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규의 시
송승환
한 편의 시가 표출하는 정서는 그 자체를 목표로 삼은 시인의 의도를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정서 표출로 만족하지 않는다. 시인의 정서 표출은 시가 나아가는 출발점일 뿐이다. 시는 오히려 정서 절제를 시인에게 주문하고 독자의 내면에서 정서를 폭발시킬 수 있는 언어를 요구한다. 시는 시인의 정서 표출보다 독자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효과를 더욱 요구한다. 시인은 시가 언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언어의 운동체임을 자각한다. 기하학적인 엄밀한 정신으로 한 단어와 한 음절이 파생시킬 정서의 파동 범위와 시적 인식의 깊이를 계산한다.
절제된 언어의 외피 아래에 고도로 집중된 언어의 뇌관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시적 언술을 통해 내장된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뇌관은 독자의 내면에서 시인이 의도한 필연적인 폭발 뿐만 아니라 각각의 독자가 지니고 있는 체험과 연쇄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우연한 파급 효과까지 발생시킨다. 어떤 시인은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의 효과가 미칠 파장의 필연 너머 발생하는 우연까지도 고려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사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새로운 시적 인식을 언어에 새김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우연한 파급 효과를 배제하지 못하는 언어의 필연적 효과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과 사물과 사물이 맺는 인과관계의 사슬을 부수고 사물의 이면을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세계 인식의 확장과 심화를 돕는다.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사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제시하는 고유한 언술 방식은, 시의 한 줄기로 뻗어나가 이른바 ‘발견의 시학’에 이른다.
발견의 시학과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시의 줄기들 중에 이른바 ‘명명의 시학’이 있다. 발견의 시학과 그 출발점이 유사하면서도 명명의 시학은,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품고 있는 사물의 이름을 완전히 지우고 사물 자체를 바라보려는 의지로서 사물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물의 새로운 명명은 사물의 관습적 의미를 품고 있는 이름을 괄호치고 이름의 최초 의미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서려있다.
태초의 사물에 대한 명명은 신이 창조한 사물 자체이며 사물의 본질을 품고 있는 이름으로서 언어의 창조적 전능 행위를 의미한다. 태초의 말씀으로 사물이 탄생하고 사물의 이름이 명명되는 과정 속에 언어의 창조성이 발현된 것이다. 신의 언어로 명명된 이름은 사물의 본질과 동일한 것으로서 최초의 올바른 이름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말씀을 통해 창조된 사물의 이름과 그 이름을 뜻하는 사물을 인간의 언어로 인식하기 위해 명명한다. 사물을 창조한 신의 언어와 달리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속성을 본떠서 사물의 이름을 명명한다. 인간의 언어로 명명된 사물의 이름은 사물과 닮았지만 사물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며 사물과 무관하다.
인간은 사물의 속성을 닮은 이름으로 명명하는 과정에서 과잉의 언어와 과소의 언어로 사물을 모방하는 오류 또한 범함으로써 이름의 기원조차 알 수 없는 국면을 초래한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과 무관하게 사회적 합의로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고 유통시킴으로써 언어가 사물과 맺는 모방의 연관성마저 끊고 언어를 단순히 전달하고 지시하는 기능을 가진 기호로 전락시킨다. 기호는 언어가 지닌 창조적 정신과 사물의 본질이 훼손되면서 추상화되고 인습적 의미로 타락한 과정의 산물이다. 명명의 시학은 언어의 타락에 대한 성찰과 전달 가능한 언어만을 인정하려는 인간 언어에 대한 저항의 의지로서 탄생한 것이다.
이은규의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은 명명의 시학을 품고 태어난 작품이다. “유목”을 “떠도는 피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피가 흐른다는 것”을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으로 인식한 그녀는, 이름의 사전적 정의를 거부하고 이은규의 명명으로 고유한 언어 사전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떠가는 구름
오늘의 문장은 흐르는 정물들에 관한 이야기
물방울이나 얼음입자가 모여 하늘에 떠 있는 것으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사전 속 구름에 대한 정의는
종종 눈물점을 자극하기도 하는데
한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사전에
흐르는 정물들에 대한 정의를 기록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물방울이나 얼음입자가 모여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말한다
어제의 구름과
절기와 헤어진 꽃과 꽃잎들
혹은 부르는 순간 시간이 되어버리는 어느 호칭
흐르는 정물들이 보이다, 안 보이다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는 사람
드디어 구름의 이슬점과 눈물점이 응결고도에 오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예감하지 않겠다는 선언
두 손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떠가는 구름을 가둬본다
보이다와 안 보이다 사이를 흐르는 정물
다시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게 될까
구름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문장, 한 점
― 「구름의 프레임」 전문(2009년 『시작』 겨울)
「구름의 프레임」은 명명의 시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진화한 이은규 시의 정점을 보여준다. 구름의 사전적 정의는 공기 중의 수분이 팽창한 결과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이 되어 떠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은규가 명명한 구름은, “흐르는 정물들”에 관한 총칭으로 재정의된다. 흐르는 정물들로 재정의된 “구름”은, 가시적인 구름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구름도 의미한다.
