, 『반수신의 오후』
민희식ㆍ이재호 편역, 범한서적, 1970, 73쪽 재인용. 번역은 수정.
송승환
법의 폭력
서대경의 시는 운(韻, vers)이 없는 환상적 알레고리 서사의 시적 경이를 직조한다. 그것은 각운(脚韻)의 유무가 시의 양식을 규정하는 시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한국 현대시의 발생론적 계보에서 소수의 전위 시인이 성취한 시의 영역이다. 김구용의 장형(長型) 산문시 「소인(消印)」(1957), 「꿈의 이상(理想)」(1958), 「불협화음의 꽃Ⅱ」(1961)은 모더니티의 충격과 각운의 붕괴 상관성 속에서 ‘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시적 사유를 통해 탄생한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의 경지이다. 김구용의 산문시는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의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의 기적” (샤를 보들레르, 「아르센 우세에게」, 『파리의 우울』, 황현산 옮김, 문학동네, 2015, 10쪽. 이하 책의 인용 쪽수는 생략한다.)을 일으키는 환상적 알레고리 서사를 통해 산문의 시적 경이를 실현한다. “특히 거대한 도시를 빈번하게 왕래하고, 그 수많은 관계와 교섭하는 가운데 이 끈질긴 이상(理想)이 태어나는 것”(『파리의 우울』)을 포착한 보들레르와 김구용의 시적 사유를 공유하는 서대경의 산문시는 서사의 시적 경이를 구현하는 도시의 환상과 알레고리를 고유의 미학적 발원지로 더욱 진화시킨다.
첫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서대경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첫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 2012), 두 번째 시집 『굴뚝의 기사』(현대문학, 2023). 는 도시 모더니티의 폭력 속에서 성장한 소년의 파편적 환상 서사이다. 김구용의 산문시는 전쟁으로 인한 시적 주체의 외상과 도시의 폐허 속에 수금(囚禁)된 육체의 실존에서 연원한 억압된 욕망이 왜곡된 꿈의 환상으로 재현(再現)되는 특성이 있는데, 서대경의 산문시는 도시 모더니티 폭력의 근원에 자본과 현실의 법이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시인이 발명하고 변형한 캐릭터의 초현실적 환상이 발현(發現)되는 특성이 있다. 이름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압둘 키리한’과 ‘산체스 벨퓌레’, 검은 복면 닌자와 로봇 부대의 파일럿, 구약성경에서 신의 법을 위반하는 유일한 예언자 ‘요나’, 상가 건물의 보습학원 아이와 무당집 소녀, 만화방 카운터 사내와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 교회 여인과 시를 쓰는 직장인 나, 내가 구토한 원숭이, 노동하는 아버지와 공장의 애인과 소년, 허먼 멜빌 소설의 필경사 ‘바틀비’, 랍비 뢰브의 진흙 인간 ‘골렘’과 구스타프 마이링크 소설 『골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과 도스토옙스키 소설 『악령』의 ‘레바드끼냐’ 등의 캐릭터는 일관된 서사 없이 산발적으로 출현한다. 이질적인 캐릭터들의 연관성은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캐릭터들의 파편적 환상 서사는 주로 눈이 내리는 겨울밤의 도시 변두리와 공장 지대, 기차역을 무대로 삼아 펼쳐진다는 점에서 보들레르의 산문시 「마드무아젤 비스투리Mademoiselle Bistouri」처럼 『파리의 우울』에서 발현되는 도시 모더니티의 동시성과 비동시성을 담지한다. 이질적인 캐릭터들은 도시 변두리와 공장 지대에 있을 법한 인물, 소설과 만화와 성경의 인물, 이방인과 귀신과 환상의 동물인데, 그들은 내 안의 타자이거나 자본과 법의 바깥으로 추방된 타자들이라는 공동성을 지닌다. 도시에서 노동으로 겨우 생존하거나 존재감을 상실한 익명의 군중들이라는 공통성을 지닌다.
