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승 환
붉은 제라늄이 화단에 피어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핀 붉은 제라늄이다. 시인의 시선 속으로 붉은 제라늄이 ‘갑자기’ 피어오른다. 시인은 붉은 제라늄을 바라본다. 붉은 제라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서 첫 언어가 피어오른다. 첫 언어를 받아 적는다. 그러나 첫 언어는 일상의 문법에 익숙하고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첫 언어를 지운다. 시인은 다시 붉은 제라늄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붉은 제라늄이 인간적인 정서와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추억과 비애, 상처와 위안의 언어를 받아 적는다. 그러나 인간적인 정서와 의미를 드러낸 언어는 붉은 제라늄을 향한 다가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의 완전한 물러섬이다. 인간적인 정서와 의미를 드러낸 언어에는 붉은 제라늄이 부재하다. 붉은 제라늄을 바라보게 된 계기는 인간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붉은 제라늄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언어를 지운다.
시인은 붉은 제라늄의 줄기와 꽃잎의 모양을 바라본다. 붉은 제라늄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식물도감과 백과사전을 찾아본다. 제라늄은 쥐손이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잎은 자루가 길고 심장 모양 원형이며 극히 얕게 패어 있는 것과 더불어 톱니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고 수술은 10개이며 암술은 1개로서 5실의 씨방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제라늄의 종류가 매우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붉은 제라늄의 모양과 속성을 사실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그러나 제라늄의 붉은 색에 대한 묘사는 무엇보다 불만족스럽다. 단지 “붉다”라는 언어로 제라늄의 붉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라늄의 붉은 색을 확인하기 위해 색상표를 찾아본다. 제라늄의 붉은 색과 완전히 일치하는 색상표 찾기는 쉽지 않다. 더 나아가 색상표의 코드로 명기된 붉음은 어떤 붉은 색의 언어로 호명할 것인가. “붉다”라는 언어를 색상표의 어떤 붉은 색에 대응시켜야 할 것인가. 색상표의 매우 다양한 붉은 색을 “붉다”라는 단 하나의 언어로 묘사한다는 것은 완전한 거짓으로 판명된다. 붉은 제라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재현의 언어는 부인할 수 없는 실패다. 가장 사실적인 재현의 언어에도 눈앞에 핀 붉은 제라늄은 부재하다.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재현하면서 확신한 세 번째 언어를 지운다.
시인은 제라늄에 관한 많은 정보도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인이 알고자 한 것은 제라늄 종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시인이 파악하려는 것은 갑자기 시선의 중심에 피어오른 화단의 붉은 제라늄이다. 붉은 제라늄이 문득 건넨 어떤 몸짓이며 어떤 말이다. 붉은 제라늄의 몸짓과 말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와 구별되는 사물의 언어이다. 사물의 언어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발생하는 서정성과 구별되는 사물 자체가 발생시키는 시적인 것이다. 붉은 제라늄의 몸짓과 말은 일상 언어의 문법과 인간적인 의미에 포섭되지 않고 사물 자체에서 흘러넘친 사물의 언어이다. 제라늄에 관한 많은 정보는 화단의 붉은 제라늄이 건넨 몸짓과 말을 해명하지 못한다. 눈앞에 피어오른 붉은 제라늄에 대한 앎은 여전히 극소량이다. 시인은 붉은 제라늄에 대한 앎을 모두 얻는다 하더라도 그 앎 자체는 붉은 제라늄의 몸짓과 말을 담아낸 시가 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시인은 화단에 있는 단 하나의 붉은 제라늄을 다시 바라본다. 이제 붉은 제라늄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을 단념한다. 붉은 제라늄이라는 사물은 붉은 제라늄이라는 이름에 완전히 부재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한다. 사물의 부재 속에서 시인은 모든 언어의 무능력을 체험한다. 모든 언어의 죽음과 모든 언어의 무(無)를 체험한다. 그 체험 속에서 시인은 모든 언어가 부정되는 사태를 목도하면서 글을 쓰는 존재가 된다. 붉은 제라늄에 대한 시를 쓰자마자 시는 죽음의 심연 속으로 침몰하는 언어가 된다. 태어나는 순간 죽어가는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 “흰 종이 위에 검은 자국으로 남을 글자들의 물리적인 얼룩”만 바라본다. 이제 붉은 제라늄이라는 이름도 지운다. 이름을 지운 사물을 이제 무엇으로 호명할 것인가. 스테판 말라르메는 “이것은 ……이다라는 말 자체”로 호명한다. 시인이 문득 바라본 붉은 제라늄의 몸짓과 말은 “이것은 ……이다라는 말 자체”의 신비이다. 말줄임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 자체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물의 언어이며 시인이 외면할 수 없는 시의 언어이며 발화하는 순간 소멸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사물은 모든 언어의 죽음과 모든 언어의 무능력을 체험하는 시인과 무관하게 거기에 있다. 모든 언어의 죽음에 대해 무심한 채로 사물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문득 사물은 “이것은 ……이다라는 말 자체”를 건넨다. 시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저 모호한 사물을 바라본다.
