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베로스 개의 세 개의 머리의 이름을 불러 말을 시켜봅시다.
그 세 입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난해함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입은 겉멋 부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의미의 빈곤이라고 합니다.
— 폴 발레리
송 승 환
“나는 고독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발레리를 읽었다. 나는 내 기다림이 끝이 난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 릴케는, 당대의 발레리에게 매우 소중한 독자였다. 릴케는, 발레리의 장시(長詩) 「젊은 빠르끄」와 시집 『매혹』이 지닌 중요성을 깨닫고 「해변의 묘지」를 비롯한 발레리의 시 17편을 수년에 걸쳐 독일어로 번역할 만큼 발레리의 열렬한 독자였다. 영혼과 세계의 내면적 공간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던 릴케는 발레리의 시를 만남으로써 발레리가 자신에게 불러일으킬 영향력과 구원의 길을 예감했던 것이다. 릴케는 발레리를 통해 후기시인 『두이노의 비가』로 가는 길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레리의 시적 가치를 알아보는 릴케와 같은 소수 독자는 존재 자체가 내뿜는 상처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한 편의 시를 통해 감행한다. 소수 독자는 발레리의 시처럼 엄격하고도 명석한 정신의 모험을 극단적으로 감행하는 시를 언제나 기다린다. 케르베로스 개의 세 입이 말하듯 다수 독자가 난해하고 겉멋 부리고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한 편의 시에 대해서 소수 독자는, 지금 바로 독해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영혼에 끼칠 영향력을 섬세하게 예감하고 그 한 편의 시 앞에서 서성이고 기다린다. 어느 날 읽은 한 편의 시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휘어잡아 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던 시적 체험을 소수 독자는 잊지 않고 있다.
소수 독자는 한 편의 시를 성급하게 소비하지 않고 한 편의 시를 천천히 살아낸다. 반복해서 읽을수록 조금씩 다른 맛으로 혀를 적시는 시의 즙을 음미한다. 그는 단번에 읽히는 시의 언어에 대해 오히려 의문을 품는다. 그는 즉각적인 이해와 소통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경계한다. 지금 바로 이해되고 소통되기를 바라는 언어는 언어가 지닌 지시적 기능으로 굳어버린 죽은 언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정보 전달이라는 도구적 기능만 수행할 뿐인 언어와 신파를 유발하는 감상적 언어로 쓰어진 시는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역시 그는 잘 알고 있다. 언어를 질료로 삼아 빚어내야 하는 시는, 언어의 도구성과 감상성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언어 자체에 대한 탐구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소수 독자는 무엇보다도 인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의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늘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라고 새긴 발레리의 묘비명의 함의를 소수 독자는 기억한다. 우리에게 매번 깨달음을 주는 시는, 무엇보다도 언어 자체에 대한 정밀하고 엄격한 탐구를 거친 낱말들을 거느리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다. 즉각적인 자기 상처의 위안과 망각을 유도하는 신파와 동정의 언어와 거리를 두는 소수 독자는, 정신의 고양과 깊은 자기 성찰을 매개하는 낯설고 난해한 언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관습적이며 고정된 의미만을 양산하는 소통 방식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시의 언어가 지닌 낯설음과 난해함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는 낯섦과 난해함을 통해 다양한 사유와 감각의 길을 열어주는 시적 체험을 하고 자신의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의 소통 방식을 배우려 한다.
그리하여 소수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시의 내용이 아니다. 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터져나오는 상처의 빛을 껴안고 타자에게 연민의 뜻으로 연대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소수 독자는,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정신의 모험과 구원의 길을 이미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상처와 초월, 고독과 그리움 등으로 분류되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시의 내용은,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 그에게 절박한 것은 정신의 모험과 구원의 길을 떠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의 형식이며 그 언어가 탐구해낸 고유한 낱말 사전이다. 그는 한 편의 시가 내장하고 있는 고유한 낱말 운용법을 그 사전을 통해 학습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초극하고 절대 정신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터득하려 한다. 그에게 시의 내용은 형식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이 일으킨 결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시의 내용을 읽어내고 그 주제를 분류하는 것에 한정한다면 그에게 시는, 산문에 불과할 것이다. 시는, 낱말들이 서로 부딪치고 녹아들고 일렁이고 하나의 공명이 되어 낱말들이 지닌 본래의 뜻을 잃고 서로의 의미를 지우면서 음악이 되어 리듬을 창출하고 완전히 새로운 뜻을 지닌 낱말을 창조하는 언어의 형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언어 속의 또 하나의 언어이며 동시에 언어 밖의 또 하나의 언어이다.
