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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권력의 환영―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영화

비평

by POETIKA 2013. 3. 17.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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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권력의 환영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영화

 

송승환

 

인생이란 걷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1605-1606)는 권력의 환영에 매혹된 인간의 운명과 비극을 그린다. 무엇보다 『맥베스』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극이 아니라 권력의 환영에 매혹된 인간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서 빚어지는 비극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적이다. 신의 예언이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 선택으로 성립되는 운명과 비극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맥베스가 사회의 합리성을 획득했다면 비극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베스는 왕권이 계승되고 추대되는 사회의 합리성을 위반하고 모반과 살인을 강행함으로써 비극을 잉태시킨다. 맥베스의 비극은 마녀들의 예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된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필연적인 파멸과 참혹한 결말로 완성된다.

이와 같은 『맥베스』의 비극이 성립되는 주된 요소는 맥베스라는 인물의 성격이다. 성격은 어떤 선택을 할 때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그 선택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성격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이다. 맥베스는 전형적인 악한도 아니고 비범한 인물도 아니다. 그가 전형적인 악한이었다면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며 비범한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행하는 사소한 죽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맥베스는 자신의 친척이며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온화한 권위와 덕망을 지닌 덩컨을 살해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행동과 용기가 욕망과 같아지는 일(1:7)”을 두려워한다.

 

암살이 결과를 그물로 잡아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가 끝남으로써

성공을 쥘 수 있다면, 단지 이 한 방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세월의 이 둑과 모래톱에서,

걸리라, 장차의 생애를. 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는 어김없이 벌을 받는다, 우리는 단지

피비린 교훈을 줄 뿐이고, 이 교훈이 가르쳐진 후 돌아와

교훈을 만든 자에게 재앙을 안기거든.

― 맥베스(1:7)

 

그러나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본래 양심을 잃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판단 착오로 실수를 저지르는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다. 맥베스에게도 인간 내면에 공존하고 있는 선과 악의 이중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막 1장 첫 장면에서 마녀들의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Fair is foul, and foul is fair)”라는 주문(呪文)은, 인간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선악의 이중성과 보편성을 암시한다. 선인(善人)은 끝까지 선하고 악인(惡人)은 끝까지 악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건과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선과 악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함으로써 선인과 악인이 된다.

덩컨 살해 후 왕위에 오른 맥베스는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뱅쿼가 자신의 모반 살해를 알아차렸음을 깨닫고 자객을 보내 뱅쿼를 살해한다. 뱅쿼의 아들 플린스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믿고 플린스마저 살해하려 했지만 플린스 살해는 실패한다. 맥베스의 뱅쿼 살해는 왕권을 전복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최초 살인에 대한 발설을 막기 위한 첫 살인일 뿐이다. 이제 맥베스는 살인에 대한 모든 소문을 잠재우고 왕권 유지를 위해 신하 맥더프 뿐만 아니라 덩컨의 아들로서 공식적 왕위 계승자인 맬컴, 그리고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피가 피를 끝없이 부르는 상황이다. “시작이 나쁜 일은 악행으로 자신을 튼튼하게 만든다(3:2)”고 맥베스 스스로 말하듯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만 살인을 멈출 수 있는 상황이다. 모든 사람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운명이다. 단 한 번의 판단 오류로 자행한 살인은 맥베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살인자의 삶을 계속 살아내도록 요구하고 파멸로 치닫게 한다.

맥베스는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점점 희미하게 느낀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가 맥베스 본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선인 맥베스는 악인 맥베스가 된다. 그런데 권력에 대한 욕망은 맥베스뿐만 아니라 맥베스 부인과 뱅쿼, 국왕 덩컨의 심연에도 도사리고 있다.

 

운명과 초자연적인 도움으로 당신에게 굴러 떨어진

그 황금 왕관에 당신이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온갖 것들을 꾸짖어 주리라.

― 맥베스 부인(1:5)

 

행위가 아니라 의도가

우리를 파멸시킨다면. 아냐! ― 내가 그놈들 비수를 준비해놨어.

그(맥베스)가 그걸 못 봤을 리 없지. 내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닮지만 않았다면, 내가 해치웠을 거야.

