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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주의자의 틈-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해설

비평/도래할 책

by POETIKA 2022. 9. 2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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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김기택 시인은 사물주의자이다. 그의 시에서 사물은 일상 세계의 도처에서 출현하며 일상의 삶 자체를 개진한다. 사물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삶의 사태에 참여한다. 인간의 삶은 사물과 함께 사물 안에서 사물을 통하여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은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사물은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 편재(偏在)한 것처럼 있지 않은 듯이 있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 이전에 현존하고 있음에도 사물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을 표명하기 전까지 부재한 듯싶다. 그것은 인간의 편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기원한다. 인간의 생활 세계에서 사물은 경제적 효율과 일정한 효용성의 기준에서 판단되고 분류된다. 즉각적인 쓸모와 경제적 이득이 없다면 어떤 사물은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사람과 함께 있지 않은 사물처럼 있게 된다. 사물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이 작동하고 의식의 빛이 비칠 때까지 사물은 ‘있지 않음의 있음’이라는 존재의 양식으로 있는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 감각의 바깥에 다만, 그 자리에, 그 자체로 미명 속에 있는다. 사람이 없는 집. 빈집. 사물로 가득한 집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다”, 의심 없이 말할 때의 ‘아무것도 없음’. ‘비어 있음’. 그것이 인간의 편에서 바라본 사물의 있음, 사물의 존재 양식이다. 
인간의 편에서 사물은 사물의 사태, 자체로 온전히 인식되지 않는다. 푸른 사과는 모두 다른 ‘푸른’ 사과인데, 푸름의 명도와 채도는 고려되지 않는다. 어떤 푸른 사과를 최초로 바라보려는 시도조차 없이 ‘푸름’의 차이가 제거된 푸른 사과. 단일한 이름으로 호명되고 인식된다. 푸름의 고유한 사태를 적확히 바라보지 않는다. 이미 축적된 푸름에 대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눈앞의 푸른 사과를 바라본다. 경험과 지식은 푸름의 고유성과 사과 고유의 맛과 질감과 형태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앎의 한계와 언어의 오류가 상존하고 있는 인간의 편견이다. 이것이 인간의 편에서 바라본 사물에 대한 익숙한 앎, 사물에 대한 인식 방식이다. 
여전히 우리가 눈앞의 푸른 사과를 익숙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푸른 사과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다. 푸른 사과를 최초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날것의 감각으로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마주 서기. 사물의 입장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기. 그것은 인간의 편이 아니라 사물의 편이다. 사물의 편은 인간의 고정관념으로 사물과 세계 바라보기를 정지시킨다. 사물의 편은 사물에 대한 판단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서 삶과 세계의 사태, 자체로 바라보는 시원(始原)의 자리를 마련한다. 사물의 편은 견고한 고정관념으로 인식한 삶의 가치와 사물에 대한 판단을 무화시킨다. 소외를 양산하는 ‘지금-여기’, 노동하는 삶과 쓸모 있는 사물을 다시, 최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본의 교환가치에 짓눌린 삶과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 너머 다른 삶과 다른 가치의 사물을 시원의 자리에서 탐색한다. 사물의 편에서 삶과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을 수행하고 다른 삶의 가치를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택 시인은 지금까지 사물에 의한, 사물을 위한, 사물의 편에서 올곧이 사물의 시를 써온 사물주의자이다.

다 열려 있지만 손과 발이 닿지 않은 곳
비와 걸레가 닿지 않는 곳
벽과 바닥 사이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곳
하루 종일 있지만 하루 종일 없는 곳
한낮에도 보이지 않는 곳
흐르지 않는 공기가 모서리 세워 박힌 곳
― 「구석」 부분

