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체사레 파베세 시편들

프로젝트/외국시

by POETIKA 2014. 7. 2. 23:13

본문

선조들

 

*김운찬 옮김, 청담사. 1992.

 

세상의 놀란 나에게,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혼자 울던 시절이 왔다.
대답할 줄도 모르면서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다는 건 별로 즐겁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지난 일.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대답할 수 없으면 대답하지 않을 줄도 안다.
나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나는 동료들을 발견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언제나 나는
자신 있고 확고한 남자들 사이에서 살았다는 것을.
또한 아무도 대답할 줄 몰라도 모두가 평온하다는 것을.
매형 두 사람이 함께 가게를 열었다. - 우리 가족의
첫번째 행운이었지. - 타지방에서 온 매형은 진지하고,
계산적이고, 냉담하고, 소심한, 여자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 고장 출신의 다른 매형은 가게에서 소설만 읽었고
- 우리 마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 들어오는 손님들은
설탕도 없다고, 유황도 없다고, 짤막한 대답을 듣곤 했다.
모두 떨어졌노라고, 그런데도 나중에는 그가
오히려 실패한 다른 매형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혼자 거울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입가에 근엄한 미소를 지어볼 때보다 더 강해짐을 느낀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한 분이 살았는데
소작농에게 배신을 당하자
자신이 직접 포도밭을 일구었고 - 한여름에-
멋지게 일을 해내셨다. 그렇게
나는 살아왔고, 언제나 나는 자신 있는 얼굴과
든든한 주먹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집안에서 여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있어서 여자들이란 집 안에 머무르며
우리를 낳아 세상에 내보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전혀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우리의 핏속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넣어주지만
자신은 스스로의 작품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우리는, 홀로 살아나간다.
우리는 - 남자들, 아버지들 - 악습과 변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지만,
그 유일한 치욕만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바로 우리는 절대 여자가 아니라는 것, 누구의 그림자도 아니라는 것.

나는 동료들을 발견함으로써 땅을 발견했다,
사악한 땅을, 그곳에선 미래를 생각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다.
나와 우리들에겐 노동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할 수도 있지만, 우리 선조들의
가장 큰 꿈은 한량들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자도 없이, 등뒤로 뒷짐을 진 채,
저 언덕들을 어슬렁거리기 위해 태어났다.



풍경 I (Pollo에게)

 

이곳 언덕 위는 더 이상 경작되지 않는다. 쇠뜨기풀과
헐벗은 바위와 황량함뿐.
이곳에선 노동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언덕 꼭대기는 메말랐고
유일한 신선함은 호흡뿐이다. 여기에 오르는 것은
힘겨운 일. 언젠가 은둔자가 올라와
기력을 되찾기 위해 줄곧 머물러 있다.
은둔자는 염소 가죽을 둘러 입고,
땅과 관목숲, 둥굴에 밴 냄새,
파이프 담배와 짐승들의 끈적거리는 냄새를 풍긴다.
햇살 속에서 홀로 파이프 담배를 피울 때면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을린 쇠뜨기풀과
똑같은 색깔이기 때문이다. 방문객들이 올라와 
땀에 젖어 숨을 헐떡이면서 바위 위에 쭈그려 앉으면, 
두 눈을 하늘로 향한 채, 길게 누워 깊이 숨을 쉬는
은둔자를 발견한다. 그는 한 가지 일을 했다.
검게 탄 얼굴 위에 빨간 털이 뒤섞인 무성한 수염을
자라게 했다. 그리고 텅 빈 공터에
똥을 누어, 햇볕에 마르게 했다.

이 언덕의 계곡과 기슭은 푸르고 깊다.
포도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격렬한 옷을 입은
처녀들이 떼지어 올라와
방탕한 축제를 벌이고 저 아래 벌판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때로는 과일 바구니들의 행렬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언덕 꼭대기까지 오르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등에 바구니를
짊어지고 구부정히 집으로 돌아가며, 나뭇잎 사이로 잠긴다.
그들은 너무나 할 일이 많아 은둔자를 보러 오지 않으며,
그저 들판을 오르내리면서 힘겹게 괭이질을 한다.
목이 마르면, 포도주를 들이켠다. 병째 입에 대고
황량한 언덕 꼭대기를 향해 눈을 치켜뜨면서,
서늘한 아침이면 이미 그들은 새벽 노동에서
기진하여 돌아오고, 어느 거지 하나 지나가면,
들판 한가운데 웅덩이들에서 솟아나는 물은 온통
그의 차지이다. 그들은 처녀들을 향해 냉소를 흘리며
언제 염소 가죽을 둘러 입고 언덕 위에서
몸을 그을릴 거냐고 묻는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