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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 황현산 긍지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비평/도래할 책

by POETIKA 2021. 8. 1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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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 황현산 긍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행렬」 부분

기욤 아폴리네르, 행렬, 알코올, 황현산 옮김, 열린책들, 2010, p.92.

 

송승환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행렬Cortège은 첫 시집 알코올Alcools(1913)에서 시 변두리Zone와 함께 시인으로서의 시적 사유를 전개한 주요 시편이다. 시집 알코올에서 가장 늦게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시를 장식한 시 변두리는 세계 전체의 바깥, 변두리가 아폴리네르 자신의 시가 계시(啓示)되는 출발점임을 선언한다. 행렬은 아폴리네르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곧장 자신이 시인임을 선언한다.

어느 날 나는 내 자신을 기다렸다/나는 내게 말했다 기욤 이제 네가 올 시간이다라는 반복구 음악 속에서 탄생하는 시간, 기욤 자신이 시인으로서 탄생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 음악의 물결과 파고가 오고 가는 태초의 바다와 같은 시간 속에서 그는 해초에 덮인 거인들해저의 도시를 지나간다. 고대 땅 위에 수천 백인 미개부족들의 행렬까지 만난다. 그는 그들 속에 자신이 부재함을 자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도중에서 발명한 언어를/그들의 입이 전하는 대로 나는 배웠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는 시인의 긍지를 표명한다. 그것은 기욤의 언어가 고대 백인 미개부족들로부터 전승된 언어이며 저마다 손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말하는 시의 언어임을 천명한 것이다. 과거의 모든 언어들은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언어들은 기욤이 발화하는 현재의 언어 속에서 장미 한 송이의 시로 개화하는 것임을 예지로 인지한다. 그는 자신의 언어가 낡은 기독교의 언어가 아니라 다신교적 상상력에서 발원한 변두리언어임을 명시한다. 일상 언어에 갇혀있지 않은 바깥의 언어임을 표지한다. 바깥의 언어는 해저에서 바다 수면을 향해 솟아오르며 자라나는 산호(珊瑚)와 다르지 않다.

산호는 군체(群體)의 집적물이다. 저 해저에서부터 솟아오른 산호초(珊瑚礁). 그 촉수의 끝은 산호가 탄생한 시원(始原)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신체의 첨예한 지점이자 현재 시간의 첨단이다. 과거의 시간과 신체 없이 현재의 시간과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시간과 신체의 모든 물질 기억은 중단되거나 사라짐 없이 현재까지 지속된다. 산호의 촉수 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생성되고 축적된 시간과 물질의 전위(前衛)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기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진화한 인류라는 유()적 존재의 산호초, 그 촉수의 끝이다. 그것을 감각적으로 인지한 시인은 인류의 모든 시간과 물질 기억이 축적되어 발명된 언어를 배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지금 기욤은 시인의 긍지로서 그 언어의 발화자임을 선언한다.

현재의 나는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산호초 탑 하나를 세우듯 조금씩 조금씩 나를 쌓아 올리고 민족들이 쌓이고 내 자신이 나타난 결과이다. “모든 인간의 육체와 모든 인간사가 형성한 나이다. ‘라는 존재의 촉수는 인류의 시간과 물질 기억의 총체로서 현재까지의 첨단이다. 지금의 나는 인류가 겪은 실패의 경험조차 진화의 계기로 삼아 구축된 인류의 전위이다. 나는, 그 촉수 끝에 닿는 시간과 미정형의 물질과 만나서 구성될 ,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이자 미지의 존재이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모든 역량을 다 바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감행하는 생존 투쟁과 실존의 의미를 궁구한다. “나는 내 안에서 저 과거 전체가 커가는 것을 바라보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는 예지를 얻는다. 인류의 시간과 물질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거나 죽지 않고 내 신체의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는 것. 과거의 그 무엇도 죽지 않는다는 것. 다름 아닌 를 통해 인류의 시간과 존재가 지속되고 미래의 시간과 미지의 존재가 개시된다는 것. 탄생의 기원과 죽음 이후를 기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인류라는 물질 운동에 전적으로 의탁한다. 시인은 현재의 극단, 실존의 벼랑 끝에서 한 발 내딛는 바깥의 언어로 새로운 물질의 시간을 개시하는 전위이다. 시인은 인류에 대한 무한한 긍지를 발산하면서 스스로 전위적 존재의 탄생을 알레고리로 암시한다. 이상은 행렬에 관한 황현산의 강의에 기초한 것인데, 황현산은 무신론적 사유와 다신교적 상상력에 근거한 유물론자의 전위 행렬을 전개하고 초현실주의를 예고한 아폴리네르의 시적 위상을 자리매김한다.

시집 알코올의 번역가 황현산(1945.7.1.-2018.8.8.) 유고 비평집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난다, 2020)는 황현산 자신이 아폴리네르의 행렬을 지속시킨 긍지의 현실주의자이며 유물론자였음을 증명한다. 그는 현대시 산고를 연재하며 서문격으로 쓴 글에서 만해나 소월은 없어진 사람들이 아니며, 저 고인들의 역사를 제 역사로 여기지 않는 젊은이는 젊은이가 아니다. 시가 가르쳐준 바에 따르자면 그렇다고 썼는데, 그것이 유물론자 황현산의 겸허한 긍지를 예증한다.

