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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증상과 바깥

비평

by POETIKA 2014. 10. 1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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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증상과 바깥
― 서대경과 안희연과 황유원의 시

 


1. 공동체의 경험

 

  우리는 다섯 친구들이다. 우리는 언젠가 어떤 집에서 차례로 나오게 되었는데, 우선 하나가 나와 대문 옆에 섰고, 그 다음에는 두 번째가 와서, 아니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수은 방울이 미끄러지듯 가뿐하게 대문을 미끄러져 첫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섰고, 그 다음은 셋째, 그 다음은 넷째, 그 다음은 다섯째가 나왔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줄로 서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게 되어 우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다섯 사람이 방금 이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만약 여섯째가 자꾸 끼여들지만 않았다면 평화스러운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가 귀찮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히 무슨 짓인가를 한 셈이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는 곳에, 그는 왜 끼여들려고 하는 걸까? 우리들은 그를 모르며 우리들 안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우리 다섯 사람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섯 사람에게는 가능하고 참아질 있는 것이 저 여섯 번째에게는 가능하지 않으며 참아지지도 않는다. 그 외에도 우리는 다섯이며 여섯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지속되는 공동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들 다섯 명에게도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함께 살고 있으며,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새로운 합류를 우리들은 원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들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여섯 번째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긴 설명은 이미 그를 우리 그룹에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터이니 우리는 차라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가 제아무리 입술을 비쭉 내민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를 팔꿈치로 밀쳐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아무리 밀쳐내도 그는 다시 온다.
― 프란츠 카프카, 「공동체」 전문(『변신』, 이주동 옮김, 솔, 1997)

 

프란츠 카프카의 「공동체」는 2014년 한국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지금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다. 한 집에서 차례로 나온 다섯 친구는 사람들이 주목하자마자 ‘한 집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서로를 공동체로 인식하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섯 친구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전까지 공동체 자체를 인식하지 않았으며 각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인식이 부재했음을 암시한다. 다섯 친구의 공동체는 한 집에서 나왔다는 공통점과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대타 의식의 반향으로 급속히 결성된 것이어서 그 공동체의 원리와 정체성은 비어있고 결속력과 지향점은 희박하다. 다섯 친구는 본래 완전하지 못한 결핍된 인간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지만 타자에 대한 자의식을 통해 그 무엇으로 확정할 수 없는 결여된 공동체가 된 것이다. 그 공동체는 일정한 원리와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성되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평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공동체는 내부의 갈등을 초래하면서까지 획득해야 할 권력도 물질적 이득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가 출현하자마자 공동체의 성격은 달라진다. 여섯 번째라는 타자의 출현은 공동체의 내부를 결속시키고 타자와 다른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타자의 출현은 공동체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타자의 차이를 규정지음으로써 타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공동체의 원리로 삼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섯 번째가 다섯 친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다섯 친구는 전에도 “서로 잘 몰랐으며” “지금도 서로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다섯 친구는 여섯 번째를 받아들이지 않고 추방한다. 다섯 친구는 공동체의 공동 생활이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도 여섯 번째를 수용함으로써 발생할 불편함을 선험적 판단으로 가정하고 여섯 번째를 배제한다. 다섯 친구들 사이의 불편한 공동체를 유지한다. 다섯 친구가 하나의 새로운 합류를 거부하는 이유는 다섯 친구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다섯 친구는 말한다. 그 경험을 여섯 번째에게 설명할 수 없다고. 그 경험을 설명하는 순간 여섯 번째를 받아들인 결과가 된다는 이유로 여섯 번째에게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
여섯 번째는 그 경험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다. 그 경험의 바깥을 수용하지 않고 그 경험의 불투명한 경계를 굳건히 지키려는 이 결여된 공동체는 무엇인가. 다섯 친구가 공통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내밀한 정서, 비슷한 취향과 기질, 동일한 역사와 문화를 살아냈다는 경험은 존중해야 할 것이지만 그 경험의 유지를 위해 여섯 번째에게 설명조차 하지 않고 배제하는 공동체는 차별과 폭력의 주체이며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다. 그 공동체는 서로에게 말할 수 없고 설명조차 할 수 없는 경험과 그것의 불확실한 의미를 지키기 위해 타자에게 비윤리의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된다. 평범한 다섯 친구가 폭력의 주체가 되어 인간이 아닌 악의 무리가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공동체의 폭력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오는 타자는 여섯 번째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을 것이기에 공동체의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국가, 민족, 계급, 인종, 성별, 학교, 나이, 지역, 직업, 취향 등의 공동체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차별과 배제, 감금과 추방, 살인과 전쟁 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침공은 그 실례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겪은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은 한국이라는 국가, 그 공동체의 환상을 무참히 부숴버리고 자본과 권력이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실질적인 주체이며 다수의 국민은 여섯 번째의 타자임을 명백히 드러냈다.
타자에 대한 공동체의 일상적인 폭력을 멈추게 할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여섯 번째가 다섯 친구의 공동체에 기여한 의미를 되묻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출현 전까지 공동체의 원리와 정체성, 공동체의 결속력과 지향점이 부재했던 다섯 친구가 여섯 번째의 출현으로 공동체를 결성하고 결여된 정체성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여섯 번째는 이미 그 공동체의 일원이다. 여섯 번째가 아니었다면 다섯 친구의 공동체는 서로 잘 몰랐으며 지금도 서로 잘 모르면서 공동 생활의 경험과 그 의미도 되새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공동체의 내부가 아니라 다섯 친구와 여섯 번째의 바깥에서 바라보고 서로를 대면하는 것이다. 다섯 친구와 여섯 번째는 신(神)과 같은 완전한 존재 앞에서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반성을 수행함으로써 성찰적 타자로 거듭나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처럼 공동체의 바깥에 부재하는 미지의 현존을 거울로 삼아 타자의 얼굴을 평등하고 겸허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그 얼굴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공동체에 비어있는 타자의 윤리가 출현할 것이다. 셋째, 공동체의 주체로 자리매김된 다섯 친구가 성찰적 타자로 거듭나도록 우리는 아무리 밀쳐내도 다시 오는 여섯 번째가 되어야 한다. 여섯 번째라는 타자는 일상적 폭력을 행사하는 공동체에게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불가능한 유토피아, 그 공동체의 존립 근거를 다시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타자가 공동체의 폭력에 의해 끊임없이 상처입고 훼손당하고 실패하더라도 공동체의 내부로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때 공동체의 의미는 매번 재정립될 수 있다. 공동체의 바깥에서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공동체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 또한 타자의 윤리일 것이다. 이번 계절에 주목한 서대경과 안희연과 황유원의 시는 각자의 방식으로 공동체의 증상을 그려내고 다른 곳과 다른 시간을 희구함으로써 공동체의 바깥과 타자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곧 시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2. 증상