― 맥베스 부인(2:2)

 

맥베스 부인은 맥베스가 코더 영주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에 현혹되어 맥베스 보다도 더욱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국왕 덩컨 살해에 대해 갈등하는 맥베스에게 모반의 살인을 촉구한다. 더 나아가 맥베스 부인은 덩컨을 살해한 맥베스를 대신해 피 묻은 단검을 대담하게도 덩컨의 시종들 손에 쥐어줌으로써 시종들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다. 살인 직전 맥베스의 여성성과 대비되는 맥베스 부인의 남성성이 두드러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맥베스 부인은 왕비가 된 이후 살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몽유병에 걸리고 결국 맥베스보다 먼저 죽고 만다. 아내의 죽음 소식에 스코틀랜드 국왕 맥베스는 담담하다. “야심을 따르는 사악한 마음이 없(1:5)”던 맥베스의 여성성이 “무서움의 맛을 거의 잊어버(5:5)”린 남성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선악의 이중성 뿐만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중성이 어느 한쪽에 편향되어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셰익스피어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대는 이제 손에 쥐었다. 왕, 코더, 글래미스, 모든 것을

운명 자매들이 약속했던 대로, 그리고 아무래도

그걸 위해 아주 비열한 행동을 했어. 하지만 그들 말은

그게 네 자손들에게 물려지지 않는다는 거였어,

오히려 내 자신이 숱한 왕들의

뿌리이자 아버지로 될거라 했지.

― 뱅쿼(3:1)

 

뱅쿼는 맥베스처럼 직접 왕의 시해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지만 그의 내면에도 권력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뱅쿼는 자객에 의해 죽음을 맞는 순간 아들 플린스에게 도망치라면서 “네가 복수할 수 있겠지(3:3)”라고 말한다. 이는 뱅쿼의 무의식에 맥베스에게 복수하고 아들 플린스가 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믿고 있었음을 예증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 뱅쿼보다 더욱 영원불멸한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인물은 역설적으로 현존하던 국왕 덩컨이다. 역모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맥베스와 뱅쿼가 구하자마자 덩컨은 갑작스럽게 장자(長子) 맬컴을 컴벌랜드 왕자로 책봉하고 자신의 권력을 계승시킨다. 아들이 왕권을 계승함으로써 덩컨 자신이 죽은 뒤에도 덩컨의 권위와 명예를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덩컨의 갑작스런 세자 책봉은 맥베스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내면 갈등을 일깨우는 원인이 된다. 왕위 계승을 목격한 맥베스는 방백으로 말한다.

 

컴벌랜드 왕자라―그것이 계단이로다,

그 위에서 내가 무너지거나 아니면 건너뛰어야 할,

내 길을 가로막거든. 별들이여, 그대 불들을 감추라,

빛이 보지 못하게 하라, 검고 깊은 내 욕망을.

눈이 손을 눈감아 주기를. 하지만 그 일은,

행해질 경우, 끔찍하리라,

― 맥베스(1:4)

 

이처럼 권력에 대한 욕망은 덩컨으로부터 맥베스로, 맥베스 부인으로, 뱅쿼로,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로 이동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맥베스 뿐만 아니라 맥베스 부인과 뱅쿼, 덩컨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뿌리처럼 심어져 있고 비극을 품고 있다. 권력은 인간에게 세계를 지배하고 부와 명예를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해주리라는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환영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며 실재가 아니라 부재이다.

 

존재하는 두려움은

끔찍한 상상 행위보다 덜하다.

생각이 그 속에 살인은 아직 환상일 뿐이건만,

내 온전한 상태를 마구 뒤흔들어 행동할 능력이

가정으로 질식당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없는 것 말고는.

― 맥베스(1:3)

 

어떤 의미에서 『맥베스』는 실재의 서사가 아니라 환영의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 『햄릿』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햄릿에게 본인 사망의 원인을 규명해달라는 요청으로 서사가 구축되는 것처럼 『맥베스』는 맥베스의 환영에 의해 서사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만일 맥베스가 국왕 덩컨으로부터 코도 영주의 지위를 하사받은 것에 대해 전승(戰勝)의 보상으로 생각하고 만족했다면 왕권에 대한 환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소유하려 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부재의 환영에 이끌린다. 맥베스는 소유하게 된 코더 영주의 권력보다 더욱 크고 자신에게 없는 왕권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 속에 지님으로써 국왕 맥베스의 환영을 본다. 그런 점에서 맥베스에게 코도 영주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해준 마녀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에 품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을 예시하는 환상이여, 시각처럼

촉각으로 너를 감지할 수는 없느냐?

그렇지 않으면 넌 마음의 단검,

열기에 들뜬 머리에서 생겨난

공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냐?