현대시 산고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글은 번역과 관련된 시를 번역하는 일이다. 말라르메의 시집(문학과지성사, 2010)을 처음 한국어로 완역한 그는 그 글에서 자신은 다름 아닌 번역가이며 번역가의 일은 벌써 시인의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행렬의 아폴리네르처럼 선언한다. 황현산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의 자의성과 지시적 기능으로부터 벗어나서 보편적 언어의 순수 이념을 실현하려는 말라르메의 시, 그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yx 각운의 소네트번역 과정을 제시한다.

에드거 앨런 포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한순간도 우연이나 직관이라고 할 수 있는 때가 없었다는 것, 즉 작품이 수학 문제의 정확성과 엄밀한 귀결로 결말을 향해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갔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적시한 작시의 철학The Philosophy of Composition에 가장 충실한 제자 말라르메. 그는 yx 각운의 소네트에서 가장 치밀하고 적확한 언어로 지시적 의미 바깥의 의미 불확정 언어를 창조함과 동시에 그 의미를 암시한다. 말라르메는 포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추모시 에드거 앨런 포의 무덤Le Tombeau d’Edgar Poe까지 썼는데, yx 각운의 소네트는 포의 단편 소설 X투성이의 글X-ing a Paragraph과 시 갈까마귀The Raven와의 관계를 실증하지 않더라도 그 영향 관계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X투성이의 글은 식자공(植字工)X로 점철한 신문에서 의미의 지연과 불확정성을 기술한다. 갈까마귀는 애상조와 감정의 고조를 위해 영어의 모음(or)을 각운으로 적극 사용한다.

yx 각운의 소네트는 말라르메가 ‘yx, ix[iks]’‘or’, xor의 각운으로만 완성한 소네트이다. ‘줄마노onyx’, ‘불사조phénix’, ‘소라껍질ptyx(또는 작은 주름)’, ‘지옥의 강styx’, ‘수정nixe(또는 물의 요정)’, ‘붙박이다fixe라는 프랑스어의 희귀한 각운 ‘[iks]’가 한 편의 시에 집약된 놀라운 시이다. 특히, ‘ptyx’는 말라르메가 친구에게 프랑스어에 과연 존재하는가를 문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의미는 어떤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데, ‘소라껍질로도 작은 주름으로도 확정할 수 없다. ‘ptyx’는 의미의 미지수 x, 말라르메가 창안한 언어이다. 언어는 의미를 확정하는 순간 지시성을 획득하여 기존 의미에 수렴되고 만다. 말라르메는 의미 결정을 거부하고 지연하면서 영원히 새로운 의미의 생성 과정에 놓여있도록 ‘ptyx’를 배치한다. 그 이유로 한국어로의 번역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의 의미 확정조차 불가능하며 그 시도는 실패가 예정된 시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어의 ‘or’, 프랑스어 황금의 의미를 지녔기에 xor가 교차하는 각운은 미지수에서 황금의 의미까지 교차하는 음악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말라르메는 우연이나 직관을 거의 완전히 제거하고 각운의 음가(音價)가 낱말을 결정하도록 언어의 효과를 계산한 것이다. 시행의 배열은 앞부터가 아니라 각운의 뒤에서부터 구성되었음을 명백히 추론할 수 있다. 그 작법이 프랑스어의 비관습적 통사 구조의 문장을 발명하였다. 그리하여 말라르메에게 각운은 시 자체이다. yx 각운의 소네트는 어떤 의미로도 확정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무한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미지의 시이다. “음악이 전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도달해야 할 정점이라면 yx 각운의 소네트가 그 음악의 정점이다.

이상의 작시법과 시적 독해의 어려움을 전제하고 황현산은 세 번에 걸친 yx 각운의 소네트번역 과정과 한국어 통사 구조로의 번역 실패를 기술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시의 번역 불가능성이 그에 대한 번역의 필요성을 만들어낸다고 적는다. 그는 상투적 의미를 지시하는 언어의 발화 자체가 이미 실패임을 지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말라르메를 상기한다. 황현산은 말라르메처럼 자기 언어의 모든 상투적 성격을 누르고 한 시에 대한 대응능력만을 남기려는 번역가의 작업에 긍지를 표명한다. 실패해도 자기 언어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으로 보편적인 의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번역가로서의 긍지와 문학번역의 번역 가능성을 긍정한다.

그는 비단 말라르메의 시뿐만 아니라, 시대를 넘어서서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모든 시는 늘 그것이 기대고 있는 언어의 뿌리를 흔들어, 보편적 언어의 전망에서 일상적 의식의 전도를 시도했음을 기억한다. 그는 소월. 육사. 만해. 백석.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최하림. 박서원. 발레리. 아폴리네르의 시를 다시 읽는다. 이들은 모두 시대를 넘어서서한국어와 프랑스어의 일상적 언어와 의식을 전복하고 보편적 언어의 순수 이념을 시도한 시인들이다.

아폴리네르. 말라르메. 황현산.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없는 것은 없다.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지금, 있지 않은 황현산. 그가 번역하고 비평한 시인들.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

 

―『현대 비평』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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