 

  나는 결국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 이 길은 무엇인가,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본다, 아무도 없다, 오직 싸늘한 푸른빛에 잠긴 텅 빈 길만이, 저 너머로 끝없이 뻗어가는 소름끼치는 푸름만이 내 앞에 있다, 무엇이 나를 이 길 위로 옮겨다놓는지 알 수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아이였을 때부터,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열세명의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년에 한두번, 그러다가 한달에 한두번, 언제부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 지금은 하루의 대부분, 아니 일년의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이제 서서히 머리가 벗겨주는 나이가 되었다, 집에서 아내가 집어주는 사과 조각을 씹으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또는 직장에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누군가와 명함을 교환하고 악수하다가…돌연 섬광이 터지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의식을 잃고, 다시 깨어나 눈을 뜨면, 내 앞엔 소용돌이치는 푸른 길이, 소름끼치는 낯익은 길이, 푸른빛의 무지가, 무한한 공허가 놓여 있다, 아니 내게 직장이 있었던가? 아내가 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자식도 있을지 모른다, 알 게 뭔가, 더 이상 이 길 이전의 삶과, 이 길 위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이른바,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치매를 앓고 있는지 모른다, 평생의 과업처럼, 필생의 사업처럼, 그러나 지금 나의 말쑥한 옷차림과 내가 들고 있는 검은 가죽가방을 보건대, 이 길 이전의 나의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마도 푸른 공기에 짓눌린 이 텅 빈 길을 한참 걸어올라가 버스정류장에서 보란 듯이 버스를 탈 것이고, 지하철을 갈아탈 것이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예전의 삶이란 무엇인가, 돌아간 내게 그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어온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한다,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나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서서히, 아니 규칙적인 속도로, 아니 치매 환자처럼, 아니 정신분석가처럼, 아니 병든 개처럼, 그런데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 확실한가? 나는 어디로 돌아갔던가, 집으로? 학교로? 학교라니? 가방 속에 든 물건들을 보건대 나는 교수인지도 모른다, 몇권의 책, 비트겐슈타인, 프레게, 프레게? 그러나 또 내 가방 안엔, 휘발유가 담긴 작은 통, 담뱃값, 먹다 남은 빵 봉지, 죽은 쥐, 스패너, 깨진 사기그릇, 더러운 헝겊 따위가 들어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앞을 본다, 아무도 없다, 푸른 공기에 짓눌린 텅 빈 길만이 무한히 지속한다, 아니 단속적으로, 아니 동시적으로, 아니 악령처럼, 아니 신성처럼, 아니 심연처럼, 아니 구두처럼, 아니 악어처럼,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나는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어디로? 나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의식은 지워져가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더듬고 있고, 동시에 필사적으로 망각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나는 것은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것, 지금처럼, 누군가, 그런 것 같다, 나는 가방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무언가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문든, 아니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아니 필연적으로, 아니 환영처럼, 아니 악몽처럼, 정류장, 마을버스, 이것은 무엇인가? 섬광이 터진다, 기억의 섬광, 그런 것 같다, 도로 위의 태양, 빗방울, 허공에서 들려오는 삶의 웃음소리…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비가 내리는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누군가, 섬광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예전에도 이 섬광을 여러번 보았지, 그런 것 같다, 또다시 섬광이 터지고, 푸른 길이 창백해지고, 나는 본다, 가로수, 여름, 행인들, 차들의 경적소리, 섬광 속에서 나를 흘깃 돌아보며 버스에 오르는 한 사내를 본다, 망각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런 것 같다, 나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아니 손을 치켜드는 시늉을 한다, 나는 연기한다, 나의 고통, 나의 삶, 나는 