오늘처럼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아버지가 배 안의 사내들 몰래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꿈속에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마을 밖으로 통하는 밤나무 숲 동굴로 빠져나온다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밟는 나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 나는 그를 따라 동굴 속으로 걸어들어갔었다 그의 검고 무거운 꼬리가 동굴 벽을 탁탁 치며 앞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압둘 키리한」 부분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압둘 키리한’. 압둘 키리한은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의 시적 주체, 소년의 성장 서사를 전개하는 주요 캐릭터이다. 나는 “압둘 키리한, 나는 악마의 자식”,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이 든 적” 없다. 상어잡이 선원, 아버지는 꼬리 달린 악마. 어머니는 “나를 낳은 이후에 줄곧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어머니가 잠든 “이곳에선 영원한 밤이 계속”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꿈속에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마을 밖으로 통하는 밤나무 숲 동굴로 빠져”나온다. 나는 몰래 아버지를 따라 “동굴 속으로 걸어들어”가지만 길을 잃는다. 나는 “잿빛의 길”을 헤맨 끝에 어머니의 잠 속 집에 도착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바다”로 가라고 권한다. 나는 “그녀 뒤로 반쯤 열린 방문 틈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을 본다. 벌거벗은 사내, 아버지는 어머니의 꿈속에서까지 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나의 유년을 간직한 어머니의 집과 꿈의 입구를 닫아버리는 가부장제의 악마임을 암시한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법 앞에서’ 항상 처벌을 받고 꿈속에서도 무의식적 자기 검열을 당한다.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법이다. 법은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가족 공동체의 안전과 운영을 위한 원리로 정초된다. 법의 정초와 집행이 아가멤논처럼 아버지 단독에 의해 수행될 때 법은 폭력이 된다. 가족 의견과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훈육의 명령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아버지의 법은 폭력이다. 아버지의 법은 자본주의에서 작동하는 자본의 법과 다르지 않다. 경제적 효율과 이윤의 증식만을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는 생산성 극대화를 위한 도구적 이성과 합리적 노동 투입을 현실의 법으로 삼는다. 법은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개인의 무한한 유희와 웃음을 금지한다.
아버지는 선원들에게 살해될 처지에 놓여 있다. 아버지는 선원들 세계의 법에 지배받는다. 아버지도 법 앞에서 벌거벗은 사내일 뿐이다. 법 앞에서 상어잡이 선원들, 아버지들은 복종한다. 그의 가족들 역시 법 앞에서 예외일 수 없다. 나는 “이곳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갈 것”인데, 작별인사로서 한 손엔 어머니의 “램프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아버지를 기다린다. 부친 살해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내가 부친을 살해하고 유년 시절과 어머니의 집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나를 기다리는 것은 도시의 열악한 노동과 가혹한 자본의 폭력이다. “도시의 지하엔 거대한 기계의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액체를 빨아들였다가 내뿜으며 열기를 만들어”(「바틀비」)낸다. 필경사 바틀비. “꿈속에서 그를 처음 만난” 사무원 그녀에게 부여된 것은 끝없이 분배하고 전달해야 할 서류더미이다. 그녀는 바틀비처럼 ‘나는 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는 소극적 저항의 말조차 하지 못한다. 도시의 “겨울이 시작되고 첫눈이 내리던 날 내 애인은 검은 늑대가 되어 공장 지대의 뒷골목으로 사라”(「검문」)진다. “군복을 입은 수많은 사내들이 종대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앞에 독수리 모자를 쓴 조교들이 허리에 손을 얹고 쌍욕을 퍼붓고…중략…나는 총을 사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집결」)을 흘리며 군대에 입대한다. 이것이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를 지배하는 정서이다. 도시의 법이다. 도시의 법 안에서 진정한 존재는 부재하다. “진정한 존재는 죽음만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초월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 (조르주 바타유, 「마담 에드와르다」, 『마담 에드와르다/나의 어머니/시체』, 유기환 옮김, 미행, 2025, 32쪽.)