이것이 운명이다:마주 서 있는 것
그리고 오직 이뿐이다, 언제나 마주 서 있는 것.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신영배와 김언은 릴케가 마주 서서 바라본 사물들의 세계를 동시에 응시하면서 이전 시집의 언어보다 더욱 자기만의 언어를 서로 다른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진경을 펼친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창문을 열면
귀에서 귀로 냄새가 퍼졌다
그 발바닥을 보려면
얼굴을 바닥에 붙여야 하지
아무도 공중에 뜬 자국을 보지 못한 때
문자가 내려와 땅을 디디려는데
바람이 그것을 가져갔단 말이지
구더기처럼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 줄 남기고 다 버려 우리들의 문학 수업
시외로 가는 차량 근처에 너를 떼어버리고 오다
멀리멀리 가주렴 문장아, 내가 사랑했던 남자야
살갗 같았던 문장과 이별하고도
아름다운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나는
목만 끊었다 붙였다
태양 아래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내 그림자 길이만큼 땅을 판다
내 그림자를 종이에 싼다
내 그림자를 땅에 묻는다
내 그림자 무덤에 두 번의 절
그리고 추문
오늘 나는 그림자 없이 일어선다
흰 눈동자의 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완성할 즈음
내 발목을 잡는 검은 손
어제 장례를 치른 그림자가 덜컥 붙는다
발끝을 내려다봐
끊은 목 아래
꿈틀거리는 애벌레들
이별은 계속된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붙이고 붙인 살덩이를 끊고 끊어
차분히 내려놓을게
공중에 뜬 발바닥 아래로
다 내려놓을 테니 다 가져가란 말이지
― 신영배, 「발끝의 노래」 전문(『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
신영배의 「발끝의 노래」는 모든 언어의 죽음과 모든 언어의 무능력을 체험하고 사물과 다시 마주 선 시인의 육성을 들려준다. 그 육성은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열림원, 2006)보다 더욱 사물 자체에 밀착한 언어이며 사물의 언어로 시를 쓰려는 도전과 실패의 기록을 담고 있다.
신영배에게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사물과 그림자와의 관계로 비유된다.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발생되는 그림자는 사물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림자는 빛이 투과하지 못한 사물의 뒤편에서 빛이 통과하지 못한 만큼의 사물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림자의 길이와 모양은 사물의 외형을 닮았지만 오전과 오후, 그리고 저녁 즈음 태양의 위치에 따라 변한다. 빛의 각도에 따라 길이가 변하는 그림자는 사물의 외형을 닮았지만 동일한 사물의 실재를 왜곡한다. 육체에 달린 팔과 다리와 머리는 몸 속으로 숨길 수 없지만 육체의 그림자는 모두 포개어 숨길 수 있다. 「그림자라는 고도」(『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에서 “주머니 속으로/손을 넣는다/어깨가 들어간다/머리통이 들어간다/불룩하다”의 “주머니”는 곧 그림자이다. 육체의 부위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자는 “불룩”해야 한다. 그러나 육체의 모든 부위가 들어갔음에도 그림자는 평면으로 나타난다. 불룩한 사물의 고도를 평면으로 나타내고 사물의 외형을 변형하는 것은 그림자가 사물을 왜곡하는 방식이다. 평면의 그림자는 불룩한 사물의 실재와 불룩한 사물의 고도를 왜곡하는 언어이다. 그림자가 사물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언어 또한 사물을 왜곡한다.
