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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침묵과 언어의 파열― 김경후의 시세계

비평

by POETIKA 2013. 3. 17.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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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침묵과 언어의 파열

― 김경후의 시세계

 

 

송승환

 

 

무(無)를 직시하는 인간은 유한(有限)의 인식을 전제한다. 인간 스스로 육체의 한계와 정신의 결함을 절감할 때 유한에 대한 자각은 매우 통렬하다. 갑작스러운 질병과 급격한 노환은 육체가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죽음은 삶과 함께 항상 공존해왔음을 환기시킨다. 한편 정신은 사유와 성찰을 수행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를 증진시킬 수 있지만 개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사유와 삶의 깊이는 주체의 거듭된 반성과 저 육체의 한계를 통해 유한성을 다시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이 육체와 정신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느끼는 임계점은 목숨을 건 도약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삶에서 죽음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의미에서 무의미로,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의 경계다. 주체가 그 경계 너머로 나아갈 때 주체는 전혀 다른 주체로 태어나게 된다. 그것은 주체가 현실 바깥의 세계로 나갈 때 타자가 되는 지점이다. 그 타자의 얼굴은 죽음이며 무(無)이고 무의미다. 죽음과 무(無)는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영원하고 언어 없이 존재하기에 의미가 없다. 죽음과 무(無)는 의미 없는 비존재로서 영원하다.

역설은 이곳에서 발생한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포기하고 단 한 번만 죽는다면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절세 미인은 아름다움의 순간을 포기하고 죽는다면 저 다이아몬드의 광채와 함께 영원할 수 있다. 육체의 감각과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광물의 영원성을 추구한 스테판 말라르메의 ‘에로디아드(Hérodiade)’와 극단의 인공미와 탐미를 추구한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A Reboours』의 ‘데 제쌩트(des Esseintes)’와 같은 시적 주체는 육체의 한계와 현실의 유한성을 초극하려는 시의 윤리를 보여준다. 그들의 시적 윤리는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절망의 체험 후에 갖게 된 냉소를 통해 현실 너머로 초극하려는 삶의 윤리와 맞닿아있다.

그러나 김경후의 시적 주체는 현실 세계의 참혹한 폭력을 참아내는 삶의 윤리를 표명한다. 그녀의 시적 주체는 에로디아드와 데 제쌩트의 냉소가 아니라 아직은 현실에 대한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 2001)는 거짓 화해의 언어 대신 처참한 삶의 폐부를 끝까지 보여주는 언어로 폭력적인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시의 윤리를 보여준 바 있다. 그녀의 시는 현실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보다 나은 삶과 또 다른 현실을 모색하는 주체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혼자라도 집에 들어가려 하지만

너무 찌그러진 열쇠

문을 열지 못한다

 

이 열쇠가 맞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

텅 빈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이

공장 벽에 금이 가고

콘크리트 덩어리가 굴러 떨어지고

더 이상 열어볼 문이 없다

 

다시 붉은 문 앞에 아이

열쇠를 삼키고 온몸에

붉은 칠을 하고 있다

― 「열쇠」,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 2001) 부분

 

‘열쇠’는 그녀의 시적 주체가 폭력적인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그 열쇠에 들어맞는 문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저 아이는 “온몸에 붉은 칠을 하”며 열쇠에 맞는 문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가 현실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세계로부터 소외받고 무참한 폭력을 당할수록 현실은 아이조차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추문(醜聞)의 알레고리를 발생시킨다. 아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적인 일상에 처해 있다. 아이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난 세계에서 폭력적인 일상에 무력하다. 아이는 폭력과 추문이 가득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에 말을 잃고 침묵을 강요당한다. 아이가 친구에게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돌아오지 않”고 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적 주체에게 언어는 현실 세계에서 의미를 생성시킬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지만 그 언어는 세계의 내부에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머리 없이 끊, 어, 진, 단음절”(「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로 떠돈다.

김경후의 두 번째 시집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 2012)은 폭력적인 세계에서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주체의 강요된 침묵에서 흘러나오는 신음(呻吟)을 기록한다. 그 침묵과 신음은 세계의 폭력을 참아내면서도 현실의 진입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던 시적 주체가 그 가능성의 실천력을 상실한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주체가 아이에서 성년으로 성장함에 따라 세계의 폭력이 더욱 가중되었음을 암시한다.

 

계단과 계단 사이엔 열쇠가

없다 오르기와 내려가기 사이엔 자물쇠가

없다 이것은 비유다, 천둥이다, 죽음이다, 허무다, 기타 등등

여러 학설이 오갔지만 아무도 열쇠가 없다는 걸

믿지 않는다

― 「열쇠」,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 2012) 부분

 

이제 아무도 현실 세계로 진입하거나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조차 없다는 시적 주체의 말을 믿지 않는다. 김경후의 시적 주체는 세계의 폭력을 참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기에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참으면서 침묵해야 한다. “박제당한 채 태어나 울음을 받아내며 울음을 참는 자”(「바다코끼리 머리뼈」)로서 그녀가 말로 호소한다고 해도 세계는 들어주지 않고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불신한다. “나를 싣지 않은 기차는 또다시/나를 싣지 않고 달”(「슬픈 톱니바퀴―정오부터 자정까지」)리면서 그 기차는 주체를 항상 배제한다. 그 기차가 곧 세계다. 세계의 폭력과 배제와 불신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다.