진다. 법의 바깥으로 초월할 수 없는 도시의 현실에서 우리는 예외 없이 노동하고 자본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A는 그녀의 더듬거리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의 꿈속에 존재하는 압둘 키리한이 그려내는 그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키리한적인, 혹은 지극히 반키리한적인 키리한의 그림들을, 그것은 그를 황홀하게 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는 천재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는 모든 걸 꿰뚫어보는 거대한 눈알을 그려냈어요. 그 시선. 허공의 털로 뒤덮여 있는 그 검은 구멍. 그게 중요한 거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게 중요해. 반키리한적인, 그러면서도 모든 게 키리한적인.」
그는 여기서 말을 멈추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J양의 눈이 천천히 고정되면서 검은 눈동자가 점점 더 크고 단단해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외눈박이 눈이 그녀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웅웅거렸고 A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중요하다」 부분
압둘 키리한. 그가 집을 떠나서 도착한 곳은 도시. 압둘 키리한은 도시에 실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타자의 꿈속에 존재하는 캐릭터로 출현한다. 압둘 키리한이 실재가 아니라 환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도시의 군중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에서 연원한다. 군중들은 노동하는 낮의 규율에 얽매인 일상을 반복한다. 그들은 서로 교감할 수 없다. 그들은 대규모 노동 현장과 출퇴근 대중 교통 속에서 무관심과 경계심을 내면의 감각으로 삼은 익명의 군중이다. 그들은 이웃과 함께 주거하고 있으나 이름과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존재하면서 무리지어 흘러 다닌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빈번한 관계와 정보의 범람 속에서 개인의 고립된 충격 체험(Erlebnis)은 매순간 발생하지만 축적되지 않는다. 타자와 교감을 통한 진정한 사랑의 경험(Erfahrung)은 드물고 부재하다. 쾌락과 오락, 음주와 도박 중독은 진정한 사랑 경험 부재의 증상이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한 자, 도시의 군중이다. 진정한 존재로서 진정한 사랑의 경험을 언제나 갈망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마치 ‘마드무아젤 비스투리(Mademoiselle Bistouri)’, 외과의사 수술 칼에 의해 매일 복부가 갈라지고 신체의 일부가 도려내어지는 고통을 겪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를 매순간 주고받는 도시 군중의 일상. 마음의 상처를 표현하지 못하고 절제해야 하는 냉철한 감각. 무표정한 감수성의 견지. 육체의 노동뿐만 아니라 감정의 자기 착취까지 감내해야 하는 도시 군중의 존재 양식이다. 감정의 자기 착취와 통제를 감내하지 못하고 분노의 공격성을 드러낼 때, 불특정 대상의 살인 사건과 기묘한 사건이 발생한다. 포의 소설집 『기이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Tales of the Grotesque and Arabesque』(1840)처럼. 저녁의 빛과 함께 “등불이 수면에 다시 나타나, 우아하고도 변덕스러운 아라베스크를 그리”(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 황현산 옮김, 문학동네, 2018, 102쪽.)는 퇴근 시간. 낮의 노동과 이성의 규율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심리적 자유와 도취가 도시의 밤을 가득 채운다. 군중은 밤의 은밀한 어둠과 불빛이 불러일으킨 환등상(phantasmagorie) 속에서 무한한 쾌락의 욕망과 억압된 공격성을 표출한다. 그것은 “키리한적인, 혹은 지극히 반키리한적인 키리한”, 낮의 노동과 이성의 법에 복종하는 키리한에서 법을 위반하고 밤의 욕망과 분노의 공격성을 표출하는 ‘반키리한적인 키리한’으로의 변신이다.
압둘 키리한 뿐만 아니라 이질적 캐릭터들은, 도시로 몰려든 익명의 군중들은 낮의 세계에 복종하고 밤의 세계로 풀려나와 해방감에 잠시 도취된다. 진정한 존재로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꿈이 강렬할수록 밤의 환상은 실재의 현실성을 초과한다. “나는 당신을 그토록 꿈꾸었기에 당신은 당신의 실재를 잃”는다. 꿈에 출현하는 환상의 실재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술꾼들」(『굴뚝의 기사』)처럼 내일 새벽에 깨어나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린다. 법은 꿈에서도 효력을 발휘한다. 법의 폭력이 강고할수록 밤의 어둠과 꿈속에 홀연 출현한 “검은 복면의 사내”(「닌자」), “잿빛 수염의 사내”(「검은 늑대강」), “검은 늑대들의 그림자”(「죽은 아이」), 미지의 타자에게 군중은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미지의 타자는 예기치 않은 분노의 폭력을 담지한 법의 환영이다. 미지의 타자는 다름 아닌 압둘 키리한과 이질적 캐릭터들, 도시의 군중 자신이다.
