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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리치 시집『문턱 너머 저편The Fact of a Doorframe』

독서

by POETIKA 2020. 3. 23.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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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너머 저편
국내도서
저자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 한지희역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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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의 스냅사진들

 

 

에이드리언 리치, 한지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이하 같은 책)

 

 

1.

 

당신은, 예전엔 적갈색 머리칼에, 복사꽃 뺨을 지닌,

슈리브포트의 숙녀였죠,

아직도 그 시절 유행했던 옷들을 입고,

쇼팽의 서곡을 듣는군요,

코르토는 이렇게 말했었죠, “아름다운 추억들이

향수처럼 기억을 따라 피어오르네.”

 

당신의 마음은 이제, 결혼식 케이크처럼 서서히 굳어져,

쓸데없는 경험으로 무겁고, 충만하기도 하죠,

의심으로, 소문으로, 환상으로도요,

그러다 단순한 사실의 칼날에

조각조각 부스러지죠. 당신 인생의 전성기에 말예요.

당신의 딸은, 화가 나 찡그린 표정으로,

찻숟갈을 닦으며 당신과다르게 성장하죠.

 

2.

 

싱크대에서 커피포트를 쿵쾅쿵쾅 씻을 때

그녀는 천사들이 꾸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낙엽이 쌓인 정원 너머로 비가 내릴 듯한 하늘을 내다본다.

참지 마, 그들이 이렇게 말한 지 이제 한 주가 지났을 뿐이다.

 

그다음 주엔, 만족하지 마

그다음엔, 스스로를 돌봐, 네가 다른 사람들을 구해줄 순 없어라고 말했다

때때로 그녀는 온수에 팔을 데기도 하고,

성냥불에 엄지손톱을 그슬리기도 하고,

양털처럼 구불구불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주전자 주둥이 위에 손을 대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아마도 천사들이겠지,

매일 아침 눈에 모래알이 들어가는 것 말고

더 이상 그녀를 해치는 것은 없으니까.

 

3.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그녀는 자신을 무로 있는 부리가 된다. 그리고

용수철 뚜껑 같은 자연은, 시간도덕을 담고

아직 쿨렁쿨렁한 그 납작한 트렁크에

이 모든 것을 채운다. 곰팡이 핀 오렌지빛 꽃,

여성용 약품들, 납작 누른 여우 머리와 난초곷 장식 밑으로

흉측하게 튀어나온 보디세아의 젖가슴.

 

잘생긴 여자 두 명이, 도도하고, 날카롭고, 미묘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나는 정교한 문양의 크리스털 그릇과 마욜리카 도자기 너머로

궁지에 몰린 분노의 여신들이 먹잇감을 놓고 고함치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들의 편견으로 가득 찬 언쟁, 내 등에 꽂힌 채 녹슨

그 오래된 모든 칼들을, 나는 당신들에게 들이댄다,

나와 닮은 자여, 나의 자매여

 

4.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선물은 순수한 열매가 아니라, 가시가 된다,

조롱을 약간 섞어 날카롭게 찌르는……

다리미에 열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잼이 끓고 거품이 이는 동안, 앰허스트의 식품 저장실에서,

또는, 때대로

강철 눈과 부리를 가진 새가 되려는 목적이라도 지닌 듯,

매일매일 이것저것 모든 것의 먼지를 털면서,

그 글귀를 읽는다, 내 삶은 서 있어요장전된 총처럼

 

5.

 

달콤하게 웃으며, 달콤하게 말하며,

그녀는 다리 면도를 한다

화석이 된 거대한 코끼리의 상아처럼 반질거릴 때까지.

 

7.

 

몇 사람만이 머무는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훼손될 수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우선 신화에 대한 책을 읽고,

카메라에 필름을 채우고,

칼날이 날카로운지 확인한 뒤,

나는 몸을 보호할 검은색 고무 잠수복

우스꽝스러운 물갈퀴

무겁고 불편해 보이는 잠수 마스크를 착용한다

민첩한 잠수 팀과 함께

햇살 가득한 배를 타고 다니는 쿠스토와 달리

난 여기서 홀로

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사다리가 있다.

배의 측면 가까운 곳에

무심하게 매달린

사다리는 항상 거기 있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 줄 안다,

그걸 사용했던 사람이 우리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말라비틀어진 선원의 밧줄에 불과하다,

그저 잡다한 여러 장비 중 하나일 뿐이다.

 

난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사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밟으며

조횽히 산소가 차오른다

푸른 불빛

우리 인간 세계의 대기를 구성하는

확실한 원소.

나는 계속 내려간다.

물갈퀴 때문에 절뚝거린다,

벌레처럼 사다리에 딱 붙어 기어간다,

거기엔 시작되는 지점을 알려주 사람이

아무도 없다.

 

공기는 처음에는 푸르스름하다가 그 뒤엔

더 퍼레지고 그 뒤엔 녹색으로 그 뒤엔 검은색으로

변한다, 난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강력한 잠수 마스크 덕에

피돌기가 재빨리 이루어졌다

바다는 전혀 딴 세계이다,

바다엔 권력의 문제가 없다

나는 홀로 배워야 한다,

무리하지 않게 내 몸을 바다 깊숙이

집어넣는 법을.

 

그리고 지금, 들쭉날쭉한 부채를 흔들거리는

산호 사이에,

항상 여기서 살아왔던

수많은 존재 속에 있고 보니

내가 여기 내려온 이유를

잊어버리기 쉽다

게다가

여기 이 밑에선 숨도 다르게 쉬어야 한다.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 왔다.