서시(序詩) 「구석」은 이번 시집 『낫이라는 칼』이 궁구하는 시적 공간을 표명한다.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은 평소 생활 세계에서 망각되고 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공간, ‘구석’에 의식의 빛을 밝힌다. 구석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존재하는 곳이지만 구석을 항상 상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구석은 사람과 함께 “하루 종일 있지만 하루 종일 없는 곳”이다. 열려 있음에도 닿지 않고 한낮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고 각진 모서리의 형태로 그곳에 있다. 구석은 ‘있지 않음의 있음’이라는 사물의 존재 양식처럼 있으면서 다른 사물들과 어둠에 가려진 곳이다. 부재의 현존으로 있는 사물들의 거처이다. 사람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 막다른 곳이다. 외지고 그늘지고 먼지와 벌레와 습기, 냄새와 곰팡이가 돋아나는 곳이다. 사람이 외면하는 곳이다. 그런데 아기는 구석을 탐색한다. 어른들과 달리 구석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없고 호기심 많은 아기에게 구석은 되려 “엄마가 없어도 튼튼하고 안전한 곳”이며 “온몸이 들어가도 넉넉한 곳”이다. 아기에게 구석은 “후벼”보고 “긁어”보고 “빨아”보고 싶은 공간이다.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는 모서리/구석에 숨어 있는 구석마다/콧구멍을 들이대고 킁킁거”(「털이 날리고 지저분해지기에」)리는 “몰티즈”처럼 아기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열정을 표출한다. 아기는 구석에 대한 판단 중지 속에서 구석의 가치를 최초로 발견한다. 아기에게 구석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온한 공간이다. 아기와 강아지 몰티즈는 사물의 편에서 구석을 발견하고 모서리와 만난다. 구석의 모서리에 있는 미명의 어둠과 미지의 존재와 만난다. 모서리는 공간의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의 끝이자 인간이 더 나아갈 수 없는 세계의 끝이다. 그러나 모서리는 인간들에게 세계의 끝일뿐 미지의 사물들에게 모서리는 세계의 시작이다. 사물들의 세계가 개시되는 구석이다. 

검은 덩어리가 뛰어 들어간 곳을 보니
골목길은커녕
주먹 하나 들어갈 공간도 없다
벽만 있다
그 벽의 균열 하나가
미처 감추지 못한 꼬리가 보일 것 같은
틈으로 쳐다보고 있다
전봇대에 발이 달려 있는 것 같은데
쳐다보면 없다
틈이 없는 것 같은 담 밑으로
털가죽 달린 쥐구멍이 들어가고 있다

심장이 제 박동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다고
가끔 지붕이 운다
맨홀이 운다
―「야생 2」 부분

「야생 2」는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이 갑자기 마주친 사태의 현장이다. 검은 덩어리는 정체를 분별할 수 없는 존재. 어떤 이름으로도 호명할 수 없는 생명체. 제목 ‘야생(野生)’이 환기하는 바와 같이 문명 바깥에 사는 어떤 생명체이다. 그것은 잠시 문명 세계로 들어왔다가 다시 야생의 터전으로 되돌아간다. 사태의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두려워하거나 무관심하게 지나간다. 그러나 사물주의자는 아기가 구석의 모서리를 탐색하듯이 사물의 편에서 “검은 덩어리가 뛰어 들어간 곳”을 추적한다. 골목길도 주먹 하나의 공간도 없는데 검은 덩어리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다만 막다른 ‘벽’만 있다. 벽. 문명 세계라는 가시적 세계의 끝. 사물주의자는 가시적 세계의 끝, 벽에서 “균열 하나”를 찾아낸다. 균열 하나에서 새어 나오는 빛. 야생의 비가시적 세계가 시작되는 ‘틈’을 어둠 속에서 발견한다. 그 틈으로 “털가죽 달린 쥐구멍이 들어가고” 있음을 목격한다. 틈 너머 보이지 않는 야생의 현존을 확인한다. 세계는 문명의 가시적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벽의 틈, 구석의 모서리 너머 야생의 생명과 비가시적 존재가 있음을 인식한다. 보이지 않는 야생의 생명과 사물들이 인간의 삶과 공존하고 있음을 계시한다. 사물주의자는 틈을 매개로 틈 너머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숨결과 움직임을 감각하고 교감한다. “화분”이 갑자기 꿈틀거리고 “보도블록이 물결”치는 사태의 배후에 들고양이 같은 야생의 생명체가 있음을 감각한다. “어둠에 빛이 새어 나온다 싶더니/빛구멍 뚫린 눈알”임을 인지한다. “가끔 지붕”이 울고 “가끔 뒤통수”가 우는 것을 듣는다. 맨홀과 발밑의 울음을 듣는 감각적 예지자(叡智者). 사물주의자가 틈을 통해 틈 너머 야생의 존재와 비가시적 세계의 사물들을 감각하고 교감하는 일은 강아지가 후각을 통해 감지하는 냄새와 감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콧구멍으로 이어진 모든 길을 거칠게 휘젓는 냄새에
코가 꿰어 끌려들어간다
수천수만의 코와 꼬리가 뛰어다닐 것 같은 곳으로
이름과 표정과 살아온 내력과 가계와 전생까지
한 냄새로 다 투시하는 코들이 있을 것 같은 곳으로
냄새를 향해 뻗어 내려간 뿌리들의 끝이 보일 것 같은 곳으로
네 발바닥 질질 끌리며 끌려들어간다