정류장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아니 앉는 시늉을 한다, 정류장 차양 끝에 망각의 물방울이 맺혀 있다, 물방울을 본다, 보는 시늉을 한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물방울이 고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가, 끄덕이는 척한다, 누군가 낄낄거리며 나의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런 것 같다, 나는 본다, 보는 시늉을 한다, 물방울 속에서, 망각의 섬광 속에서, 검은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걸어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 서대경, 「나의 무지는 푸르다」 전문(『창작과비평』 2014년 여름호)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하고 첫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2012)를 출간한 바 있는 서대경 「나의 무지는 푸르다」의 시적 주체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몽환적인 진술로 주체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는 결국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시는 시작한다. 그 길은 “오직 싸늘한 푸른빛에 잠긴 텅 빈 길만이, 저 너머로 끝없이 뻗어가는 소름끼치는 푸름만이” 있는 길이다. 그 길의 ‘푸른 빛’이 어떤 유토피아의 아우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금세 읽힌다. 나는 아내가 있고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성이지만 그 안정된 삶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결국 ‘푸른빛에 잠긴 텅 빈 길’ 앞에 선다는 점에서 그 길은 시작이자 끝이다. 내가 항상 그 푸른빛의 텅 빈 길에 서는 이유는 “내가 아이였을 때” 상처받은 외상(trauma)의 기억 때문이다. 그 외상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열세 명의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년에 한두번, 그러다가 한달에 한두번, 언제부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이 길 위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매질은 실제 친부의 폭력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매질과 등가적인 열세 명의 아버지의 매질이라는 상징적 기표를 통해 그 매질은 가부장적 사회의 폭력과 아이가 속한 사회 구조의 모든 폭력으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매질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와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주체의 폭력이며 모든 타자들이 공동체와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내면화되는 폭력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외상의 억압은 실패로 나타난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외상의 억압을 성공함으로써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가진 공동체와 사회의 일원이 된 듯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억압은 실패로 나타난다. 그 폭력은 내가 중년의 남성이 되었음에도 치유되지 않은 외상으로 남아서 “지금은 하루의 대부분, 아니 일년의 대부분” 저 너머로 끝없이 뻗어가는 ‘소름끼치는 푸름’만이 있는 길 앞에 서 있게 한다. 나는 억압의 실패로 인해 분열증적 주체가 되어 섬광의 기억 속에 나타나는 과거와 현재의 나를 타자의 시선으로 본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폭력이 소름끼치는 푸른빛의 환상적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이 길 이전의 삶과, 이 길 위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손을 치켜드는 ‘시늉’을 하고 보는 ‘시늉’을 하고 끄덕이는 ‘척’을 하고 연기한다. 나는 주체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삶을 연기하는 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무엇이 나를 이 길 위로 옮겨다놓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푸른빛은 죽음으로 이끄는 폭력의 빛이며 역설적으로 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죽음의 빛일 터인데, 그 푸른빛의 기원에 대해 내가 무지하다는 것은 외상을 입은 분열증적 주체만 있고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원인을 알고 있다. 아버지의 폭력보다 더욱 거대하고 근거 없는 공동체가 가한 폭력의 외상을 더 강한 무의식으로 억압하고 은폐하면서 직접 대면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대경의 시에서 푸른빛은 공동체의 증상이자 타자가 죽음을 통해 공동체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환영의 빛이다.


