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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의 순수 언어를 찾아서― 내가 읽은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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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TIKA 2015. 9. 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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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의 순수 언어를 찾아서

― 내가 읽은 황현산

 

 송승환

  

 

앙드레 브르통은 랭보가 「나쁜 피」(󰡔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제기한 “다른 삶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초현실주의 선언(1924)」의 마지막 문단으로 답한다. “초현실주의는 어느 날 우리가 우리의 적들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게 해줄 <보이지 않는 광선>이다. <너는 이제 떨지 않는다, 해골이여.> 이 여름 장미는 파랗다. 숲은 유리다. 녹음의 옷을 입은 대지는 유령처럼 나에게 별로 깊은 인상을 심지 못한다. 산다는 것과 살기를 그친다는 것, 그것은 상상의 해결책이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끝맺는 앙드레 브르통의 선언은 현실의 삶을 부정하고 현실 너머의 다른 삶을 ‘지금―여기’의 내부에서 실현하겠다는 실천을 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도구적 언어와 관용적 언어, 그 언어를 기반으로 현실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과 정치, 현실의 금기를 승인하는 도덕과 미학을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비타협적 거부와 다른 삶의 추구를 뜻한다.

다른 삶의 실현을 위해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과 주체, 논리와 필연, 질서와 권태, 사실주의와 합리주의에 근거한 글쓰기 대신에 무의식과 타자, 우연과 속도, 유머와 상상력에 근거한 자동기술법의 글쓰기를 실천한다. 그들의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의 분출하는 욕망과 타자들의 우연하고 빠른 마주침을 통해 예기치 않은 낱말들의 충돌이 빚는 유머와 죽어있던 삶의 언어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고 그 언어를 통한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광선’이 된다. 앙드레 브르통은 현실의 억압과 권태를 비웃어주고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의도하지 않은 낱말들의 우연한 배치가 낳는 경이(驚異)를 체험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확신한다. 그는 “경이(le merveilleux)는 항상 아름답다, 어떤 경이라도 아름답다, 더 나아가서 아름다운 것은 경이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것은 이미 다른 독자들이 다른 번역본으로 숙지하고 있었을 「초현실주의 선언(1924)」의 요지일 터인데, 나는 뒤늦게 황현산의 비평판으로 완역된 󰡔초현실주의 선언󰡕(2012)을 통해 그 요지의 명료한 이해를 얻은 바 있다.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선언(1924)」의 이해를 심화시켜준 낱말, ‘le merveilleux’의 번역어 ‘경이’는, 근래의 한국어 문어체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낯선 낱말이었는데, 그 낱말을 선별하고 개념화한 황현산의 번역은 한국어의 현실 이면의 언어를 현실 속으로 되살리고 ‘경이’ 자체를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이다. 프랑스어 남성 명사 ‘le merveilleux’는,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놀라움, 특별한 질료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경탄, 예외적인 특성과 탁월함이 일으키는 놀라움 등의 뜻을 지니는데, 그 의미의 맥락 속에서만 번역했을 때 ‘le merveilleux’는 초자연적인 놀라움과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건을 함의하는 뜻의 범주에 머무른다. 그러나 ‘경이’라는 낱말은 놀랍고 신기하다, 라는 한국어 형용사로 품지 못하는 신비의 뜻과 그림자를 거느리는 한편, 한국어 ‘초현실주의’에서 발원하는 현실 도피적인 성격을 비껴서면서 현실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할 수 없을 사건의 목격과 체험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자동기술법의 글쓰기가 낳는 언어의 효과를 지시하고 유추할 수 있는 낱말이 된다.

그런데 ‘le merveilleux’가 말라르메의 「운문의 위기(Crise de vers)(1897)」에서 유사한 의미의 여성 명사 ‘la merveille’로 나타날 때, 황현산은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기적’으로 옮긴다.

 

자연 사물을 언어의 작용에 따라 거의 즉각적인 공기진동에 의한 소멸로 옮겨놓는 이 기적(la merveille)이 무슨 소용일까? 다만 순수개념이, 어떤 비근하거나 구체적인 환기의 제약을 받지 않고, 거기서 발산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내가 “꽃!”이라고 말하면, 내 목소리에 따라 여하간 윤곽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망각의 밖에서, 모든 꽃다발에 부재하는 꽃송이가, 알려진 꽃송이들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음악적으로, 관념 그 자체가 되어 그윽하게, 솟아오른다.

— 말라르메의 「운문의 위기」 부분

 

황현산의 완역과 그 해설 「말라르메의 언어와 시」는 한국 독자들에게 쉽지 않은 말라르메 󰡔시집󰡕에 대한 온전한 독해의 나침반을 마련해주었다. 더 나아가 황현산의 완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된 「운문의 위기」는 말라르메 시학의 근간을 가늠하고 추론할 수 있는 주요 누빔점인데, 위 인용은 「르네 길의 󰡔언어론󰡕 서문」(1886)의 한 문단과 동일한 것으로서 말라르메 스스로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여 「운문의 위기」에 재삽입한 문단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기적’이라고 옮긴 ‘la merveille’는 말라르메의 시학이 응축되어 있다. ‘경이(驚異)’가 현실 너머에서 현실로 현현하는 놀라움의 체험을 좀더 함의한다면 ‘기적(奇蹟)’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가능한 현실로 전환시키는 화자의 집중과 놀라움을 좀더 함의한다. ‘la merveille’가 우연한 언어의 완전한 배제와 화자의 소멸을 통해 필연적이고 기하학적인 건축술로 구축한 낱말들로 절대미를 완성하려는 말라르메의 시론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황현산의 번역은, 사전에 등재된 낱말의 단순한 옮김이 아니라 프랑스어와 한국어의 이면에 있는 순수 언어, 말라르메가 추구하는 우주의 보편 언어에 도달하려는 ‘기적’을 품고 있다. 가령, 그가 ‘sensation'을 랭보의 시에서 「감각(感覺)」으로 번역하지만 「에로디아드」 작업에 착수한 말라르메가 친구 앙리 까잘리스에게 보낸 편지(1864년 10월 30일)에서는 이성적인 감각을 뜻하는 ‘지각(知覺)’으로 번역할 때, 아폴리네르의 시 「약혼 시절 Les fiançailles 중의 “나는 일요일의 휴식을 살피며”로 시작하는 시편에서 “Que m'imposent mes sens”를 “imposer”의 어원과 “sens”의 문맥상 뜻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매우 능숙하게 “내 감관(感官)이 내게 떠맡기는”으로 번역할 때, 그 낱말들은 경이와 기적을 한꺼번에 불러일으킨다.

황현산의 번역이 낱말과 문장 자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행간의 숨은 의미와 문맥, 더 나아가 사물의 이치를 명확히 드러내는 순수 언어를 포착할 때, 관용적 의미로 고착되어 죽어있던 언어는 되살아나고 전망 없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비추는 ‘초현실주의 선언’이 되고 그 선언문을 가슴에 새기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 그의 번역은 현실 이면의 순수 언어를 한국어로 정립하기까지 감내해야 하는 비판적 지성의 집중과 인내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시를 읽어내는 섬세한 감식안의 토대가 되고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임을 천명할 수 있는 전제가 됨과 동시에 다른 삶의 도래를 담고 있는 타자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명명해주는 비평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리하여 내가 읽은 황현산의 ‘번역/비평’의 미학은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지평에 도달한다.

 

 ― 『현대시학』 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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