왜곡되지 않는 사물의 실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시각은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자정이다. 모든 빛이 사라진 밤의 자정에 그림자는 죽는다. 그림자가 죽는 순간 사물은 순수한 사물 자체로 현존한다. 자정에 사물은 어둠 자체로 거기에 있는다. 자정은 사물이 그림자의 왜곡 없이 사물 자체의 실재를 어둠으로 드러내는 시각이며 사물을 왜곡하는 모든 언어의 죽음을 실현하는 시각이다. 자정은 사물이 그림자 없이 어둠 속에 홀로 거기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시각이다. 자정은 시인이 사물의 실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사물과 마주 서는 순간이며 모든 언어의 죽음 속에서 사물의 언어가 시의 언어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발끝의 노래」에서 모든 언어의 죽음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는 곧 시체다. 사물의 부재를 드러내는 언어, “문자”의 시체다. 언어의 시체는 사물들이 거기에 있는 지상과 분리되어 공중에 떠 있다. 그런 이유로 언어로 씌어진 “작품은 지상에 걸리지 않”(「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현대시』 2008년 5월)고 공중에 걸린다. 사물과 분리되어 공중에 걸린 언어의 시체는 썩는 냄새를 풍긴다. 썩는 냄새를 풍기는 언어의 시체는 태양이 떠 있는 낮의 시간 동안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는 언제나 모든 사물, “살덩이”의 발끝에 매달린다.
시인은 “사랑했던 남자”, 썩는 냄새를 풍기는 자신의 언어와 결별하고 사물 자체의 언어로 시를 쓰기 위해 그림자를 장례 치른다. 사물의 실재를 왜곡하는 그림자는 정오에 가장 짧고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각에 가장 길다. “그림자 길이만큼” 땅을 파고 시체 썩는 냄새가 배어나는 “그림자를 종이에 싼”다. 그리고 “그림자를 땅에 묻”는다. 그림자는 빛이 완전히 소멸하는 자정의 무덤 속에서 죽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완성할 즈음”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 언어와 결별하고 사물의 언어로 시를 완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는 죽지 않는다. 사물의 부재를 드러내고 사물과 분리되어 공중에 떠 있으면서 썩어가는 언어는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사물에 “덜컥” 붙고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의 발목을 끊고 끊을 때마다 썩어가는 언어의 시체 발끝에서 구더기와 애벌레가 꿈틀거린다. 사물 자체의 언어를 지향하는 시쓰기가 지속되는 한 시인의 그림자와의 “이별은 계속된”다.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 시인의 시쓰기 또한 계속된다.
시인의 시쓰기에서 마지막 시구는 신영배 시의 개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 내려놓을 테니 다 가져가란 말이지”는 시인의 언어에 대한 애증과 분노, 사물과 마주 선 시인의 절망과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 엉켜있는 시인의 복잡한 심경을 표출한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나’라는 시적 주체의 육성을 빌려 우화의 형식을 창조하고 ‘그림자’라는 주요 이미지를 빚는 지점에서 미묘한 서정이 흘러나오게 한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이다.”
1
자신의 이름에서 만족을 빼야겠지만
그러면 미안해지거나 우스워지겠지
게시판에 없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일원으로 살 건지 관찰자로 살 건지
고민하라고 말랑말랑한 혀를 두고 갔다
코가 몹시 피곤하다
나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2
그 새벽을 거니는 사람은 게이가 아니면
유령이 되어야겠지만
경음악과 춤밖에 없는 노래를 부르며
단어는 조금 더 외로워졌다
문장은 조금 더 상냥해졌다
불평이 없으니까
차례차례 늙어가는 햇빛을 요리하는 기분을 먹었다
저기 문이 떠내려온다
3
저기 지붕이 떠내려온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
나는 얌전히 어린아이를 추억하는 도시가 되어가는
자살자의 새로 발간된 철학을 오해한다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방황해야 한다”
미로를 없애면서 새로운 혼잡을 만드는
거리, 공원, 백화점, 호텔, 사무용 빌딩, 아파트와 상가
그리고 훨씬 많은 공장과 책을 읽어야 한다
4
행복한 지식이 별로 없다
배회하는 바위들의 제임스 조이스:
한 사람이 죽고 아파트 경비가 그 사실을 발견한다
그의 부친이 고향에서 달려오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다음날
아버지는 아직도 오고 있다
밤늦게까지
지하철과 버스가 시내를 돌아다닌다
5
둘이 만나는 순간은 없다
싫어하는 악기는 색소폰이지만
좋아하는 음악은 재즈에 가까운 것처럼
감정은 바다를 건너간다
사라진 엉덩이에 힘을 주고
누군가 벗어놓은 구두의 방향을 예측하고 고민하고
집에 돌아와서 액자를 떼어놓고 말하는
이 자리에는
6
벽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궁하고 딱하고 차가운 파스칼의 어린 시절:
7
a는 크고 b는 작다
c는 작고 d는 크다
어느 것이 가장 큰가
b와 c가 경합중이다
a와 d가 경합중이다
― 김언,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 전문(『문학동네』 2009년 여름)
김언은 두 번째 시집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을 통해 언어의 자명성에 대한 성찰과 함께 언어 자체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 바 있다. 그 중에서도 「판다」는 ‘판다’라는 단어에 배어있는 의미를 단순히 사전적 의미뿐만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의 얽힘과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의 행위와 표정까지 발견하고 읽어냄으로써 ‘판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장시킨 예이다.