3. 다른 곳

 

그는 방금 전까지 저 숲을 거닐다 왔노라고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드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는 다른 곳이 있다고 말했다. 흰 눈은 모든 것을 뒤덮는다고, 우리는 매일 밤 잠들며 진짜 잠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장미정원으로 들어섰다. 사방에 장미가 피어 있는데 이토록 환한 장미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장미란 무엇으로 피는지 알고 있어요? 그가 물어도 가시장벽을 맞닥뜨린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장미를 꺾었다. 잎을 하나씩 떼어내며 장미에 다가서려 했다. 손끝에 낯선 어둠이 스몄다.

우리가 한 송이 장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주를 이해하게 될 거예요.** 생각하면 할수록 고개를 숙이게 되는 벤치에서. 장미는 남김없이 흩어졌지만 어디에도 빛은 없었다.

끝인 줄도 모르게 길들이 끝나 있었다. 등 뒤는 드넓은 공터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물었을 때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당신 안에 사람이 있다고
좁은 다락에 갇혀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가 안 보이냐고, 안 보이냐고 물었다.


*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천사이자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여행자. 현실세계의 인물이면서 유토피아라는 환상적 공간에 몇 년간 체류한 경험이 있다.
** “우리가 만약 한 송이 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누구이고 우주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 보르헤스

― 안희연, 「라파엘*」 전문(『현대문학』 2014년 7월호)

 

2012년 『창작과비평』 신인상으로 등단한 안희연의 「라파엘」은 지금 현실의 터전이 아니라 미지의 다른 곳을 다녀온 천사―라파엘을 통해 유토피아를 그린다. 각주의 설명처럼 라파엘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천사이자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여행자로서 유토피아에 몇 년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현실의 인물이다. 라파엘이 ‘지금―여기’의 삶과 대비되는 ‘미지―거기’로서의 유토피아를 다녀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라파엘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현실 바깥의 공간―유토피아를 더욱 갈망하게 한다. 라파엘은 말한다. “방금 전까지 저 숲을 거닐다 왔노라”고. “다른 곳이 있다”고. “흰 눈은 모든 것을 뒤덮”고 “우리는 매일 밤 잠들며 진짜 잠을 연습하고 있다”고 유토피아가 실재한다고 증언한다.
라파엘의 증언을 듣고 우리는 장미정원으로 간다. 장미정원은 유토피아와 다른 이름이 아니다. 사방에 핀 장미 앞에서 라파엘은 우리에게 “장미란 무엇으로 피는지” 묻는다. 나는 그 물음에 보르헤스의 “우리가 한 송이 장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주를 이해하게 될 거예요”라는 문장을 연상하면서 장미를 꺾고 꽃잎을 뜯어내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손끝에 낯선 어둠”이 스미고 “장미는 남김없이 흩어졌지만 어디에도 빛은 없”다. 나는 더 뜯어낼 꽃잎도 없고 장미를 이해할 수도 없어 묻는다. 유토피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라고. 라파엘은 되묻는다. “당신 안에 사람이 있다고/좁은 다락에 갇혀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가 안 보이냐고, 안 보이냐”고.
나와 라파엘의 대화는 토마스 무어가 그리스어(語) ‘없는(ou) 장소(topos)'로 만든 유토피아(utopia), 그 실재 여부에 관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장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현실과 공동체로부터 얻은 이해에 기반한 것이어서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직 가시적인 현실과 공동체의 내부로부터 형성되어 또 다른 삶의 깊이와 두께가 없다는 점에서 그 경험은 단순하고 협소한 이해에 불과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실재하듯이 내가 속한 공동체 바깥에는 다른 삶과 다른 공동체가 실재한다. 지금 내가 다른 삶과 다른 공동체의 실재를 보지 못한 것은 현실과 공동체 바깥으로 넘어서는 시선의 부재를 드러낸다. 길들이 끝난 곳에서 길들은 새롭게 시작될 수 있고 저 숲의 드넓은 공터는 다른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다른 삶과 다른 공동체가 실재하며 다른 곳이 가능하다고 믿을 때 나는, ‘지금―여기’의 삶을 살면서도 ‘미지―거기’의 삶을 사는 존재, 다른 곳에 사는 타자가 된다. 라파엘이 가리킨 ‘당신 안에 사람’이 바로 그 타자다. 내가 다른 곳이 가능하다고 믿을 때, 나는 내 안의 타자, “좁은 다락에 갇혀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를 볼 수 있다. 장미에게서 우주의 원리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른 곳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주체의 윤리다. 공동체의 주체가 다른 곳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타자―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안희연의 시에서 저 숲의 드넓은 공터는 공동체의 바깥에서 가능한 삶의 터전으로 거듭날 것이다.