냄새는 점점 커지고 사나워진다
좁은 틈으로 수축했다가 동굴처럼 늘어나는 기다란 구멍이
벌름거리는 콧구멍을 삼키고
콧구멍에 매달린 머리통과 몸통까지 다 삼켜버릴 기세다
―「강아지는 산책을 좋아한다」 부분

강아지는 후각을 통해 냄새의 진원지를 탐색하고 진원지에 남아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현전(現傳)을 밝힌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고유한 냄새를 감각하고 그 장소에 미지의 존재가 있거나 있었음을 밝힌다. “좁은 틈으로 수축했다가 동굴처럼 늘어나는 기다란 구멍”의 냄새 속으로 “코가 꿰어 끌려들어” 가서 “이름과 표정과 살아온 내력과 가계와 전생까지/한 냄새로 다 투시하는 코”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분별한다. 근대 도시의 삶에 적응하면서 퇴화된 인간의 코가 지니지 못한 투시력이다. 그 점에서 구석을 “후벼”보고 “긁어”보고 “빨아”보는 아기의 촉각과 미각, 강아지의 후각이 사물의 편에서 틈 너머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감지하는 사물주의자의 감각적 특징이라면 근대 도시인의 시각은 빛의 영역에서 보이는 것만 감지하는 인간의 감각적 특징이다. 빛이 없다면 인간의 시각은 어둠 속에서 미지의 존재를 감각할 수 없다. 빛이 있더라도 벽의 장막이 있다면 어떤 사물도 볼 수 없다. 근대적 삶의 시각 중심주의 감각은 틈 너머 야생의 삶, 비가시적 세계가 현전(現前)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김기택 시인은 사물주의자의 감각으로 틈 너머 야생의 삶과 비가시적 세계의 있음을 투시한다. 아기와 강아지와 들고양이의 감각으로 틈 너머 비가시적 존재를 일상적으로 지각한다. 이상 사물주의자의 감각이 스며있는 1부의 시편들은 시집 『낫이라는 칼』에서 틈의 ‘존재와 시간’을 전개하기 위한 시적 사유의 초석이다. 

똑똑 눈이 땅바닥을 두드린다
팔에서 길게 뻗어 나온 눈이 땅을 두드린다
땅속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 듯이
곧 문을 활짝 열고 누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는 듯이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이 걷는다
한 걸음 나아가기 전까지는
거대한 어둠 덩어리이고 높은 벽이고 아득한 낭떠러지이다가
눈이 닿는 순간
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더듬이처럼 돋아난 눈은 멀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을 허공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아갈 방향 말고는 어느 곳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눈이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본다

어쩌다 지나가는 다리를 건드리거나
벽이나 전봇대와 닿으면
가늘고 말랑말랑한 더듬이 눈은 급히 움츠러든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된다
허리가 잔뜩 줄어들었다가 쭉 펴지며 늘어난다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
한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간다
―「눈먼 사람」 전문

