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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발견과 ‘큰 주체’의 물음― 김행숙 시집 <타인의 의미>

비평

by POETIKA 2012. 9. 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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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발견과 ‘큰 주체’의 물음
― 김행숙 시집 <타인의 의미>


송승환


김행숙의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는 미시 세계의 ‘사이’를 발견한다. 인간의 시선으로 구현되는 원근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거리를 미분하고 적분하는 미시 감각을 통해 미시 세계를 발명한다.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포옹」) 다가간 세계. 한없이 가까워짐으로써 너와 내가 거의 검정에 가까운 세계. 서로 껴안은 연인의 촉각과 호흡이 살아있는 세계. 껴안으면서 동시에 갈라지는 절벽의 세계.
“신체는 깎아지른 듯 절벽이 되었어/기도하기 좋은 곳/자살하기에 더 좋은 곳에서/나의 신체는 멈”춘다(「그곳에 있다」). 내가 너를 껴안는 곳은 다름 아닌 내 신체다. 내 신체의 피부를 통해 너는 느껴진다. 너는 내 피부의 감각 속에 살아있는 타자다. 내 피부 속으로 세계는 틈입하고 교차한다. 내 피부는 내 신체의 최전선이고 세계의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다. “세찬 물살처럼 거침이 없는 행인들을/전폭적으로 맞이하”(「투명인간」)는 장소다. 너무나 가까운 그곳이기에 시각은 흐릿해지고 촉각과 청각과 후각은 매우 또렷해진다. 윤곽과 “마지막 특징이 사라지는 순간”(「진흙인간」) 너는 ‘투명인간’이 되어 내 귀와 코와 피부 속에 나타난다. 피부 속에서 “당신의 몸은 없고 당신의 목소리만 있”다(「밤입니다」). 나는 너를 무정형의 물질로 만지고 맡고 듣는다. 너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타자들은 내 피부 속에 살아있다. 보이지 않지만 내 피부 속에 나와 너, 당신과 우리 그리고 세계가 함께 있다.
호흡은 보이지 않는 그 타자들이 코의 구멍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가 밀려나가는 운동 형식을 보여준다. 호흡은 내가 타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를 느끼게 하고 다시 타자들을 밀어낸다. 그 최대치에서 나는 “항상 끄떡없는 바위섬”이고 그들은 “맨 앞에서 희게, 희게 부서지는 파도”(「호흡 2」)다. 들숨에서 날숨으로 바뀌는 사이 나는 타자와 분리된다. 내 신체는 들숨과 날숨 사이 “깎아지른 듯 절벽이 되”어 타자를 밀어 떨어뜨린다. “가장 먼 곳에서 뛰어와서/포옹을 하는 연인들”(「공진화하는 연인들」)이지만 내 얼굴의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타인의 의미) 호흡은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여백이 곧 시의 전문인 「이 사람을 보라 ―호흡 3」처럼 코의 구멍은 모든 타자들이 틈입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모든 타자들을 기어이 밀어내고 ‘텅 빔’으로 만듦으로써 ‘나’라는 주체를 끝까지 존립시킨다. 김행숙 시의 ‘사이’는 그 여백의 풍경이다. 보이지 않을 만큼 가깝고 내 피부 속에서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나와 타자들의 공동체는 그 ‘사이’에 세워진다. 그러나 ‘사이’는 결국 “은빛 칼처럼 빛이 쑥 올라오는 틈새”(「어두운 부분」)로 갈라지는 나와 타자들의 정체성을 각각 만들어낸다. 틈새는 죽음의 심연이며 가능한 사랑의 완전한 불가능성이다.
사이의 발견 속에서 김행숙의 시는 묻는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포옹」)인가. 사이와 틈새와 여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가까워지면서 흐릿해지고 사라지는 나와 네가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음은 시집의 도처에서 제기되고 변주되면서 우리 모두에게 분배된다. 물음은 물음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구성원에게 의미가 있다. 물음은 나 자신의 몫으로 온전히 제기될 때 가장 큰 시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워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너의 손을 잡았을까”(「그곳에 있다」).
그 물음 뒤에 ‘우리’를 호명하는 김행숙 시의 주체는 누구일까. 그 주체는 극도의 미시적 풍경과 비가시적 세계를 발견하고 초정밀 감각의 풍경을 직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인간의 감각을 초극한 ‘큰 주체’이다. <사춘기>에서 ‘우리’라고 호명하고 동일성으로부터 끝없이 달아나면서 분열하던 주체가 <이별의 능력>에서 무한한 분열과 변신이 가능한 주체로 거듭 태어나 “고양이를 초월하여 고양이”(「고양이군의 25시」)가 된 큰 주체.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해변의 얼굴」)이 되거나 “나의 쌍둥이 동생”(「소수점 이하의 사람들」)을 0.5로 분열시킬 수 있는 감각의 큰 주체. 지금까지 이룩한 김행숙 시의 고유한 미적 성취와 시적 발명은 인간의 감각을 초극한 그 ‘큰 주체’의 무한한 감각에서 기원한다. ‘큰 주체’는 무한한 분열과 변신을 통해 과잉 주체들의 감각과 과소 주체들의 감각이 빚어내는 ‘우리’ 공동체의 미시 감각을 발명하면서도 결코 ‘큰 주체’의 동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김행숙 시는 동일성을 훼손하지 않는 큰 주체의 분열과 변신을 통한 그 무한한 감각으로 미시 세계를 계속 발명할 것인가. 육체의 감각과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광물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말라르메의 ‘에로디아드’(Hérodiade)와 극단의 인공미와 탐미를 추구하는 조리스-까를 위스망스의 ‘데 제쌩뜨’(des Esseintes) 같은 시적 주체로 거듭 태어나 데까당스 문학을 출현시킬 것인가.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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