자신의 언어 탐구를 감행한 릴케뿐만이 아니라 발레리 역시 말라르메의 소수 독자였다. 발레리는 말라르메의 소수 독자가 각 도시에 한 명씩은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골과 파리를 전전하며 30년간 영어 교사를 한 말라르메 또한 보들레르의 소수 독자였다.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자신의 시집을 “거대한 소수에게 바침”이라는 헌사를 썼듯이 시와 예술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와 같은 거대한 소수 독자가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거대한 소수 독자의 출현을 잉태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그들의 시는 각자의 고유 사전을 만들어서 자신의 절대적인 언어 탐구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인 순간의 언어를 토해내고 있다. 이준규의 「하얀 방」과 최하연의 「 • • 」은 자신이 만든 고유한 언어 사전의 한 페이지를 각각 보여준다.
화요일이다 수요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월요일일지도 하얀 문이 있는 방에 오래 있었다 창이 있는 방이었는데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버즘나무와 은행나무가 보였고 그 위로 구름이 있는 하늘이 보였다 복도로 가끔 사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때론 매미소리가 들리고 때론 눈이 내렸다 가끔 겁먹은 소음이 들려왔다 하얀 문이 있는 하얀 방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하얀 방이었다 언젠가 그는 하얀 방이 있는 하얀 문을 나가기로 결심하며 결심이란 단어는 우습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뭐랄까 아무튼에 속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영역 같은 단어는 참 이상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얀 문을 겁쟁이답게 단호하게 열어젖혔고 문지방을 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끔찍한 흰 빛을 느꼈다 다시 하얀 문을 과감히 닫으려다가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꽤 비겁한 생각에 그의 나이에 걸맞은 안색을 지어보려 애쓰며 안색이란 고색창연한 단어를 나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듯한 흔들리는 표정도 잠시 인간적인 매력도 더하기 위해 지어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 흰 빛은 나의 등장을 축하하는 조명이거나 친구들의 깜짝 파티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세상에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때까지의 엄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해냈고 동시에 엄혹하다는 단어를 생각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할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실소라는 단어를 왜 난데없이 생각했는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역시 이 하얀 방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보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래도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문을 천천히 그리고 힘없이 닫았다 어디선가 귀뚜라미소리가 들렸고 발가락 너머로 개미와 거미가 사이좋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음번에는 아무리 무서운 흰 빛을 만나더라도 문을 열고 나가 다른 문을 만나리라고 단호히 결심했고 이번 결심은 진짜라고 돌이킬 수 없다고 느꼈다 창밖으로 노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얀 방은 초록 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에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물론 궁금하지 않았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노란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고 커피를 다 마셨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그는 자연스럽게 하얀 문을 열고 나가 물을 끓이고 커피 잔에 커피를 넣고 끓인 물을 부은 후 작은 숟가락으로 잘 저으며 나는 왜 숟가락이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빨리 하얀 방으로 들어가서 하얀 방을 나오는 장면을 전쟁 전날 밤의 왕의 서재 같은 분위기를 가진 다른 방에 우뚝 서서 검은 창밖의 엉킨 지평을 응시하는 왕의 재떨이 같은 기분으로 상상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느라고 커피를 조금 흘렸고 조금 흘러 바닥에 흐른 커피를 걸레로 닦았다 닦으며 그는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싶었으나 그 생각은 그에게 금지된 것이었다 그는 다시 문을 열고 하얀 방으로 들어가며 어쩌면 정말로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노란 빗방울을 묻히고 있는 버즘나무와 은행나무의 징그러운 모습을 감상하며 심심하니까 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울었다 눈물엔 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얀 문을 열고 문지방을 지나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 이준규의 「하얀 방」 전문(『현대문학』, 2007년 12월)
이준규는 첫 시집 『흑백』을 통해 세상의 모든 시를 지우고 자신이 세상의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는 이준규의 선언이 실현되기 위한 출발선은 세상의 모든 시를 지우는 일에서부터 그어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가 부정되는 자리에서 “세상의 모든 시”가 새롭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시집 『흑백』의 연장선에서 「문」 연작을 쓰고 있는 이준규에게 「하얀 방」이 지닌 의미가 무엇이며 “하얀 문”의 상징성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얀 방」은 언어의 지시적 기능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준규는 일상 생활과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지닌 실용성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무용(無用)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끝없이 중얼거리면서 요일과 생각과 낱말과 문장을 교란시킨다. 「하얀 방」의 진정한 가치는, 각각의 낱말이 지닌 지시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석하기 보다는 낭독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장의 리듬과 지시적 의미가 휘발되어 지워진 낱말들이 창조하는, 유용함의 세계 내의 무용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는데 있다. 이준규의 「하얀 방」은 세상의 모든 시와 언어의 문법과 도구성을 완전히 지워버린 무용함의 세계에서 백지의 언어로 자신이 처음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것이다.