압둘 키리한의 성장 서사는 매우 고통스러운 사실성을 담지한 환상인데, 시 「그것이 중요하다」에서 그는 아마추어 화가 A의 꿈속 화가, 미지의 타자로 현현한다. 압둘 키리한은 꿈속에서 여성을 발가벗기고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거대한 외눈박이 그림의 화가로 출현한다. 두 개의 외눈박이 눈은 J의 얼굴에 박혀서 A의 눈을 바라본다. 압둘 키리한은 아버지, 법의 타자였는데, 그는 “억압된 무의식의 외화된 형체”(「가을밤」), 내가 구토한 “원숭이”(「가을밤」)처럼 캐릭터들의 무의식에서 억압하는 타자, 내 안의 타자로 발현한다. “억압된 무의식의 외화된 형체”는 “허공의 털로 뒤덮여 있는 그 검은 구멍”이다. 허공은 ‘비어 있음의 있음’으로 실재한다. 허공은 “어떤 낯선 영원의 형상”(「정어리」), “하수구 속 어딘가에서” 익명의 군중들, “진흙인간”이 맞이하게 될 죽음, ‘무(無)’의 형상이다. 허공은 보이지 않는 현실의 법이 환상까지 지배하는 실재로 있음을 암시한다. 허공의 구멍은 검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거대한 눈알이다. 보이지 않는 환상의 실재이다. 법의 실체이다.
눈을 뜨면 꿈이 시작된다
눈을 감으면 유령이 시작된다
파이프에서 검은 기름 새어나온다
하수구 속 어딘가에서 진흙인간이 운다
다리 아래로 금속 막대기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고
벽과 벽 사이 쓰레기 산을 이룬 곳
달빛이 날 닮은 시체를 비춘다
―「골렘」 전문
허공은 “눈을 뜨면 꿈이 시작”되고 “눈을 감으면 유령이 시작”되는 모더니티의 모든 삶에 편재(遍在)한다. 허공이 모더니티의 모든 삶에 편재하는 만큼 압둘 키리한과 다른 캐릭터들뿐만 아니라 두 번째 시집 『굴뚝의 기사』 모든 캐릭터는 법의 폭력으로부터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현실을 초과한 법의 폭력은 눈과 얼음, 겨울밤과 기차, 잿빛과 형광등의 백색 이미지로 장식되고 그 이미지의 서정과 환상은 법이 지배하는 현실의 과잉을 초과한 초현실을 만든다. 현실의 초과된 사실성이 환상적 서사의 사실성을 담보하고 산문시의 초현실을 창조한다.
환상의 실재
두 번째 시집 『굴뚝의 기사』는 꿈의 현실로 구축한 환상의 존재론이다. 시집 『굴뚝의 기사』는 여전한 법의 폭력 속에서 존재감을 상실한 익명의 군중들, 환상의 실재 서사이다. 꿈의 현실은 ‘고아원’이라는 세계 속에서 펼쳐진다. 고아원. 고아원은 부모와 세계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 양육되는 기관이다. 아이들은 부모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고 기관의 법이 명령하는 훈육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일찍부터 생존 경쟁을 내면화해야 한다. 아이들은 모든 법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전무하다.
어느 날 문이 열렸고, 그 애가 거기 서 있었어. 굴뚝의 기사. 안으로 들어선 그 애는 재빨리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 침침한 형광등 불빛이 아이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것은 잿빛 벽 위로 망토 자락처럼 어둡게 일렁였어. 그 애는 천장 가로대 위로 올라서더니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우리를 내려보았어. 우리는 그 애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어. 원장이 쾅쾅 벽을 두드렸고 경찰 제복을 입은 사내가 공장 굴뚝에 숨어 있던 놈을 잡아 왔노라고 원장에게 말하고 있었어. 우리는 계속 소리를 질렀어. 입 닥쳐, 원장이 소리쳤어. 더러운 고아 새끼들. 고아 새끼들! 고아 새끼들! 우리가 합창했어.