이은규의 비가시적인 구름은 “어제의 구름”과 “절기와 헤어진 꽃과 꽃잎들”과 “부르는 순간 시간이 되어버리는 어느 호칭”이며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열된 비가시적인 구름은, 소멸되어 사라지고 흘러가고 떠나간 것들이라는 공통적 특질을 드러낸다. 비가시적인 구름의 공통적 특질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시간을 현전화시킬 수 없다는 시인의 인식과 그리움을 발생시킨다. 흘러가서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은 시인의 내면에서 “눈물점”을 자극한다. 비가 되어 사라져버릴 구름의 “이슬점”은 응결고도에 오른다. 눈물점과 이슬점은 눈에 보이는 구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로 전이되는 접점이며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발생하고 눈물이 맺히는 응결점이다. 가시적인 사물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프레임(frame)이 무너지고 흩어지고 사라져서 “흐르는 정물”로 기화되는 지점이다.
프레임은 사물의 뼈대와 틀을 가리킨다. 사물과 사물을 구분하고 사물의 윤곽을 나타내는 액자 기능을 한다. 두 손으로 만든 프레임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구름을 명명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의미한다. 그러나 구름이 흩어지고 흘러가서 보이지 않는 사물로 변할 때 인간의 언어는 비가시적인 사물을 명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노출한다. 보이지 않는 사물은 인간의 언어로 명명할 수 없는 사물이며 “구름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문장, 한 점”으로서 시인이 명명해야만 하는 언어이다. 시인은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사물을 명명하는 순간 실패한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명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절망한다. 시인은 가시적인 구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계에서 인간 언어의 한계를 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가시적인 사물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사물에 대한 명명 의지를 지우지 못한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명명 의지를 갖고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는 사람”인 까닭이다. 시인의 포기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명명 의지는 “다시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게 될까”라는 물음으로 표명된다.
명명의 시학, 그 내부에는 인간의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한계를 응시하는 시선이 있다. 사물의 새로운 명명은 인간의 언어를 신뢰하지 못하고 사물 자체를 바라보려는 태도를 품고 있다. 인간의 언어에 대해 회의하고 사물 자체의 자명성을 의심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물음을 표명한다.
시인의 물음은 마땅하다고 여기는 모든 사물의 이름과 사물 자체로 향한다. 시인은 별이라는 사물의 이름과 별이라는 사물 자체의 자명성에 대해 묻는다. 왜 저것을 별이라고 부르는가. 별이라고 불리는 저것은 무엇인가. 물음은 자명하다고 믿는 의미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킨다. 분명하다고 믿어온 사물의 이름과 사물의 정의가 분명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시인은 물음을 통해 인간의 공동체 밖에 있는 사물의 다른 이름과 사물의 다른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의미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물 자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인간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물은 인간의 언어로 밝혀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인간의 특정 공동체 소속으로서 인간의 다양한 언어 가운데 말할 수 있는 언어로 사물을 명명하고 호명하면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물의 다른 이름과 사물의 다른 정의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공동체 내부에서 명명된 사물의 이름과 사물의 자명성에 대해 회의하는 까닭에 물음을 멈출 수 없다. 거듭된 물음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행위와 같다. 두드림을 통해 사물의 본질 가운데 일부분이 인간의 공동체 내부로 드러난다. 시인은 사물을 두드리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 사물의 속성을 인간의 언어로 받아적고 명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물은 문을 열고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시인은 다시 두드린다. 시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전달할 수 없는 언어를 전달 가능한 언어로 번역한다. 이름 붙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사물을 번역한 인간의 언어, 그것이 곧 시다. 시는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 사물의 문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물음의 형식인 것이다.