아직도 보이는구나, 지금 내가 뽑은

이것과 같이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넌 내가 가던 길로 나를 이끄는구나,

― 맥베스(2:1)

 

환영은 연약하고 양심적인 맥베스에게 덩컨을 살해하기 직전의 두려움과 뱅쿼를 살해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맥베스는 뱅쿼 살해 직후 죄의식 때문에 뱅쿼의 유령을 본다. 맥베스 부인은 모든 살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손 씻는 행동을 반복하고 헛것을 본다. 유령과 헛것은 악한과 비범한 인물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성격의 맥베스와 부인 내면의 죄의식이 불러일으킨 환영이다. 환영은 권력에 대한 환상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환영은 한번 소유한 권력은 영원하리라는 환각과 영원히 소유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 뱅쿼와 덩컨 모두 권력을 통해 부와 명예를 영원히 누리려는 환상을 품는다. 그런데 이 모든 환상은 텅 비어있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권력은 그 누구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오히려 권력의 환영은 끝없이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 곁을 스쳐 지나간다. 권력의 환영이 움직일 때마다 욕망과 살인, 두려움과 죄의식이 죽음과 함께 동반한다. 맥베스는 그 환영에 현혹된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권력을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맥베스를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없다.

 

연민이란 파괴적이거나 고통을 주는 악덕이 그것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행해지는 것을 목격한 것으로부터 연유하는 고통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덕이 가까이 있고,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이러한 악덕에 의해 고통을 받으리라고 예상될 경우 연민을 느끼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Ⅱ』(이종오 옮김, 리젬, 2007)

 

맥베스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비극은 맥베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맥베스에게 우리는 비난보다 일종의 연민을 느낀다. 『맥베스』의 비극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 다름 아닌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비윤리적 행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격과 권력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인생이란 걷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불쌍한 배우처럼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네.

그것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소음과 광기로 가득 차 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 맥베스(5:5)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맥베스』는 영원하지 않은 권력의 환영을 좇는 인간들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비극의 수많은 대사들은 모두 아름다운 시편들이다. 셰익스피어는 최소의 지문으로 장소와 인물을 지시하면서도 인간 삶의 보편성과 문학의 보편적 주제를 담아내는 경이를 보여준다. 치밀한 구성과 아름다운 시적 대사가 뿜어내는 극적 긴장은 정서의 고양과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희곡 『맥베스』는 수많은 연극과 영화로 각색되어 왔고 오늘날까지 공연되고 제작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슨 웰스, 구로사와 아키라,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맥베스>는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이다.

 

오슨 웰스의 <맥베스>(1948)

영화의 교과서라 불리는 <시민 케인>의 감독 오슨 웰스는 본인이 직접 주연까지 맡으며 영화 <맥베스>를 찍었다. 오슨 웰스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매우 연극적인 무대와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을 등장시킨다. 그는 1시간 42분의 상영 시간 동안 극적 긴장을 유지하며 원작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살려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오슨 웰스는 <시민 케인>에서 보여줬던 화려한 카메라 워크(Camera work)를 구사한다. 원작에서 인물의 갈등하는 내면을 표현할 때 사용하던 방백은 주로 클로즈업(Close up)을 통해 구현된다. 오슨 웰스 자신이 완성한 딥포커스(Deep focus)는 초점이 맞는 거리의 전경부터 후경까지 모두 담아냄으로써 사실적으로 현실을 재현하고 관객 스스로 화면의 사건과 사물들을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극단적인 앙각(Low angle shot) 촬영으로 왕위에 오른 맥베스의 권력을 표현하고 극단적인 부감(High angle shot) 촬영으로 내려다보는 맥베스의 시선 속에 신하들을 매우 왜소하게 표현한다.

오슨 웰스의 <맥베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녀들이 피 흘리는 맥베스 인형에게 왕관을 씌어주는 숏과 왕위에 오른 맥베스가 왕관을 쓰는 숏이 겹치면서 맥베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거울에 나타나는 장면이다. 맥베스의 결말은 인형의 목이 잘리는 것으로 사실적 재현을 대신한다. 맥베스의 피로 얼룩진 권력욕과 비극을 암시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을 갈구하자 화면의 전환 없이 롱테이크(Long take)로 바람 불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이는 오슨 웰스가 의도한 연극적 화면을 구성하고 관객의 정서 동일시를 유도한다. 오슨 웰스는 1952년에 <오델로>를, 1965년에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각색한 <심야의 종소리Chimes At Midnight>를 만들어 '셰익스피어 3부작'을 완성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거미의 성(蜘蛛巢城, Throne of Blood)>(1957)은 『맥베스』를 일본 전통 연극 노(能)로 각색한 작품으로서 셰익스피어 원작의 기념비적인 영화들 가운데 한 편으로 꼽을 수 있다. 노(能)란 ‘노카쿠(能樂)’의 줄임말로 자연과 초자연의 교류를 중심으로 한 극 구성, 간소한 무대, 주술적 상징성을 지닌 가면(假面), 고도로 양식화된 춤, 제의극의 특성을 지닌다.

