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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린 자의 기원과 고백의 형식― 김상혁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비평

by POETIKA 2013. 8. 1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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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린 자의 기원과 고백의 형식

― 김상혁 시집

 

송승환

 

최근의 한국시는 젊은 시인들에게 이중의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젊은 시인들은 2000년대 미학적 전위의 언어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체험하면서 미학적 전위의 미적 성취와 정치적 전위의 도구적 언어를 동시에 갱신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 과제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꾸준히 제기된 바 있지만 2000년대 후반의 ‘시와 정치’ 논의를 거치면서 더욱 섬세하고 치밀한 언어의 미학과 정치의 균형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문제적이고 주목할 만한 시적 성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서 2009년 등단한 김상혁의 첫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민음사, 2013)는 2000년대 미학적 전위의 언어 실험의 기반 위에서 시적 주체의 기원을 천착하는 특이성을 지닌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체의 물음을 동반한 주체의 귀환과 고백의 형식을 모색한 젊은 시인의 첫 육성이다. 시인은 감동과 인식의 확장과 새로운 미학적 세계를 제시하는 대신 시적 주체의 기원과 실존의 비애를 드러낸다. 시적 주체는 망각과 위안의 언어로 주체의 기원을 숨기거나 거짓 화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다. 그 시적 주체의 탄생 비밀과 고백의 형식은 시집의 자서(自序)에 암시되어 있다. “아버지의 집에 내 문패를 달았다./나와서 보라,/집보다 아름다운 이 문패를.”에 담긴 가족사와 아이러니의 언술 방식은 김상혁의 시가 성립하는 형식이다.

시적 주체로서 ‘나’는 스스로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고백의 언술 방식을 취하는데, 그것은 대상화한 ‘나’와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는 간극을 빚어내면서 비애와 아이러니를 낳는다. 비애와 아이러니는 ‘나’의 출생의 비밀과 가족사에서 기원한다. “아버지가 만삭 어머니 배를 차고 떠”(「정체」)난 후에 ‘나’는 태어났고 “여자들만 남은 가정”(「학생의 꽃」)에서 여자가 되고 싶었으나 그런 말은 “엎드려서 침대에게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금방 비밀로 삼”(「묵인」)고 “다락방에는 가족들이 꺼리는 사진과 내가 있”(「이사」)다. ‘나’는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태어난 일이 쑥스”(「홍조」)러운 존재다.

나는 가족에게 부끄럽고 세계로부터 숨겨져야 할 존재로서 ‘나’에 대한 긍지와 세계에 대한 신뢰가 없다. ‘나’는 내밀한 ‘나’와 완전한 일치를 꿈꿀 수 없어서 비애와 아이러니를 겪는다. ‘나’를 비롯한 가족과 세계는 불신과 무의식적 억압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삶의 진실과 진정으로 화해하기 위해 ‘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응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응시의 심연에는 다른 삶과 다른 세계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내면의 무의식적 억압과 욕망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굴절되고 간섭받는다. “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 원치 않는 시점부터 나는 순차적으로 홀홀히 눌어붙어 있네요”(「정체」)는 훔쳐보는 주체의 시선과 심연의 고백이 드러나는 진술이다. 그것은 ‘엎드린 사람’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엎드린 자세는 죽음을 선고받거나 굴종하는 자세이면서 신적인 존재에 대한 경배와 구원의 자세다. “죽어 가는 머리에 대하여 묵상”(「엎드린다」)하는 자세이면서 “침대 위 엉덩이를 불쑥 들어 올린”(「엎드린 사람)」 후배위의 자세다. “엎드리는 건 오직 은밀한 조립을 위한 자세”(「조립의 방)로서 무의식적 억압과 욕망, 죽음과 삶, 성(聖)과 성(性)이 교차하는 자세다. 죽은 자의 누운 자세가 아니고 산 자의 일어선 자세가 아닌 엎드린 자세는, 고통 속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어머니의 몸속 산도(産道)와 “모두가 붉은 손으로 뛰어나오는 골목”(「묵인」)의 세계처럼 좁고 긴 굴곡의 자세로서, 태어나는 모든 존재의 비명과 실존의 비애를 품고 있다. 그리하여 “이 집에서 슬픔은 안된다”(「사육제로 향하는 밤」)는 금지는 금지할 수 없는 것을 금지하려는 욕망의 선언이다. 그 선언은 성취될 수 없다. 그 선언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슬픔을 피할 수 없다는 보편적 명제로 전환된다. 시인이 자신의 기원을 응시하고 현재 살아있다는 실존의 감각을 아프게 느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보편적 명제를 위반하려 할 때, 시의 윤리는 탄생한다. 김상혁의 시는 엎드린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는 불가능성의 출발점에 있다.

 

<창작과비평>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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