김언의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은 『거인』에서 보여준 언어 탐구의 지속과 확장을 보여준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이라는 제목이 환기하는 바와 같이 김언은 떨어져 내리자마자 죽는 빗방울이라는 사물과 마주 선다. 빗방울은 비가 되어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리킨다.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면서도 모두 다르다. 비슷하면서도 모두 다른 존재들인 빗방울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빗방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모순이다. 김언의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각각의 빗방울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어야 할 터이지만 각각의 빗방울은 각자의 이름을 채 얻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 죽는다. 각각의 빗방울은 이름 없는 사물들이면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이며 동시에 빗방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되면서도 그 이름의 호명에 만족할 수 없는 사물들이다. 각각의 빗방울은 땅과 강과 바다에 떨어져 모두 이름 없이 죽고 빗방울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이름으로 죽는다. 그 죽음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수많은 빗방울들 중의 하나를 시적 주체로 내세운 ‘소설’은 ‘나’라는 시적 주체를 마치 소설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인 것처럼 중첩시키고 전이시킨다. 소설의 ‘나’는 이름 없는 하나의 빗방울로서 익명의 존재이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 없는 하나의 빗방울은 “자신의 이름에서 만족을 빼야겠”다면서도 만약 빗방울이라는 이름을 자신에게서 뺀다면 빗방울이라는 이름마저 지워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미안해지거나 우스워지겠지”라고 생각한다. “게시판에 없는 아이들”, 다른 빗방울들은 이름 없는 존재이지만 빗방울로 호명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에게 이름 없는 존재이면서 빗방울로 모두 호명되는 “일원으로 살 것인지 관찰자로 살 건지” 묻는다. 나는 그들과 달리 나의 이름에 대해 “코가 몹시 피곤”하도록 생각하지만 콧물 모양으로 맺히는 다른 빗방울들처럼 “나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눈에 띄지 않는 익명의 존재이므로 나는, 이름 있는 사회의 성적 소수자인 “게이 아니면” 이름 있는 사회에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다. 나는 빗방울이라는 언어로 명명되고 호명되지만 그 언어로 완전하게 명명될 수 없는 개별 존재이다. 나는 빗방울이라는 보편적 이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수한 존재이다. 나의 특수성을 호명할 고유한 이름은 부재하다. 빗방울이라는 이름 속에는 내가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와 부재를 증명하는 빗방울이라는 언어와 나는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자의적 관계이다. 빗방울이라는 언어는 이름 없는 사물인 나와 필연적 관계가 없다. 사물과 필연적 관계가 없으므로 “단어는 조금 더 외로워”지고 사물의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문장은 조금 더 상냥해”지고 “경음악과 춤밖에 없는 노래를 부르며” 언어 유희의 명랑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
하나의 개별 사물이면서 이름 없는 존재인 나는, 빗방울이라는 보편적 이름으로 불리면서 도시의 거리에 떨어져 물줄기를 이룬다. 이름 없는 존재이면서도 지니고 있던 나의 특수성은, 물줄기가 되는 순간 완전한 익명의 홍수 속에서 죽는다. 홍수를 이룬 물줄기에 “문이 떠내려”오고 “지붕이 떠내려온”다. 고유 주소를 부여받은 집의 건축물에 붙어있던 문과 지붕은 홍수 속에서 고유성을 상실하고 떠내려온다. 문과 지붕은 이름 없는 하나의 빗방울이 홍수의 물줄기 속에서 완전한 익명의 존재가 되는 것처럼 누구의 집에서 떠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물이 된다. 홍수에 떠내려온 문과 지붕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인 것이다.