<거미의 성>에서 『맥베스』의 세 마녀들은 단 한 명의 여장 남자 노인으로 각색되어 등장하는데, 노인의 얼굴은 노의 가면처럼 흰 분장을 해서 표정이 모호하다. 노의 가면은 인간 아닌 존재의 얼굴 표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무표정한 노인은 노의 가면처럼 인간 감정 표출을 피하고 실을 잣는 최소의 절제된 움직임과 노래로 제1장군 와시즈와 제2장군 미키에게 앞날을 예언하고 사라지는 귀신이다.

<거미의 성>에서 상징적인 것은 안개이다. 영화는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성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와시즈가 거미성의 군주가 되고 미키가 제1장군이 되고 미키의 아들은 군주가 되리라는 예언을 듣는 곳 또한 안개에 휩싸인 숲이다. 그 숲에는 전쟁으로 죽은 무사들의 해골들이 쌓여있다. 두 사람은 안개에 휩싸인 숲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를 상징한다.

와시즈 부인 역의 아사지는 주군 살해를 와시즈에게 촉구하고 치밀한 살인 계획을 세우면서도 악인으로서의 얼굴 표정을 철저하게 절제하는 연기를 펼친다. 이에 반해 와시즈는 주군 살해에 대한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욕망 사이의 갈등을 얼굴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낸다. 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선악의 이중성을 보여준 셰익스피어와 달리 구로사와 아키라는 두 인물의 감정 표현의 차이로 선악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는 얼굴 표정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전통적 ‘가부키’ 극과 상반된 장면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군주가 되리라는 귀신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와시즈가 부하들에게 직접 공포하는 장면 등으로 각색하여 『맥베스』를 새롭게 보는 흥미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머리가 잘려 죽는 맥베스와 달리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는 와시즈의 최후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명장면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장면 전환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는 편집형식과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밝아지는 편집 형식을 취함으로써 연극의 막과 장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과 대규모 무사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딥포커스를 활용함으로써 사실적 현장감을 준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햄릿의 독백에서 착안한 <악인은 잠도 잘잔다>(The Bad Sleep Well, 1960)를 제목으로 삼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전후 20세기의 일본으로 옮겨 제작했으며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란(亂)>(1985)을 제작하기도 했다.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1971)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의 <맥베스>(1971)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가장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 중 하나다. 오슨 웰스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흑백 영상과 달리 로만 폴란스키는 컬러 영상으로 <맥베스>를 제작했다.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첫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세 마녀는 팔이 잘린 손에 단검을 쥐어주고 그 손을 흙 속에 파묻은 뒤 주문을 왼다.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

로만 폴란스키는 원작 『맥베스』의 시적 대사를 훌륭히 되살려내면서도 여러 번의 살인 장면과 고성(古城)의 풍경 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딥포커스와 방백의 클로즈업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맥베스와 맥더프의 마지막 결투 장면은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가 추구하는 사실주의를 분명히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왕관을 쓰고 있는 맥베스를 앙각 촬영으로 시작한 카메라 워크는 맥베스 독백의 클로즈업, 현장감 넘치는 결투 장면의 들고 찍기(Hand-held), 굴러 떨어진 왕관을 다시 주워서 머리에 쓰는 맥베스, 맥베스 갑옷 사이 몸속을 관통하는 칼, 맥베스의 목이 사실적으로 베어져 바닥에 떨어지는 5분여 동안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시간 동안 화면들은 여러 개의 숏으로 구성되지만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롱테이크처럼 느껴진다. 한편 그 장면들은 영웅들의 결투라고 보이지 않아서 희극적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사실주의적 카메라 워크와 함께 환영으로 나타나는 단검과 거울, 뱅쿼의 유령과 마녀들이 보여주는 환각 장면은 로만 폴란스키의 뛰어난 연출력을 예증한다. 오슨 웰스와 구로사와 아키라와 다른 연출력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목이 베어졌지만 머리에 왕관을 쓴 채 눈을 뜨고 있는 맥베스. 그 왕관은 벗겨져서 이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맬컴의 머리에 씌워진다. 잘린 맥베스의 머리는 창에 찔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환영이 불러일으킨 비극적 결말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오슨 웰스의 <맥베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과 또 다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권력에 대한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을 암시한다.

 

『시네리테르』(문예중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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