4. 다른 시간

 

연날리기

갠지스 강변에 가면 늘 연 날리는 아이들이 있지
하늘 끝까지 풀어 올린 연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생각할 때
마음 다 놓아 버리고선 어두워진 강변 신나게 내달리지

그러던 어느 날 보이지 않던 연들 강풍에 흔들리고
팽팽하던 실들 낚싯줄처럼 요동치기 시작하면
잊고 있던 실에 마음 베이는 아이 하나둘쯤, 있었는지도 몰라

하늘이 없었다면 떨어질 것도, 다시 띄울 것도 없었겠지만
어차피 우린 모두 하늘에 담겨 헤엄치는 아이들
한때 하늘을 점령할 듯 연 날리던 아이들

그동안 너무 많은 연을 띄웠으므로
팽팽히 당겨진 수만 개 연줄들로 뒤엉킨 마음은
아직도 줄 놓는 법 알지 못하지

누가 뭐래도 하늘엔 줄이 없어
줄 달린 연들이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차피 우린 모두 하늘에 빠져 익사하는 아이들


POSTCARD

안녕, 늘 오랜만인 당신. 내가 흰 소들에 대해 말해 준 적 있었던가. 골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빼곡이 담긴 신문지나 아직 밥 냄새 채 가시지 않은 종이 접시 따윌 꼭꼭 씹어 먹는 소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누군가에게 엽서 한 장 쓰고 싶어지는 저녁이야

오전에는 파리 떼처럼 잉잉대며 하늘 유영하고 있는 수백 마리 연의 무리 올려다보다 그만 그동안 우리 함께 하늘로 띄웠던 몇 개의 연들을 떠올려 버렸어. 이젠 연줄 모두 끊어 버린 하늘인 척해 버려도 괜찮은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 방금 화장터에 도착한 20인분의 목재가 구석에서 풍기던 유난히도 쓸쓸하고 축축한 냄새

오늘도 일곱 시면 텅 빈 배를 붙잡고 태양은 죽어 가지만 어쩌겠어, 이미 열기는 식었고 네가 내 메일 읽느라 밥을 태울 일도 이제는 없을 텐데. 그러나 창을 열면 어느새 새로운 계절이 도착해 있을 저녁은 과연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라고 쓰고 저녁 하늘에 붙어 보려 애쓰는 우표들을 한없이 바라보는 날들이 있어. 지금 네가 읽는 하늘은 어떤 표정의 구름들 배달하고 있을까, 당신의 하늘 아래 서서 몰래 올려다보고 싶어지는 저녁에


다시, 연날리기

온종일을 날고 달리고 뒤엉키고 부서지느라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만 연은
초저녁 조용한 강물에 수장시켜 주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골목에 남은 빛 쪼아 먹던 새들은
검붉게 번지 하늘 너머로 떼 지어 흡수되는 중이었고

골목 여기저기 버려진 혹성처럼 처박혀 있는 노인들
적막한 그들의 얼굴은 이미
바람 모두 쫓아낸 하늘의 심심함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문 앞에 이르러 열쇠를 찾고 있을 때
언제부터였을까,
모르는 새 나의 발목에 감겨 여기까지 풀려온
연줄을 보았다
(그때 몇 겹의 비린 바람
도처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이 밤, 외로운 누군가 나를 날리며 놀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발목에도 어쩌면 연줄이 감겨 있는지요
우주의 가장 어두운 아래층에서, 생의 마지막일 무엇처럼
그렇게 나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당신
혹은 내 간절히 붙들고 싶던 당신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속에서 우린
사이좋게 둘이서, 고요한 하늘에 나란히 손잡고 빠져
보기좋게 익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르띠 뿌자*