「눈먼 사람」은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이 건축한 틈의 시학이다. 틈 너머의 세계가 구석의 모서리와 시각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는 예지의 눈빛이 서려 있다. 틈 너머의 세계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고 일상의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의 틈에서 펼쳐진다. 사물주의자는 도시의 거리에서 ‘눈먼 사람’과 그의 지팡이를 마주친다. 라이너 쿤체(Reiner Kunze)는 “사물을 짚어”보고 “인식하기 위하여” 시를 “시인의 맹인 지팡이”(「시학POETIK」)로 바라보는데 김기택은 땅바닥에 닿는 순간에만 확보되는 지팡이의 작은 한 점 시야를 ‘눈眼’으로 바라본다. 지팡이에 대한 판단 중지 속에서 지팡이를 눈먼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투시의 혜안을 얻는다. 지팡이가 눈먼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순간은 일상의 흐름 사이에 틈이 발생한 시간이다. 틈의 시간은 도시의 벽들 “경계와 틈”(벽 2」) 사이에 다른 시간이 틈입한 순간이며 죽음도 “가끔 찰나의 틈을 통해 기웃거리”(「부음」)는 순간이다. 퇴근길 “저녁 7시 거리”에서 “몸 없는 숨이 혼자 걷는 순간”(「겨를」)이다. 사물주의자가 “안 보이는 구석이나 틈”(「깜빡했어요」)의 순간을 일상에서 목격할 때 시집 『낫이라는 칼』의 사물들은 모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사물주의자는 사물이 존재 양태를 드러내는 소리를 듣는다. “굴러가는 둥근 면에서/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나오”(「연필」)는 순간을 목격하고 “연필 속에서 광물성 내장 터지는 소리”를 듣는다. “똑똑”. 지팡이의 눈이 짚어낸 소리의 질감과 촉감의 깊이를 지각한다. “팔과 손가락과 지팡이에서 돋아난 눈”으로 세계의 “거대한 어둠덩어리”와 “높은 벽”과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늠한다. 
「눈먼 사람」에서 주목할 점은 눈먼 사람과 지팡이가 삶의 실천으로서 보여주는 앎의 윤리적 태도와 공손한 주체이다. 소포클레스의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단번에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고 미래를 예언하지만 거리의 눈먼 사람은 “눈이 닿는 순간/단 한 발자국만 열리는 길을” 걷는다. 눈먼 사람은 지팡이의 “눈이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만을” 바라본다. 지팡이의 작은 한 점 시야가 밝히고 “땅이 열어준 길에서 한 걸음이 생겨날 때까지” “눈은 공손하게 기다”린다. 공손한 기다림. 몸가짐과 언행을 삼가고 맡은바 직분을 다하는 삶의 윤리. 지팡이의 “눈이 닿은 자리, 오직 눈이 만진 자리”가 밝힌 “한 걸음”의 앎만을 인지하고 “한 걸음”을 정확히 실천하는 겸손함. 나는 무엇을 아는가, 항상 되묻는 성찰적 주체의 눈. 한 걸음 나아간 지팡이가 뒤이어 따라오는 눈먼 사람의 한 걸음을 기다리는 공손함과 예의. 이것은 이성적 주체의 앎이 소수자에게 자행한 일상적이며 역사적인 사건들을 우리에게 다시 환기한다. 눈뜬 사람으로서 사물의 이면과 눈먼 사람의 현존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눈먼 사람임을 알레고리로 암시한다. 

타이어는 이빨과 발톱을 등과 무릎처럼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
다른 비둘기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비둘기가 어서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렸다.
―「비둘기에 대한 예의」 부분

로드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로에서 먹이를 부리로 쪼고 있는 비둘기. 사물주의자는 비둘기가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린다. 비둘기의 “성실한 노숙을 방해할 권리”, 자동차 타이어로 비둘기를 밟고 지나갈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지 않”음을 성찰한다. 비둘기의 생명과 눈먼 사람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나온 공손한 기다림과 예의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그 물음과 성찰에서 발원한 사물주의자의 예지는 시집 『낫이라는 칼』에서 빈번히 ‘∼것 같다’로 표현된다.