―「고아원」 부분
공장 굴뚝에 숨어 있다가 고아원에 잡혀온 아이. 이름 없이 별명 ‘굴뚝의 기사’로 불리는 아이. 아이가 숨어든 곳이 공장 ‘굴뚝’이라는 것은 공장 굴뚝 크기만큼 작은 몸집의 아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1788년 영국에서 굴뚝 청소에 대한 규제가 법으로 제정되기 전까지 ‘굴뚝 청소부’라는 직업은 4-6세의 작은 몸집의 아이가 맡았다. 정기적인 청소를 하지 않을 경우 석탄 연기가 빠져나가지 않아서 발생하는 질식사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굴뚝 청소는 필수적이었다. 당시 영국은 마을 교회 소속 교구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기술 훈련 직업을 소개하는 ‘교구 도제’가 있었다. 한국의 고등학교 산업연수생 제도처럼. 부모는 모두 생계를 위한 장시간 노동에 처해 있었기에 아이를 방치하거나 가난 때문에 고아원에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원 아이들은 굴뚝 청소부로 적합하였다. 굴뚝 청소부 아이들은 매우 좁고 그을린 굴뚝 속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 화상과 추락사 위험에 시달렸다. 아동의 노동 착취를 아이러니로 비판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굴뚝 청소부The Chimney Sweeper」(1789) (윌리엄 블레이크, 『천국과 지옥의 결혼』, 김종철 옮김, 민음사, 1974, 25쪽. 번역은 수정.)는 “빛나는 열쇠를 가진 천사가 다가와/관을 열어 아이들 모두를 자유롭게” 하고 좁은 굴뚝의 ‘관(棺)’에서 죽은 후에야 “아이들은 구름을 타고 올라, 바람을 타고 뛰어놀” 수 있다고 노래한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 굴뚝의 기사는 이미 자본의 법과 노동의 규율에 얽매인 노동자이다.
자본과 법의 폭력으로부터 아이가 숨어든 곳은 다름 아닌 ‘공장’ 굴뚝이다. 공장은 제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인데, 노동과 결합될 때 상품과 이윤을 창출한다. 공장 굴뚝은 인간의 노동과 시간, 심지어 생명까지 연소시켜서 상품과 함께 최종 결과물인 잿빛 연기를 내뿜는다. 공장 굴뚝은 모더니티의 견고한 모든 것을 수렴하고 모든 것을 연소시킨다. 공장 굴뚝은 “오직 검은 무의 추구만이 생의 심연을 꿰뚫는 참된 진리를 산출할 수 있다”(「화이트 홀딩바움」)는 압둘 키리한의 주장처럼 비어 있는 검은 구멍이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소설가」), 비어 있는 검은 총구의 무(無)이다. 공장 굴뚝은 모더니티의 모든 삶을 관통하고 결국 모든 존재를 “텅 빈 잿빛의 무”(「화이트 홀딩바움」)로 만드는 법의 폭력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날마다 새로운 아이가 우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어. 날마다 새로운 잿빛 침대가 펼쳐졌고 원장은 그것을 가리키며 누우라고 했어. 그러면 아이는 누웠고 곧 우리가 되었어. 우리가 전부 몇인지는 알 수 없었어. 우리의 얼굴은 똑같아 보였고 우리의 목소리도 똑같게 들렸어. 똑같은 잿빛 침대 위에 우리는 누워 있었어. 이층에도, 삼층에도, 벽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는 우리가 있었어. 하지만 그 애는 우리가 아니었어. 그 애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고아원」 부분
고아원에는 부모와 세계로부터 버려지고 방치되고 노동 착취를 당하는 아이들로 가득한데, 날마다 새로운 아이들이 도착한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얼굴도 목소리도 잿빛 침대도 모두 똑같아 보인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동일하고 개인의 수면 공간인 침대까지 죽음의 빛깔, 굴뚝의 잿빛으로 동일할 때 아이의 고유한 정체성은 확립되지 않고 무화(無化)된다. 아이들은 모두 존재하지만 분별할 수 없는 얼굴과 목소리의 익명성 탓에 환영처럼 존재한다. 아이들은 오직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정체성 없는 환상의 실재로서 존재한다. 원장이 주재하는 고아원은 아이들을 고유한 정체성 없는 환상의 실재로 훈육하고 관리한다. 경찰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도망친 아이를 붙잡아서 고아원에 데려온다. 경찰의 공권력과 기관의 고아원은 안정적인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법의 폭력이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모더니티의 억압적 국가 장치이다.