떠나 버렸다고
버려 버렸다고 믿은 것들 전부
다시 다 되돌아왔다
내가 달려 나가 줍지 않아도 남이 주워다
대문 앞까지 가져다주는 날 있었다
그놈에게 한바탕 욕지거릴 하더라도
돌아온 것, 다시 내쫓을 순 없었고

가트**에서 푼돈 주고 사 강물에 띄워 보낸 디야***
떠나보낸 줄 알고 뒤돌아보면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사라진 게 아니라 디야 파는 아이가
떠내려갈까, 금세 다시 떠올려 좌판에 되돌려 놓은 것
누가 거기다 대고 꽃 모두 시들 때까지 온갖
추잡한 욕 퍼붓는 것 보았지만
어떤 침몰한 기억도 깊은 강바닥 물고기들이 알아보곤
그 앞에서 잠시 놀다가는 법

피어난 죄로 무참히 꺾여서
헐값에 팔리고
다시 실에 묶여 떠내려가지도 못하는 빛,

그 빛을 사고 또 샀다
모든 여정(旅程) 탕진하고
마침내 두 주머니 텅 빈
부랑자가 되어 있었을 때까지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물에 푹 젖은 연처럼 무거워진 몸으로
누가 울고 있었다

한 번 뒤돌아볼 때마다 깊어지는 수위를 느끼며

그럼 이제 안녕,
이라는 말에 스미는 뒤늦은 추위를 느끼며

이미 멀리

떠내려가 있었다


*   불로써 신께 경배드리고 은총을 받는 제식.
**  강으로 이어진 계단.
*** 작은 양초와 꽃을 담은 나뭇잎 보트.

― 황유원, 「바라나시 4부작」 전문(『세계의문학』 2014년 여름호)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한 황유원의 「바라나시 4부작」은 한국이라는 사회의 공동체 바깥, 힌두교도들의 성지 도시인 인도의 바라나시를 통해 현실의 시간과 다른 시간의 현존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모두 하늘 높이 연을 날리는데, 그 하늘은 다른 시간과 같은 이름이며 우리는 모두 그 하늘의 다른 시간에 닿고자 “하늘에 빠져 익사하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연을 날리지만 연은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고 수만 개 연줄은 뒤엉킨다. 연줄은 지상의 시간과 하늘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지만 실제로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지는 못한다. 하늘은 드높고 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나시에서 멈추지 않는 ‘연날리기’는 다른 시간의 현존을 믿고 다른 삶이 가능한 다른 시간에 닿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에 다름 아니다.
내가 바라나시가 아닌 곳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엽서를 보낼 때 엽서는 연줄과 동일하다. 그 엽서를 받을 당신은 나와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 살고 있다. 연줄과 엽서는 ‘지금―여기’를 매개하고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의 현존을 드러내면서 “지금 네가 읽는 하늘”과 “당신의 하늘 아래 서서 몰래 올려다보고 싶어지는 저녁”은 같은 시간이 아님을 보여준다. 시간은 단일하지 않고 몇 겹의 다른 시간이 공존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공동체의 바깥에 복수(複數)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팽팽한 줄이 끊어지거나 뒤엉켜 부서진 연을 “초저녁 조용한 강물에 수장시켜 주었”지만 연줄은 “모르는 새 나의 발목에 감겨 여기까지 풀려온”다. 발목에 감긴 연줄은 어쩌면 내 자신이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당신, 타자가 날린 연(鳶/緣)일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낳는다. 그 깨달음은 “당신의 발목에도 어쩌면 연줄이 감겨” 있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성찰로 이어진다. 그것은 나와 당신이 서로를 날려 보낸 연이어서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 살고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존하고 있다는 성찰인데, 나와 당신이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의 삶으로 편입되지 않아도 서로 이어져있고 세계 속에서 함께 있다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거쳐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속에서 우린/사이좋게 둘이서, 고요한 하늘에 나란히 손잡고 빠져/보기좋게 익사”할 때 나와 당신은 만날 수 있다. 각자의 장소와 시간에서 저 하늘을 향해 죽을 때 우리는 만난다. 그런 이유로 주체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다른 시간 속에서 시작하는 타자의 삶이다. “한 번 뒤돌아볼 때마다 깊어지는 수위를 느끼며” 죽으면서 다른 시간의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의 공동체 바깥에 다른 곳과 다른 시간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시의 윤리이자 서대경과 안희연과 황유원의 시에 내포된 공동체의 윤리일 것이다.


-『문학들』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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