사물에 대한 물음의 형식은 ‘~ 무엇인가’와 ‘~ 무엇일까’의 형태로 크게 나뉜다. ‘~ 무엇인가’와 ‘~ 무엇일까’는 사물의 본질을 묻는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물음의 형식이 나아가는 방향은 미묘하게 다르다. ‘~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나’를 포함하여 나와 너, 우리가 포함된 ‘공동체’와 공동체 ‘너머’를 향해 나아간다. 그 물음은 공동체에서 합의한 사물의 정의를 다시 확인하고 과연 지금도 올바른 명명인 것인지 점검하고 사물의 다른 명명은 무엇인가, 에 대한 탐구와 대안 모색의 성격을 지닌다. 이와 다르게 ‘~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 무엇인가’라는 물음처럼 공동체를 향하지 않고 물음을 던진 주체로 향한다. ‘~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사물의 자명성에 대해 회의하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고 사물을 거울로 삼아 성찰하는 주체의 고백적 언술을 담는다.
이은규의 시는 등단작 이래로 일관되게 물음의 형식을 자신의 고유한 언술 양식으로 삼아왔다. 그는 ‘~ 무엇인가’와 ‘~ 무엇일까’라는 물음의 형식 중에서 ‘~ 무엇일까’라는 물음의 형식을 통해 삶의 비애를 고백한다.
왜 가고 싶은 곳과 가야할 방향은
꼭 몇 뼘쯤 차이가 나는 걸까
― 「천(天)의 지평」 부분
모든 가설은 시적일 수밖에 없고
생은 어떻게 그 가설들로 추상을 견디길 요구할까
―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부분
어떤 제의(祭儀)가 그 아득한 대지를
다만 슬프지 않다고 강요할 수 있을까
― 「젖은 옷을 빌려 입고」 부분
이은규의 신작시는 삶의 비애를 고백하는 물음을 절제하고 사물의 자명성에 대해 더욱 회의하는 물음의 형식을 보여준다. 인간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물의 언어를 희구하는 물음의 형식을 내면화한다.
구름을 통과하지 못한 햇빛이
반사되어 흩어지던 시간
나무 꼭대기에 구름모자 걸릴 때 구름의 평균 수명은 정말 10분일까, 투명하게 웃는 잇몸일 때 마침 나무를 떠나고 있던 구름 한 점
평균 수명과 사라지는 시점은 일치하지 않는다
한 구름이 다른 구름이 되는 동안
보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그가 되는 시간
― 「구름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 부분
실존하고 있는 개체로서의 사물은 체계와 보편성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존재는 삶의 모순과 부조리조차 껴안으면서 단독자로서 지니는 삶의 특성을 유지한다. 들길에 떠 있는 구름은 어떤 인간적 의미가 있는 이유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은 다만 거기에 있으면서 세계와 함께 있다. 구름은 단독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면서 떠오르는 태양과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가만히 있는 돌과 어우러져 사물들의 풍경과 세계에 참여한다. 구름은 인간의 언어와 인간이 부여한 의미와 무관하게 있는 것이다.
구름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사물의 실재이다. 사물의 실재로서 구름은 비로 내려 사라질 수 있고 물방울과 얼음 결정이 조건만 충족된다면 언제든지 구름으로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은 가시적인 사물과 비가시적인 사물의 총칭이며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의 경계를 가리킨다.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를 넘나드는 구름은 각각의 실재로서 눈에 보이는 시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오가며 산다. “구름의 평균 수명은 정말 10분일까”라는 물음의 형식은, 사물의 자명성을 회의하는 시인의 시적 인식을 담고 있다.
전해 듣는 신의 말처럼 먼 문장이 있을까
누군가 들려주는 경전은
신의 전언이 아니라 읽는 이의 목소리일 뿐
― 「바람의 주파수를 찾다」 부분
시인은 구름을 통해 인간의 공동체 바깥, 가시적 세계 너머 비가시적 세계를 응시한다. 시인은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를 넘나드는 구름의 언어로 씌어지는 시를 갈망한다. 비가시적인 구름은 인간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물 자체이며 인간의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사물의 언어이다. 사물의 언어는 사물을 창조한 신의 말씀이다. “전해 듣는 신의 말처럼 먼 문장이 있을까”라는 물음은, 신의 말씀으로 씌어지는 시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간절히 희구하는 시인의 열망이 깃들어있다.
이은규의 시는 물음의 형식을 심화하고 견고한 명명의 시학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 물음의 형식은 이은규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하면서 열리지 않는 사물의 문을 두드리고 두드린다. 두드림은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명명할 수 없다는 절망과 실패의 검은 얼룩을 흰 종이에 남긴다. 한 점, 검은 얼룩은 “저 구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져있다. 나는 인간의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의 자명성을 회의하고 사물의 문을 두드리러 가는 이은규 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멈추지 않는 물음의 형식을 통해 그녀가 보여줄 사물 사전의 첫 페이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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