홍수를 이룬 빗방울들은 도시의 거리를 배회한다.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는 것은 빗방울들만은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제10장 - 거리」는 ‘배회하는 바위들’이라는 에피소드로서 더블린 시의 여러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군소 인물들을 19개의 단편적인 장면 속에 동시에 묘사한다. 오후 3시라는 시각의 동시성을 배후에 둔 단편적인 장면의 모든 사건들은 『율리시스』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군소 인물들은 주로 사람들이 많은 더블린의 “거리, 공원, 백화점, 호텔, 사무용 빌딩, 아파트와 상가” 등 공공장소에 나타나서 잡담을 한다. 그들이 배회하는 이동 경로와 거리의 이름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덧 도시의 미로 속에 갇히고 만다. 군소 인물들은 더블린이라는 대도시의 미로에 갇혀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시민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각자 이름이 있지만 이름 없는 빗방울들이며 구별할 수 없는 물줄기 속의 빗방울들이며 홍수에 떠내려온 문과 지붕이며 존재하지만 유령처럼 존재하는 사물들이다. 그들은 홍수의 물줄기를 이룬 빗방울들처럼 도시의 미로를 배회한다.
그들의 죽음은 빗방울들의 죽음처럼 익명의 죽음인 까닭에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진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이지만 그들의 아버지 또한 다른 익명의 인물처럼 구별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미 익명의 홍수 속에서 죽었거나 이미 익명의 홍수와 함께 뒤섞인 장례식장을 찾지 못한다. “밤늦게까지/지하철과 버스가 시내를 돌아다”니지만 익명의 존재들과 구별되지 않는 아버지는 도시의 미로를 헤매며 “아직도 오고 있”다.
그리하여 “둘이 만나는 순간은 없”다. 특수한 사물과 특수한 사물의 이름이.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과 그 정체성을 드러낸 사람의 이름이 엄밀하게 “만나는 순간은 없”다. 빗방울이라는 이름은 각각의 빗방울을 호명하지 못한다. 빗방울이라는 이름에는 각각의 빗방울이 부재하다. 빗방울이라는 이름은 각각의 빗방울이 부재하는 허명(虛名)이며 각각의 빗방울 이름을 숨기는 익명(匿名)이다. 특수한 사물을 적확히 호명하는 엄밀한 언어가 필요하다. 사물이 거기 있음을 증명하는 엄밀한 언어가 있어야 한다. “액자를 떼어놓고 말하는/이 자리”에는 액자를 걸어둘 “벽”이 있어야 한다. 16세에 『원뿔곡선의 시론』를 발표한 파스칼의 정리(Pascal's theorem)처럼 기하학적 방법으로 각각의 사물이 각자 거기 있음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 언어는 사물이 부재하는 언어와 언어 사이에 “벽”을 치고 그 벽 안에서 사소하고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물과 엄밀하게 만나는 언어이다. 그 언어는 “궁하고 딱하고 차가운 파스칼”이 합리적인 추론의 과정을 통해 확립한 기하학적 언어이며 김언의 시가 추구하는 언어이다. 김언의 언어는 다음과 같이 묻고 추론한다.
a는 크고 b는 작다
c는 작고 d는 크다
어느 것이 가장 큰가
김언의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은 빗방울이라는 사물과 빗방울이라는 이름 사이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추론의 과정을 장(章)과 장(章) 사이의 여백에 담아 내보인다. 추론의 과정을 통해 그는 사물의 거기 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언어의 허명과 익명이라는 그림자를 증명하고 엄밀하고 합리적인 언어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김언의 개성적인 ‘나’라는 시적 주체는 그 추론의 과정을 여백의 침묵 속에 ‘소설’처럼 풀어놓는다. “이것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에 관한 김언의 소설)이다.”
“이것은 ……이다라는 말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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