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
1971년 3월 23일. 에케하르트 루돌프Ekkehart Rudolph와의 슈투트가르트 남독방송(SDR Stuttgart) 인터뷰 중에서
루돌프: 어떤 비평가들은 당신이 당신 시구들의 내용을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수수께끼화한다는 비판을 했습니다.
바흐만: 내가 그것들을 수수께끼화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언어 자체에 이미 뭔가 수수께끼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시를 쓰거나 산문을 쓸 때는, 언어를 ‘이용하지’ 않거든요. 제 말은, 언어를 이용하는 일은 어쩌면 저널리즘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의견을 입 밖에 내고자하는 사람이나 하는 일입니다. 작가는 절대로 언어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 단어 하나를 달리 본다는 것이지요. 단어 하나 하나가 이미―사람이 보다 가까이서 바라볼수록 단어는 그만큼 멀리서 돌아보는데―아주 많은 수수께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럴 때 작가는 이미 발견된 언어, 즉 관용구(내지 상투어)는 이용할 수 없으며, 그것을 (글로)써부수어야zerschreiben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언어, 우리들 거의 대부분이 말하는 언어는 관용구들로 이루어진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많은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읽은 것이 말하자면 나한테는 진정으로 쓰여진 것인데, 이해하기 어렵거나 혹은 수수께끼처럼 비치는 것이지요.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한테는 종종 그러한 ‘이미 제조된’ 문장들로 이야기되는 것이 그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이 보입니다.
루돌프: 몇 마디로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특징지울 수 있겠습니까?
바흐만; 그것을 위한 단어가 내게는 없습니다. 나한테는 견해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견해Ansicht나 의견Meinung 속에는 ―그것이 신문을 통해서 나오든 혹은 술집 식탁에서 홀로 이루어지든―관용구(상투어)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데, 두말할 나위없이 전적으로 관용구가 지배적입니다. 작가에게는 ‘만들어야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말은, 작가는 관용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하든 혹은 ‘경제’ 혹은 ‘자본주의적’ 아니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든, 모든 단어를 작가는, ‘제시해보일’ 수 있기 위해서 자기 작품 속에서는 회피해야 합니다. 그런 단어들을 어떤 사람의 입에 올릴 수는 있지만, 작가 자신은 그렇게 쓸 수 없습니다. 나의 경우 그것은 금지된 사항이기 때문인데, 그런다면 더없이 쉬운 일이 될테고, 쉬운 것은 스스로에게 금해야 합니다.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관용구뿐이라면, 그때 작가들은 진정 사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된 문장을 말해야 한다』(Piper, 1983) 수록. 신교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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