고아원에 도착한 새로운 아이는 기관의 법이 작동하는 ‘우리’, 법의 폭력을 내면화한 익명의 우리가 되지만 굴뚝의 기사는 우리가 되지 않는다. 굴뚝의 기사는 정체성 없는 환상의 실재, 익명의 동일성 그림자를 드리운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벽을 기어오른다. 그는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와 거리를 두고 벽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는 잿빛 침대에서 자야한다는 법을 위반하고 화재의 위험이 있는 굴뚝에서 잠을 청한다. “굴뚝의 기사는 이 세계의 균열을 가리키는 존재의 구멍”(「마감일」)이다. 그것은 “환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목소리에 가깝”(「마감일」)다. 굴뚝의 기사로 “솟아오르는 모든 것은 일종의 비명”(「마감일」)이다. “소리 없는 비명의 형식”을 지닌 “이 도시의 모든 굴뚝”이다. 그는 법의 바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타자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잠들어 있었어. 꿈속에서 그 애가 가로대를 붙잡고 천장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어. 어느 순간 불길이 타오르는 굴뚝 안에 그 애는 있었어. 그 애는 기어오르기 시작했어. 차가운 재가 잠든 우리들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내려앉았어. 아이의 숨죽인 웃음소리. 뜨겁지 않니? 꿈속에서 우리는 속삭였어. 불길 속에서 그 애의 검은 망토가 펄럭였어. 그 애가 타오르는 손을 펼쳐 우리에게 손짓했어. 굴뚝의 기사. 그 애는 굴뚝 내벽에 어른대는 작은 당나귀 그림자 위에 올라탔어. 당나귀의 갈기가 타오르고 있었어. 우리도 태워줘. 우리도 태워줘. 그 애의 불타는 어깨가 굴뚝 아래로 노래하듯 떨어져 내렸어. 멀어져가는 웃음소리. 그 애의 다리가, 타오르는 팔이 노래하는 새처럼 아래로 떨어졌어.
―「고아원」 부분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꿈속에서 굴뚝의 기사가 출현한다. 현실에서처럼 불길이 타오르는 굴뚝. 꿈속의 화재 현장에서 굴뚝의 기사는 굴뚝 안에 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아이는 꿈속 “작은 당나귀 그림자”에 올라탄다. 우리는 고아원으로부터 화재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꿈에서도 실패한다. “아이의 숨죽인 웃음소리”는 불타는 어깨와 다리와 팔이 떨어지면서 멀어진다.
참혹한 화재의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의 숨죽인 웃음소리”. 아이 웃음의 경련 속에는 빈사 상태의 현기증과 법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건강함이 깃들어 있다. 굴뚝 기사의 숨죽인 웃음소리는 법의 금지를 위반하고 법을 비웃는 향유의 욕구이다. 웃음 속에는 법의 긴장 상태를 무너뜨리고 삶의 이완 상태를 되찾는 생명의 활력이 깃들어 있다. 화재의 불길로 고아원을 불사르고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환상의 실재로만 존재하는 우리를 불사를지도 모를 웃음이다. 그러나 법은 무한한 웃음의 자유마저 금지한다. 법은 웃음의 주체를 법을 위반한 광인으로 취급한다. 꿈속에서도 죽음에 다다르게 한다. 굴뚝의 비어 있는 검은 구멍이 되게 한다.
다음 날 아침 차가운 복도를 맨발로 걸어가는 내가 있었어. 내 시린 발바닥이 있었어.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있었어. 침대들 위에는 흰 천에 덮여 있는 내가 있었어. 나는 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어. 경찰차와 구급차가 고아원 마당에 모여 있었어. 바람에 날리는 눈가루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어. 요나. 원장이 내게 그렇게 말했어. 여덟 살. 여자아이. 나는 처음으로 들어본 내 이름을 중얼거렸어. 굴뚝 그림자가 눈 위에 드리워 있었어. 굴뚝 꼭대기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내가 있었어. 나는 고개를 돌렸어. 원장의 손을 잡고서 나는 내 부모가 될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어.
―「고아원」 부분
고아원의 화재를 꿈꾼 다음 날 아침. 어쩌면 고아원의 화재가 꿈이 아니라 현실의 사건처럼 보이는 아침. 꿈과 현실의 경계가 지워지면서 전복되는 과거시제 후일담의 시 「고아원」의 시적 주체, 나는 고아원을 떠난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과 침대들 흰 천에 덮여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바로 자신임을 안다.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환상의 실재로서 환영처럼 살아온 고아원에서 양부모에게 입양될 때 나는 나의 이름을 원장에게 처음 듣는다. 그 이름은 요나. 여덟 살. 여자아이. 나는 최초로 유일한 이름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꿈의 화재에서 살아남은 굴뚝의 기사를 바라본다. 이제 굴뚝의 기사 역시 이름 없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안다. 이제 나는 요나.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없이 환영의 실재로 가득한 고아원의 이름 없는 세계와 결별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나는 요나라는 고유한 이름을 통해 고아원 바깥의 현실 세계로 진입한다.