서로 두 걸음이다 한 뼘이다, 잰 걸음으로 고양이보다 빠르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무와 멀어지는 만큼, 신호등의 꼬리가 짧아지는 만큼, 경찰관의 수신호와는 반대로 핸들을 꺾고 싶은 만큼, 경찰관의 수신호와는 반대로 핸들을 꺾고 싶은 만큼, 서로 두 걸음이다 한 뼘이다, 달에서 빌딩의 모서리까지, 주머니 속의 꽁초가, 보조개 속의 칼날이, 브래지어 속의 호치키스가 한 뼘이다, 태초의 우주가, 이교도의 머리를 따낸 칼자루가, 바람의 시체를 챙겨가는 바람이 서로 두 걸음이다 한 뼘이다, 화장터 굴뚝이, 뼈를 빻는 절굿공이가 한 뼘이다
― 최하연의 「 • • 」 전문(시집 『피아노』, 2007년 11월)
최하연의 첫 시집 『피아노』는 한 편의 시가 영감이나 감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낱말들의 의식적인 분절과 결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시집이다. 최하연의 언어는 메타포와 상징의 언어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며 단순한 언어의 지시적 기능조차도 거부한다. 그의 언어는 “모든 뒷면들마다 입 맞추며 먼 강의 물속으로 가라앉(「무반주계절의 마지막 악장」)”으면서 그 언어의 뒷면에 새겨진 언어와 그 의미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 중층적인 언어 사전을 간행한다.
시집 『피아노』에서 「 • • 」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다소 드러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 •”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는다는 것은 이준규의 「하얀 방」의 경우처럼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최하연의 「 • • 」 또한 이준규의 「하얀 방」처럼 낭독하는 순간 발생하는 리듬의 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에 대한 명명(命名)은 이어지는 다음 명명에 의해 부정되거나 부연되기를 반복한다. 곧 “• •”에 대한 하나의 명명은 지워져야 할 명명이고 지워진 명명 뒤에 또 다른 명명이 무한히 이어지는 명명이다. 하나의 명명이 부정되고 부연되는 방식의 반복과 변주는 낱말들의 뜻을 지우고 리듬이 출렁거리게 한다.
이준규의 「하얀 방」이 낱말들의 의미를 지우기 위해 끝없이 중얼거리는 방식이라면 최하연의 「 • • 」는 「 • • 」이 지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끝없이 명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준규의 의미 생성을 위한 유용한 언어의 무의미화와 최하연의 의미 생성을 위한 언어의 무한(無限) 명명 행위의 시작(詩作)은, 유한(有限)의 언어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더불어 「하얀 방」과 「 • • 」는 어디서든 끝맺어도 되고 동시에 끝없이 이어져도 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이준규와 최하연은 언어의 무(無)와 무한(無限)이라는 양극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언어 탐구의 방식을 취하지만 그 언어 탐구의 내부는 동일한 지향점을 품고 있다. 그 지향점은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며 끝없이 언어를 지우고 매번 다르게 고쳐 부르면서 명명해야 하는 이름, “하얀 방”이면서 “• •”인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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