난 손전등에 불을 켜 비춰본다

물고기나 해초보다

더 영원한 어떤 것의

측면을 따라 천천히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잔해 그 자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 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익사자의 얼굴은 언제나 태양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훼손된 증거

소금에 절고 물결에 쓸려 너덜너덜해진 아름다움

참변을 당한 갈비뼈가

멈칫거리며 찾아드는 물고기 사이에서

그 주장을 굽히고 있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난 여기 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을 나부끼는 인어 아가씨,

갑옷같이 탄탄한 몸매를 뽐내는 인어 총각과

우리는 조용히 원을 그리며

난파선 주변을 돈다

우리는 배 밑으로 잠수를 한다.

나는 그녀다, 나는 그다

 

그 익사자는 눈을 뜬 채로 잠자고 있다

가슴엔 아직도 스트레스를 품고 있다

은빛, 구릿빛, 선홍빛 짐이

드럼통 밖으로 무심하게

반쯤 삐져나와 썩은 채 너울거린다

우린 반쯤 망가진 도구들이다

예전에 항해에 쓰였던

물먹은 나무

고장 난 나침판이다

 

우린, ,

소심해서 혹은 용감해서

여기에 다시 돌아오는 길을 찾는 사람이다,

칼 한 자루, 카메라 한 대,

우리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신화에 대한 책 한 권을 가지고.

 

 

1972.

 

 

 

 

북미 대륙의 시간

 

 

 

내 꿈이 어떤 통제 불능의 이미지도

경계선 너머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징표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길을 걸어가다 알게 되었다.

나의 주제가 스스로를 위해서 마름질되었다는 것을

적군이 사용할까 두려워

내가 무엇을 보고하지 않을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글로 써놓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받아들이든지 무시하든지

이것이 그 조건들이다.

시는 결코 역사 밖에

서 있던 적이 없었다.

예술을 초연한 것으로서 찬양하기 위해

또는 우리가 사랑하진 않았지만

죽이고 싶지도 않았던 자들을 고문하기 위해

이십 년 전 타자기로 쳤던 한 줄의 글귀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휘갈겨져 벽 위에서 번쩍거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변한다 하지만 우리의 언어는 그 자리에 서서

우리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글이 가진 특권이다

 

 

III

 

어느 조용한 여름밤

시골집 창가 옆에

탁자 위 타자기 앞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해보라

너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양

그저 상상만이 커다란 나방처럼,

[아무런] 계획도 없이

오락가락하는 양 노력해 보라

그저 너 자신에게

너의 종족의 삶에 대해

네가 사는 행성의 숨결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하려고 노력해 보라

 

 

IV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글이 책임을 지게 된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

또는 침묵하기로 선택하는 것.

또는 네가 결코 어떤 선택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 있는 단어들이

[대신]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글이 가진 특권이다

 

 

IV

 

가령 네가 글을 쓰고 싶다고 하자

다른 여자의 머리칼을

따주고 있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

길게 늘어뜨리거나, 구슬이나 조개껍질로 만든 장신구를 달아

세 가닥으로 땋던가 혹은 콘로형으로 하던가

너는 그 두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길이도 모양도

왜 그녀가 머리를 땋아주기로 결심했는지도

어떤 식으로 행해지는지도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지도

그곳에서 또 어떤 다른 일이 일어나는 지도

 

더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VI

 

시인이며, 자매여, 글은

우리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 나름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콜론타이가 추방되기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맬컴이

애너 매 아쿼시가, 살해되기 전에,

트레블링카가, 비르케나우가,

히로시마가 [사건을 당하기] 전에, 샤프빌이,

 

비아프라가, 방글라데시가, 보스턴이,

애틀랜타가, 소웨토가, 베이루트가, 아삼미

[사건을 당하기] 전에라고 그 얼굴, 그 장소의 이름들은

북미 대륙의 시간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추려져 삭제되었다

 

 

VII

 

나는 이런 생각하고 있다.

마치 사람들의 입에서 빵이 빼앗기듯

사람들의 입에서 말이 강탈된 나라

그곳에서 시인은 단지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피부색이 검어서 , 여자라서, 가난해서 가기도 한다.

나는 우리가 적어놓는 어떤 것이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시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곳에선 결코 맥락이 주어지지 않는다,

시를 위해서 적어도

난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VIII

 

가끔, 밤에 비행기를 타고

뉴욕 시 상공을 날아가는 동안

나는 이 빛과 어둠의 지대에

들어가도록 부름 받은,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어떤 사자使者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그것은] 비행하면서 떠오른 참 거창한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거창한 생각 아래

내가 씨름해야만 하는 [생각이]

비행기가 성난 듯 활주로에 내려앉은 후

오래된 집 계단을 올라가,

오래된 집 창문 앞에 앉으면

내 가슴을 무너뜨리고 날 침묵 앞에 복종시키는

그 생각이 떠오른다.

 

 

IX

 

북미 대륙에서 시간은 정체된 채,

단지 몇몇 북미 대륙인의 고통만을 해소해주며,

계속 고꾸라진다.

줄리아 데 부르고스가 이렇게 썼다.

내 할아버지가 노예였다는 사실이

슬픔을 준다. [하지만] 그가 노예주였더라면

그것은 내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북미 대륙에서,

일천-구백-팔십-삼이라는 연도에

문 위에 걸려 있다.

거의 완벽하게 둥근 달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변화에 대해 말하면서

브롱크스로부터, 할렘 강으로부터

쿼빈의 침수된 마을로부터

노략질당한 묘지로 부터

유독가스를 내뿜는 습지로부터 , []실험-지대로부터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말하기 시작한다 다시.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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