오래전에 폐쇄된 고아원 건물이 여전히 검은 형체로 서 있었다. 우리는 헌책방 앞 벤치로 다가가 눈을 쓸어내고 그 위에 앉았다. 잠시 후 건너편에서 고아원 문이 열리더니 한 어린 소녀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고아원 마당에 쌓인 눈이 싸늘한 빛을 뿜었다.
소녀는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 얘기로는 저 아이도 요나라네. 그녀는 저 아이가 그녀 자신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 아무래도 그녀는 나만큼이나 미친 게 분명해」 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 그녀의 눈은 진짜지. 자네도 봤겠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을 말일세. 그리고 저 아이의 눈은 요나의 눈을 꼭 닮았군」
「내가 보기엔 그녀의 눈도, 그리고 저 아이의 눈도 자네의 그 박쥐의 눈을 닮았네」
―「소설가」 부분
고아원 문을 나서는 소녀의 이름은 모두 요나였다. 최초의 유일한 이름, 요나라는 이름의 소녀의 정체성은 부정된다. 원장이 말해준 이름, 요나를 유일한 이름이라고 믿는 모든 아이들 앞에서 소녀의 정체성은 무(無)가 된다. 요나라는 하나의 이름은 너무나 많은 소녀들의 정체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이름은 우연한 언어로 명명되고 의미가 부여된 것일 뿐 실재와 무관하다. 이름은 실재를 담보하지 못하고 언어로 약속한 호명일 뿐이다. 이름 속에 사물의 실재는 부재하다. 원장이 말해준 이름에 소녀의 실재는 부재하다. 실재는 이름 없이 있는 것이다. 실재와 무관한 이름으로 구축한 언어의 의미 체계는 환상의 실재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정체성과 의미는 거울에 비친 영상(影像)과 같다.
원장은 이름 없는 고아원 안과 이름 있는 고아원 바깥을 모두 환상의 실재, 무(無)로 만드는 법의 집행자이다. 실재와 무관한 모든 캐릭터는 “존재의 백지 위에 적히는 문장들, 그것도 끊임없이 수정되는 문장들에 불과”(「원고」)하다. 환상의 존재론은 요나라는 이름에서 전개된다. 요나는 복수(複數)의 요나이다. 요나는 고아원에서 이름이 없고 고아원 바깥에서 유일한 이름도 없다. 요나는 도시에 실재하지만 부재하는 익명의 군중, 환상의 실재이다. 시를 쓰는 요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요나의 눈. 도시는 사무원 요나가 꾸는 꿈. 박쥐의 검은 피만 마시고 글을 쓰는 소설가. 소설가는 요나가 쓴 시. 나는 소설가와 시인 서대경 씨의 담당 편집자. 서대경 씨의 시를 능가하는 요나의 시. 보이지 않는 요나의 얼굴. 서대경 씨의 꿈속에 있는 요나. 도시는 요나의 꿈이다. 도시의 모든 존재는, 군중은 얼굴도 목소리도 고유한 이름도 없이 우리의 “윤곽을 삼키는 검푸른 하늘”(「원고」), 요나의 꿈에 실재한다. 캐릭터의 연쇄적인 관계 속에서 꿈과 현실을 전복하는 환상의 시적 경이가 발현된다. 이질적인 캐릭터들은 아름다운 혼돈의 질서로 낭만화되는 아라베스크가 아니라 요나의 꿈처럼 “존재의 구멍”으로 소진된다. 그리하여 “삼백 년의 잿빛을 맨정신으로 견”(「압생트」)뎌야 하는 법의 폭력과 환상의 실재가 펼쳐지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서대경의 글쓰기이다.
그녀는 창으로 다가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전신주 불빛 아래로 눈가루가 은빛 실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잿빛의 장막이 서서히 자신의 의식 위로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 책상 위를 더듬어 백지를 펼치고 펜을 움켜쥐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쓸쓸히 미소지었다. 그녀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뜨려진다. 의자에 기댄 채, 그녀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떤 아득하고 눈부시게 타오르는 존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천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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