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침묵의 점 - 황인찬의 시

비평/전체의 바깥

by POETIKA 2013. 3. 17. 03:34

본문

침묵의 점

― 황인찬의 시

송승환

 

김종삼의 시는 일상 세계의 모든 의미를 지우고 절대 침묵의 세계와 순결한 백지의 세계에 대한 추구와 실패를 보여준 바 있다. 그 언어는 절제된 산문체 묘사와 시제(時制)의 미묘한 운용을 통해 최초의 순수한 시간과 미(美)의 세계에 대한 희구와 실패를 그려낸다. 그 언어는 “萬有愛와도 絶緣된 나의 意味의 白書 위에 노니는 이미쥐”(「意味의 白書」)를 창조하는 시로서 씌어지면서 사라지는 백지의 아름다움과 침묵의 순수를 지향한다.

 

싱그러운 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 김종삼의 「풍경」 부분(『김종삼 전집』, 나남출판)

 

「풍경」에서처럼 김종삼 시의 산문체 묘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지워진 백지가 된다. 내가 싱그러운 나무들이 있는 언덕을 오르는 풍경은 과거 시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 끝에 도달하여 이미 죽은 존재이다. 그리하여 「풍경」은 죽은 자가 과거의 아름다운 풍경을 회상하는 작품이 된다. 검은 잉크로 씌어진 평화로운 낙원과 순결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현재 시점에서 모두 지워지고 시적 주체마저 사라져서 절대 침묵의 세계가 된다.

그런 점에서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한 황인찬의 시는 김종삼의 언어와 친화력을 내보이면서 그 언어의 계보를 새롭게 구축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황인찬의 시는 김종삼의 언어처럼 흰 종이에 쓰인 검은 잉크의 언어를 사라지게 하면서도 언어의 마지막 흔적을 침묵의 점(點)으로 그러모은다. 침묵의 점은 황인찬의 언어가 묘사하는 사물과 시공간을 응집시키고 동시에 분리시킨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전문(『현대문학』 2010년 6월호)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울림이 없는 방에서 서서히 빛의 윤곽을 드러내는 백자. 나는 그 방의 모든 빛을 빨아들일 듯 있는 하얗고 둥근 백자를 발견한다. 백자는 조명 없는 방의 어둠을 모두 사라지게 하고 방을 흰빛으로 가득 찬 환영의 공간으로 만든다. 황인찬의 간결하고 묘한 언어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삶에 대한 물음을 품고 나는 백자를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백자를 바라보는 동안 수많은 여름이 지나간다. 백자는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공간과 “수많은 여름”의 시간과 삶에 대한 물음을 모두 수렴하는 침묵의 점이다. 침묵의 점은 점점 커져서 검은 잉크의 언어를 모두 지우고 흰빛 종이를 가득 채운다. 실존의 성찰과 삶의 깊이를 심화시키는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모든 것은 여전”하고 물음은 삶에 대한 해명을 밝히지 못하지만 그 해명을 밝히려는 모색과 실천 속에서 삶의 방향과 궤적을 만든다. 백자는 보이지 않는 침묵의 점으로서 실재하는 실존이다. 백자의 침묵은 내 실존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제기하는 물음이자 대답이다. 백자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음이 제기되는 순간에만 현현한다. 백자를 바라보면서 품는 물음은 세계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세계의 소음을 정지시키면서 내 실존을 날것으로 세계에 드러내도록 한다.

나는 수많은 여름을 ‘백자’라고 부른다. 수많은 여름은 내가 실존과 대면하고 백자를 바라보던 시간이다. ‘여름’이 지나가자 “믿을 수 없는 일”로 “여전히 백자로 남아있는 그/마음”과 “나는 사라졌”다. 내가 백자를 바라보고 실존과 대면하던 여름은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무엇일까, 마주잡은 반쪽의 따뜻함은

 

갑자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내가 어둡다, 말하자

네가 It's dark, 말한다

― 「듀얼 타임」 부분(『현대문학』 2010년 6월호)

 

지금 나는 “반쪽”이다. 나의 “반쪽”은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언제나 온전한 내가 아니다. 나는 나이면서 언제나 반쪽이 결핍된 존재로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살고 있다. 두 개의 언어권에서 복수(複數)의 ‘나’로 살고 있다. 동일한 사물과 현상을 서로 다른 언어로 호명하면서 복수의 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내가 나의 반쪽을 마주잡고 하나가 될 때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나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빛 속에서 내 실존의 내면은 어둡다. 빛 속에서 복수의 나는 말한다. “내가 어둡다, 말하자/네가 It's dark, 말한”다. 두 언어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그 침묵의 점에서 내 실존이 시간과 공간과 함께 분리된다.

이와 같이 황인찬의 시는 실존의 완전한 합일의 불가능성을 시공간과 언어의 단절을 통해 생성된 침묵의 점으로 보여준다. 이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로의 회귀 불가능성을 시간의 단절을 통해 창조하는 김종삼 시의 완전한 침묵과 만나고 갈라지는 황인찬 시의 고유한 지점이다. 또한 동세대 신인들의 시가 보여주는 장황하고 화려한 산문체 언술 방식과 거리를 두고 간결한 언어와 단순한 형식의 언술 방식으로 시적 주체의 실존을 응시하는 그의 시쓰기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기원을 바라보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개종」, 『현대문학』 2010년 6월호) 묻는 황인찬의 실존에 대한 물음은 그의 시적 사유와 개성적 시세계를 구축하는 주요 중심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극소량의 공포를 느꼈다“(「독개구리」, 『시와반시』 2010년 가을호)와 같은 감상성 노출을 경계하고 고통스러운 실존의 숭고한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한계를 돌파하는 황인찬만의 언어를 기다린다.

 

『시와반시』 2011년 봄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