이 문장에는
한때 이 글자들을 읽었던 모든 눈들이 보일 것 같다.
―「죽은 눈으로 책 읽기」 부분

종일 의자는 비어 있어서 
공기에 엉덩이가 생길 것 같다.
―「공원의 의자」 부분

사물주의자는 사물에 대한 시적 인식을 정언(定言) 단문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것 같다’라는 추측의 완곡어법으로 독자 스스로 시인이 투시한 예지의 눈빛에 감응할 수 있도록 공손하게 기다린다. 공손한 기다림의 시간은 다름 아닌 틈의 시간이다. 시인과 독자와 눈먼 사람과 지팡이가 순간 합일하는 시간이다. “눈이 두드린 길이 몸속으로 들어”오고 “온몸이 눈이 되고 길”이 되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틈의 존재들, “무시와 무관심”(「노숙존자」) 속에서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존재하는 소수자와 사물이 현현하고, 틈의 시간 속에서 하나됨을 경험하는 시적 순간이다. 틈의 시간은 영원히 지속되는 완전한 구원의 시간이 아니다. 틈의 시간은 사물주의자가 사물의 편에서 공손한 기다림과 예의를 갖추고 바라보는 순간에만 열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물시편에서 사물의 현상에 대한 주관적 묘사를 통해 사물의 배후에 산재하는 삶의 신비와 사물의 이면을 투시하면서 삶의 완전한 구원을 향한 시적 주체의 기도(祈禱)를 드린다면,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은 틈의 시간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소수자와 사물들의 현존을 드러내고 찰나에 도달하는 미분적(微分的) 구원과 합일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이는 시집 『낫이라는 칼』에 배어 있는 틈의 시학의 고유한 미적 윤리이다. 무라노 시로오(村野四郞)가 「가을의 개秋の犬」에서 사물의 특징을 즉물적 묘사로 표현하고 사물의 즉물성을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로 동일시하는 사물시와도 다른 점이다. 
사물주의자는 틈의 시간을 통해 투시한다. 계단 내리막길 앞 전동 휠체어의 장애인(「오지 않은 슬픔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관절통 앓는 노인(「위장」), 무단 횡단 할머니(「무단 횡단 2」), 실직자(「실직자 2」), 노숙자(「노숙존자」), 병실 환자(「5인실」) 같은 2부의 소수자, 「돋보기안경」과 「첫 흰 머리카락」, 「유기견」과 「공원의 의자」 같은 3부의 사물들은 미분적 구원과 합일의 순간에 시적 대상이 아니라 시적 주체로서 현현한다.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아서, 아무도 말 붙이려는 사람이 없어서, 저절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게 된다.
―「노숙존자」 부분

종일 앉아 있으면서도
앉을 자리가 비어 있다.
바람이 와서 앉아도
햇빛이 와서 앉아도 비어 있다.
―「공원의 의자」 부분

사물주의자는 목격자의 시선을 견지하고 시적 주체로 현현한 소수자와 사물 자체를 더욱 강조할 때 구두점 있는 사물시를 양식화한다. 구두점을 사용한 사물시는 존재에 대한 판단 중지 속에서 물성에 대한 경이로운 직관과 예지의 광경을 포착하고 미적 거리를 유지한다. 목소리의 몫이 없는 소수자와 사물의 편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목소리가 스스로 말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기다린다. 이것은 시적 인식의 완곡어법과 함께 공손한 주체의 미적 윤리가 고려된 섬세한 시적 사유의 표현이다.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라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낫」 전문

