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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와 다른 삶의 가능성― 황유원 시의 언어 사용법

비평

by POETIKA 2016. 9. 12. 22:04

본문

다른 언어와 다른 삶의 가능성

황유원 시의 언어 사용법

 

 

송승환

 

 

시의 단어가 다르게 씌어진다는 것은 일상 언어의 관용적 의미를 넘어서서 시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단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치적이다. 하나는 일상의 관용적 의미에 대한 위반의 언어로서의 정치성이다. 그것은 행정 문서와 저널리즘, 정치적 성명서와 명령문처럼 정보 전달과 의견을 제시하는 목적에 도달하면 자취도 없이 소멸하는 산문 언어에 저항하는 정치성이다. 일상의 상투어는 소통을 가장한 명령과 응답의 회로 체계에 갇힌 언어로서 언어를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언어를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관용어의 정점은 법의 언어이다. 법의 언어는 일상의 규범과 사회 제도에 종속되는 삶을 운용하며 현실의 정치 체제에 봉사한다. 이에 반하여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시의 언어는 언어가 생활 세계를 온전히 반영한다는 믿음의 전제를 부정하고 회의하면서 법의 언어를 위반한다. 법의 언어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 바깥에서 다른 언어를 발명한다. “내 나라에 있으면서도, 머나먼 이역(異域)에 있는 듯한 다른 언어에 기초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존하는 삶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

시의 단어가 지닌 또 다른 정치성은 죽어있는 일상 언어의 감각을 되살리고 언어 자체의 본래 미감과 쾌감을 독자의 감각에 새겨 넣는 미적 정치성이다. 그것은 삶의 기저를 이루는 언어의 미적 감각을 재구성하고 죽어있는 삶의 감각을 일깨움으로써 관용적 의미와 다른 관점에서 삶과 세계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더불어 언어로 포획되지 않은 사물의 잔존하는 이미지와 운동의 진동을 감각할 수 있는 몸의 장소를 제공한다. 그 지점에서 시의 언어는 발화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를 거부한다. 시의 새로운 표현이 곧 사유의 생성 지점이며 소리의 울림에서 비롯된 말의 물질성이 다른 삶의 생기(生起)를 불러일으키는 시원임을 환기시킨다.

황유원은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2015)에서 법의 언어와 규범적 언어로 작동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음악으로 치닫는 언어를 선보인 바 있다. 황유원의 시의 전면은 사물의 의미가 재구성되고 시의 배면은 리듬이 질주하며 그 의미를 지운다. 그것을 리듬의 정치성으로 논한 바 있다. 황유원의 시에서 리듬의 정치성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앞서 언급한 일상 언어를 다르게 쓰는 황유원의 언어 사용법이다.

 

학의 울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날기 전 잠시

웅크릴 때 얘기고

오늘 하늘은 무엇보다 학의 웃음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이토록 구름 한 점 없는 날엔

나 역시 학의 웃음의 일부이므로

 

떨어져 깨질 수도 있다

그건 학의 웃음이 맑고 투명하며

무엇보다도 정교하다는 증거

떨어져 깨진 학 조각들은 강물처럼 반짝이다 모두

학이 되어 펼쳐질 것이다

 

학이 숨겨 둔 커다란 알이

둥지 속에서 저 홀로 빛난다

조그만 게 어디 겁도 없이

떨어지면 깨질지도 몰라

 

알을 잃은 학이 운다

동네 전체에 울려 퍼지는 학교종

전자 멜로디처럼

 

갑자기 발견된 그늘의 그윽함처럼

학의 영혼은 층수가 높다

학의 영혼은 지하로 깊다

 

중략

 

아무리 층수가 높은 영혼이라도

1층에서 시작한다

언제나 지하로 깊은 영혼이라도

1층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학의 울음은 됐고

학의 웃음이 있다

희고 목이 긴 병 속에 잠시

고여 있다가

내쉬면 다시 무한대의 공기와 하나 되는 길고 연한 웃음

— 「학익동(鶴翼洞)부분

 

학익동(鶴翼洞)은 학익동의 식당 학운정(鶴雲停)’에서 만난 너와의 일화를 담고 있는데, 일화의 세밀한 묘사와 너의 내밀한 내력을 풀어놓기보다는 학익(鶴翼)’이라는 단어를 황유원의 언어 사용법으로 다시 쓰기를 실행함으로써 단어의 다른 의미와 깊이를 발명하고 그 일화와 내력에 대한 삶의 비애와 파토스를 암시한다. 인천의 학익동(鶴翼洞)’은 학이 날개를 편 모양에서 유래된 학익산(鶴翼山)으로부터 연원한 지역명인데, 시는 ()’()’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동기술적 상상력과 학운정(鶴雲停)’에 고요히 앉아 있는 너의 현실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학의 웃음과 울음, 날개의 비상과 추락에서 비롯되는 초월적 상상력과 우울한 감수성의 교직과 대비는 너와 나의 이상과 우울을 암시한다.

그러나 황유원은 학의 울음과 날개의 추락을 감성적 서사로 설파하기보다는 학의 웃음과 날개의 비상을 학익(鶴翼)’이라는 단어에서 발견해내고 긍정한다. 학의 울음은 비상하기 전에 웅크린 자세일 뿐이다. “오늘 하늘은 무엇보다 학의 웃음이라고 장담하는 황유원의 언어 사용법은 우울하고 추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몸짓과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동시에 개시하는 그의 시적 윤리를 드러낸다. “구름 한 점 없는하늘과 나 역시 학이 되어 펼쳐질 것이다라고 서슴없이 선언한다. “떨어져 깨질 수도 있는 것이 학의 웃음이며 무엇보다도 정교하다는 증거라면서 떨어져 깨진 학 조각들은 강물처럼 반짝이다 모두” ‘학이 되어 펼쳐질 것임을 되새긴다.