 

입을 다문다

말들의 십팔방위로 짜인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를

단 한 번 내기 위해

― 「모래의 악보」 부분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오랜 폭력을 참아내는 자의 침묵이다. 침묵 속에는 단 한 번 터져나오기 위해 응어리진 절규의 외침이 도사리고 있다. 온몸의 살갗을 뚫고 터져나올 그 절규는 세계의 폭력을 참아냄으로써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발화하는 그녀의 신음이다. 우리는 그녀의 시적 주체가 참혹한 세계의 폭력을 그토록 참아내는 침묵을 주목해야 한다. 그 침묵은 그녀의 시적 윤리와 삶의 윤리가 동시에 발현되는 기원이기 때문이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 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띠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울음을 참는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 「코르크」 전문

 

서두에서 언급한 에로디아드와 데 제쌩트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절망의 체험 속에서 얻은 냉소를 통해 현실 너머로 초극하고 무의미한 비존재의 영원성을 추구했다면 김경후의 시적 주체는 끝없는 세계의 폭력 속에서도 현실 너머로 초극하려 하지 않고 그 폭력을 참아내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로 세계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세계에 참여하는 존재의 순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적 주체는 강요된 침묵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통해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의미 있는 언어의 발화를 위해 울음을 참는다. 코르크는 그 울음의 커다란 응집체이며 세계의 폭력을 참아내는 시적 주체의 성대로서 곧 폭발할 언어의 디오니소스를 응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에로디아드와 데 제쌩트가 선택한 삶의 윤리보다 김경후의 시적 주체의 윤리가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시적 주체는 세계의 폭력을 모두 참아내면서도 삶의 의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의 윤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적 주체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I would prefer not to.)”고 말하면서 현실에 대해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의 ‘바틀비’보다 더욱 극소로 저항하는 주체다. 그 주체는 “내가 있어도 나는 빈 방/없어도 나는 나의 빈 방”(「잘 듣는 약」)처럼 실재하면서 부재하는 주체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주체지만 세계는 그 주체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나만의 비밀”(「타인의 타액으로 만든 나의 풍경」)이다. 에로디아드와 데 제쌩트처럼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 영원한 무(無)가 될 수 없는 그 주체는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나일 수 없는/마지막 눈”(「첫눈」)과 같다. 그 마지막 눈은 첫눈이지만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주체로서 끝나지 않는다. 눈의 흰빛은 실재하면서 부재하는 김경후의 시적 주체의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파열되는 언어의 형태와 함께 안개로 구체화된다. 안개처럼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주체의 상태가 지속될 때 주체는 공황 상태의 언어를 내보인다.

 

벙어리 늑대가 안개를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안개 속이거나 아니거나

어차피 안개라고 부른다

                             시와 피가 하나였을 때처럼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이제

                                         잃어버린 그것이 안개

― 「안개 공황」 부분

 

공황은 타자와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심리 자체에서 발생한다. 「안개 공황」와 「회전문을 위한 회문(回文)」 등의 상형시(calligramme)는 실재하면서 부재하는 주체의 상처 입은 정신과 언어의 파열을 공황 상태의 시각적 심리로 보여준다. “안개에도 물들 수 없는,/그러나 이미 스스로 안개인”(「안개 무대」) 주체가 강요된 침묵 속에서 토해내는 신음은 분절되고 단절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 부재하는 실재로서 폭력을 참아내면서 토해내는 언어는 그녀의 시적 주체가 세계의 폭력에 대해 극소로 저항하며 세계에 참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세계는 그 신음조차 의미 있는 언어로 정립될 수 없도록 파괴하고 무(無)로 환원하려 하지만 그녀는 극소로 저항하며 실존을 걸고 파열된 언어로 말한다. 그녀의 시적 주체는 거의 무(無)에 가깝지만 그 무화(無化)에 저항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파열된 언어로 말한다. 그것이 김경후 시의 윤리와 삶의 윤리가 동시에 발현되는 언어다. 그것이 의미 있는 삶과 시의 언어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껍질 벗겨진 안개의 탯줄을 목에 감고 오래오래 살아 있”(「안개 무대」)어야 한다.

신작시 「아귀」 외 4편은 여전히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침윤되어 있으면서도 폭력적인 세계에 대해 실존의 시쓰기로 저항하려는 그녀의 의지를 내보인다. “뭘 써도/아무것도 쓰지 않은/텅 빈 밤”(「아귀」)이 되는 세계에 대해 극소의 몸짓을 가장한 극대의 저항으로서 실존의 시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녀는 “늘 증발해 버리는 시, 그 시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면서 ‘불새처럼’ 죽어도 거듭 되살아나는 시를 쓰고자 한다. “실에 감전되는 손가락 끝/의 놀람”(「순간경(經)」)을 안겨주는 그녀의 시가 세계의 재발견과 경이(驚異)의 시적 순간으로 출현하기를 기다린다.

 

『시작』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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