사물주의자가 틈의 시간 속에서 사물을 최초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낫’의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존재로 나타난다. 낫은 곡식과 나무와 풀을 베는 농기구이다. 베거나 썰거나 깎는 칼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낫은 근본적으로 생명을 해치는 사물이다. “푸르고 둥근 줄기/핏줄 다발이 올라가는 목”을 쳐왔던 낫의 역사가 있다. 낫은 생명을 죽이는 칼의 본성을 기억하고 스스로 성찰한다. 생명의 “뜨겁고/물컹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웅크리”는 자세를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낫은 칼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생명을 해친다. 낫은 자신의 역사를 반성하고 “찌르지 못하는/뭉툭한 등”을 내보이면서도 “심장이 있는/안쪽으로 날이 휘어지”는 본성을 직시한다. 「눈먼 사람」이 앎의 윤리적 태도와 공손한 주체의 기다림을 형상화한다면 「낫」은 자신의 본성이 지닌 폭력성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윤리적 주체를 형상화한다. 낫은 낫, 칼은 칼이라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균열의 틈에서 낫 역시 칼처럼 생명을 해치는 사물임을 투시한다. 시집에 수록되지 않고 시집의 표제가 된 『낫이라는 칼』은 낫이라는 사물이 감추고 있는 본성을 스스로 기억하고 반성하지 않을 때 낫도 칼이 되듯이 인간인 우리도 언제든 폭력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낫의 알레고리를 드러낸다. 틈의 시간에 사물들이 고정관념으로부터 풀려나오는 순간이다.
소수자가 ‘지금-여기’, 현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사물들이 제 목소리의 몫을 발화하면서 미분적 구원을 경험하는 틈의 시간은 순간이다. 틈의 시간은 눈먼 사람의 지팡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 열린다. 지팡이가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 닫힌다. 지팡이의 눈이 밝힌 한 점 빛의 시간은 짧고 지팡이가 허공에 들어 올린 어둠의 시간은 길다. 자본의 교환 가치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는 일상의 밤이다. 소외된 노동과 일상의 습관이 반복되는 밤이다. 일상의 “습관은 여기저기 뚫린 구멍들을 빠르게 꿰매고”(「또 재채기 세 번」) “습관이 가는 대로”(「사무원 기택 씨의 하루」) 반복되는 일상은 사람의 피부와 사물의 표면에 주름을 새겨놓는다. 

한 번 주름이 생기면 다시 펴지지 않는 셔츠와 바지를 닮아서
이마주름, 눈주름, 입주름, 목주름도 선명해진다.
―「사무원 기택 씨의 하루」 부분

습관이 만든 주름이 있다.
주름 사이에서 몰래 자라오다가
지금 막 들킨 것 같은 손금이 있다
―「가죽 장갑」 부분

주름은 접기와 펼치기의 반복된 결과로서 피부와 표면에 새겨진 시간의 결이다. 일상의 삶은 행동과 심리의 습관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습관이 만든 주름”이며 주름의 시간이다. 일상의 습관이 굳어지고 신체와 사물이 노화될수록 주름의 골은 깊고 융기는 높다. 주름의 시간을 살아낸 피부와 표면에는 사람의 생애와 사물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틈의 시간이 닫히고 주름의 시간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은 ‘사무원 기택 씨’와 마주 선다. 사물주의자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사무원 기택 씨를 들여다본다. “흰 머리카락 한 올이 검은 올 사이에 삐죽 나와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들 사이에 처음 와서 몹시 당황”(「첫 흰 머리카락」)한 사무원 기택 씨의 표정을 남의 일처럼 묘사한다. 어느새 선명한 “이마주름, 눈주름, 입주름, 목주름”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늙음과 마주 선다. “관절이 내지르는 비명을 입으로 쏟아내며 노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슬쩍 곁눈질하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찰나”(「위장」)와 마주치는데, 그것은 도래할 죽음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는 찰나이다. 
노인의 “마모되어 표정 없는 얼굴”(「노인이 된다는 것」)과 “고요하게 관절을 접은 다리들”(「치킨고로케」)의 비명에서 늙음과 죽음을 성찰한다. 늙음과 함께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 눈만 겨우 남은 외로움”(「부음」)과 임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부음」) 죽음을 사유한다. 죽음 이후에 남겨져서 “숨 막힘을 숨”(「유족」) 쉬는 유족을 바라본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다리가 접혀 있다는 듯/제 무게와 살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일인용 소파」) 노인 같은 소파와 내 주름을 닮은 가죽 장갑의 손금을 본다. 늙음과 마주치기 전까지 인지하지 못한 죽음과 주름의 시간을 응시한다. 늙음과 죽음 역시 구석의 모서리와 틈의 사물들처럼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항상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있는 존재의 양태임을 성찰한다. 이는 시집 2부와 3부 시편들 배후를 지배하는 주름의 시간이며 틈의 시간이 일상의 밤을 통과하도록 설계한 김기택 시인의 시적 의도이다. 그것은 “몹시 슬프지만/슬퍼할 기운이 골수에서 빠져나가고”(「노인이 된다는 것」) 있다는 비애와 유머의 파토스를 자아낸다. 