하늘, 창공이라는 영원에 대한 지향은 학의 울음과 추락, 현실의 실패와 우울을 내포하는 학의 끝없는 웃음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비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거기, 하늘을 향한 비상 속에는 갑자기 발견된 그늘의 그윽함이 있음을 시인은 투시한다. “학의 영혼은 층수가 높다/학의 영혼은 지하로 깊다는 시적 인식을 드러낸다. 그런데 시인은 그 시적 인식에서 더 나아간다. 학의 웃음과 울음도, 날개의 비상과 추락도, 층수가 높은 영혼과 지하로 깊은 영혼도 모두 “1층에서 시작한다는 지상의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와 인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영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낙관도 결코 영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절망도 쉽게 품지 않는 현실주의자의 태도이다. 끝까지 현실과 직면하고 현실에 저항하면서 현실을 넘어서려는 현실주의자가 확보한 삶의 깊이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이다. “고여 있다가/내쉬면 다시 무한대의 공기와 하나 되는 길고 연한 웃음이다. 어두워지는 지상의 저녁 한복판을 혼자 가로질러가는 먼 걸음이다. 그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자신의 대담집Entretiens(1913-1952)에서 시의 역할은,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하며, 사방으로 가능성의 영역을 탐색하고 어떠한 난관이 닥친다 해도 굴하지 않고 해방예언의 힘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한 시의 기능과 다르지 않은 맥락에 있다.

 

너는 말한다 열대과일의 물렁물렁함

 

물렁물렁과 함은 잘 어울리지 않아

 

너는 물렁물렁과 함을 분리시킨다

 

물렁물렁이 함에 담긴 모습이 되었군

 

함은 보석함 골무함 함자물쇠

 

따위의 단어들에 사용되고

 

그러나 물렁물렁은 보석도 골무도 아니고

 

자물통처럼 튼튼하지도 않아

 

그 무엇도 지켜줄 수가 없어

 

물렁물렁은 자기를 놓아버렸다

 

그러나 씨앗의 단단함

 

물렁물렁은

 

물렁물렁하지 않은 것들 위해 봉사한다

― 「물렁물렁부분

 

백지는 글자를 정의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단입니다

백지의 광활함 때문에

글자들이 더 춤추기 좋았다

아무리 뛰놀아도 부딪힐

벽이 없었으니까

 

중략

 

백지 속에

백지 속으로

백지 너머로

아무리 떠들어봐라

네 외로움이 더 드러날 뿐이다

네 외로움만이 더 환히 켜질 뿐이다

그러나 글자가 없었다면 거기 백지가 있는 줄

알 수나 있었을까

― 「군무부분

 

물렁물렁은 황유원의 언어 사용법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물렁물렁은 단어 자체에서 비롯되는 감각의 차이를 구현함으로써 일상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물렁물렁하다라는 형용사는 명사형 전성어미 ―ㅁ'이 결합됨으로써 물렁물렁함이라는 명사가 되는데, 황유원은 그 명사를 부사 물렁물렁과 명사 으로 분리하고 다시 을 한자어 으로 변환함으로써 본래의 물렁물렁하다의 뜻과 다른 의미를 정립한다. ‘물렁물렁의 액체에 근접하는 부드럽고 무른 감각과 대비되는 의 비어있고 단단한 고체의 감각을 물렁물렁함/물렁물렁에 부여한다. 그것을 씨앗을 품은 물렁물렁한 과일과 시의 언어에 비유한다. 물렁물렁은 물렁물렁한 과육의 소멸과 죽음을 뚫고 다시 재생되기 위해 함을 버리고흙속에 파묻히는 단단한 씨앗으로 비유한다. 더 나아가 시의 언어가 물렁물렁한 관용적 의미를 소멸시키고 다른 의미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시의 알레고리이자 황유원 시의 단어장에 기입된 새로운 낱말이다.

군무는 황유원 시의 단어장에 기입된 새로운 낱말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는 공간으로서의 백지를 정의한다. 그 백지는 글자들이 군무를 추는 무대이자 완전무결한 시의 순수 언어이며 완벽한 절대시의 상징이다. 백지와 완전히 합일하는 시는 불가능하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실존의 근거인 시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 그리하여 백지의 광활함백지의 끝도 없음때문에 시인이 쓰는 시는 채워지지 않는다. “글자들이 일렬로 자신이 이고 온 관 속으로 쓰러질 때/백지가 울려퍼진다.” 시인이 쓰는 검은 글자는 흰 빛 속에서/일시적으로 조립됐을 뿐실패하고 백지에 파묻힐 수밖에 없다. 시인의 외로움만이 더 환히 켜질 뿐이다. “내 언어의 한계들은 내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떠올릴 만하다. 삶과 사물과 세계를 온전히 명명하지 못하는 시인의 언어는 백지 위에서, 백지 속에서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의 한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그 순간은 백지가 출현하는 시각이며 역설적으로 모든 검은 글자들을 지우고 완전한 시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백지가 출현하는 순간은 시인의 완전한 절망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의 도래와 도전을 잉태시키는 시각이기도 하다. 황유원은 그 백지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의 윤리와 끝까지 현실에 저항하면서 현실을 넘어서려는 삶의 윤리를 회통시키면서 다른 언어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시의 낱말로 실천한다. 그는 긍정의 현실주의자이다.  


계간 현대시학2016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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