어머, 냄비가 넘치고 있어요, 아니, 그 사람이
제멋대로 넘쳐, 탁자 바닥이, 잠깐만,
넘치는 물부터 잠글게요
―「깜빡했어요」 부분

너어―에서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가 허파가 폭발하기 직전에, 무!
목구멍 진동이 사타구니를 거쳐 발가락까지 돌아서 나오도록 너어― 무
―「너무」 부분

사물주의자는 늙어가는 사무원 기택 씨에 대한 희화화와 언어유희에서 비애와 유머의 익살을 이끌어낸다. 기억력 저하 증세를 보이는 자신에 대한 희화화와 부사어 ‘너무’를 강조하면서 의미의 틈을 벌리는 언어유희의 유머는 늙음의 슬픔을 조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유머는 사무원 기택 씨가 눈먼 사람처럼 “몸 안으로 들어온 길만큼/한평생의 체중이 실린 또 한 걸음이 나아”가도록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유머는 「눈먼 사람」이 건축한 틈의 시학을 완성하는 삶의 윤리이다. 주름의 시간. 노동과 일상의 습관이 반복되는 밤의 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공손한 주체의 태도. 늙고 눈먼 육체의 유한성과 죽어감을 경험하면서도 슬픔에 침잠하지 않는 긍정의 현실주의.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의 시적 윤리. 그것은 김종삼의 「물통」 연장선에서 “우물과 집 사이/돌이 많기도 많았던 비탈길.” “작은 바지 어린 고무신을 적시며” “커다란 물통 하나”(「물 긷기」) 묵묵히 물을 길어오는 사물주의자의 예의. 김기택 시인의 고유한 시의 ‘물통’으로 “다름 아닌 인간”(「물통」)에게 생명수가 되려는 시의 윤리이다. 그리하여 4부에 배치된 자연시편들(「물방울이 맺혀 있는 동안」, 「꽃 지고 난 후의 연두」, 「개나리 울타리」)은 자연에 대한 예사로운 찬탄에서 피워 올린 시가 아니다. 주름의 시간을 뚫고 열린 찰나의 틈의 시간에 풀이 흙덩이의 어둠에서 여린 숨을 퍼 올린 생명의 진경(眞境)이다. 시 「매몰지」는 틈의 시학이 완성한 생명의 진경이다. 시집 『낫이라는 칼』은 생명과 사물의 미분적 구원의 순간을 공손히 기다리는 사물주의자 김기택 시인의 진경산수이다. 

풀이 땅에 구멍을 뚫고 있다
땅속에 숨통을 심고 있다

수백 개의 콧구멍이 흙덩이 숨을 들이쉬다가 멈춰 있는 곳 놀란 순간이 떨어지고 있는 흙으로 덮인 채 눈 뜨고 있는 곳 뒤틀리는 살덩어리와 흙 먹은 비명이 막힌 숨을 뚫고 나가려다 굳어 있는 곳 필사적인 꿈틀거림이 두꺼운 살갗에 숨구멍을 뚫다가 부러져 있는 곳 다 썩지 못한 가죽과 팔다리가 검은 핏물과 악취 가스가 되어 땅속을 발버둥으로 긁어대는 곳 한 삽 흙을 뜨면 두개골과 다리뼈가 뿌리처럼 우두둑 뜯겨 나올 것 같은 곳 봄이 되면 땅속을 긁는 발톱들 때문에 땅거죽에 소름이 돋는 곳 바람도 부스럼이 생겨 가려운 등을 나무와 바위에 비벼대는 곳 진저리 치는 뿌리가 맹렬하게 말라 죽어가는 곳

풀이 썩은 어둠에 푸른 파이프를 박고
여린 숨을 퍼 올리고 있다
―「매몰지」 전문


                                                                                                                                                             2022년 9월 27일 출간.

2023년 대산문학상 수상시집.

                                                                                                                                                                  200자 원고지 7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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