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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의 기술과 비평의 윤리― 황현산 비평집

비평/전체의 바깥

by POETIKA 2013. 3. 17.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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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의 기술과 비평의 윤리

― 황현산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

 

 

 

송승환

 

 

 

황현산의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은 무엇보다 시의 편에 서 있다. 그의 비평은 최초로 시가 촉발되는 순간에 발생한 언어의 감각과 시인의 시적 상태에 최대한 밀접하게 다가간다. 그의 비평은 시의 기저에서 숨쉬고 있는 사물과 사태를 응시하고 그 사물과 사태를 향해 시인이 목숨을 걸고 도약한 지점을 헤아리면서 시인이 도달한 사물의 이면과 미지(未知)의 사태 발견에 동참한다. 황현산의 비평은 시인의 언어가 발생한 기원과 내력의 심층을 탐사하고 현실의 층위에 자리잡도록 시적 논리를 부여함으로써 한 편의 시가 지니는 위상과 우리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의 비평은 관성의 앎과 주체의 질서 속으로 시를 편입시키기를 거부하고 언제나 타자와 미지로 향한다. “타자를 영접하는 주체만이 오직 그 미래에 들어간다. 타자가 되는 주체만이 미래로 쏟아지는 특별한 현재를 경험한다. 형태 없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에 끝나지 않는 이 현재를 우리는 시적 시간”(p.134)이라고 부를 때, 시적 시간을 체험한 비평가의 성찰이 주는 울림은 크다.

비평가로서 그가 체험한 ‘시적 시간’은 “주체를 자기 안에 있으면서 자기 밖에 있는 낯선 자로―동일자이면서 타자로―만”(p.23)드는 시간이며 비평가이면서 시의 편에 서서 시인의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을 목격한 시간이다. 그것은 랭보가 ‘투시자의 편지’에서 말한 바 있는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을 체험하고 “구리가 나팔이 되어 깨어”나듯 주체의 무화된 상태를 타자가 된 주체로서 자각하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황현산의 비평은 주체를 비움으로써 타자와 접촉하게 되는 순간에 확장되는 주체의 세계 인식과 육체의 한계를 깨닫는 주체의 반성을 적시한다.

그가 비평집의 서문에서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p.6)라고 말했을 때, 이는 시적 시간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이며 지금 이 시간의 말에서 저편에 있는 말로 도약한 순간을 내포한다. ‘지금-여기’에서 ‘미지-거기’로 도약하는 순간은 집중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집중의 기술은 주체와 타자를 가로막고 있는 막(膜)을 찢으면서 주체가 비워지고 타자가 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집중이 신비로운 힘을 얻어준다기보다 집중할 수 있는 계기 자체가 신비에 속한다. 시는 모순되는 것들의 경계를 뚫는 집중의 기술이다(p.182)”. 집중의 기술은 주체와 타자,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자연과 인공, 한국어와 외국어, 표준어와 토속적 방언 등의 모든 대립과 모순되는 것들의 경계를 뚫는 다.

그 집중의 기술은 그의 비평에서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지닌 의도와 성취를 말라르메의 비인칭 개념과 겹쳐서 읽을 때, 그리고 자주 한국의 시와 프랑스의 시를 비교하며 읽을 때, 어느 쪽에도 우위를 두지 않고 두 시인이 맞닥뜨린 시적 운명의 경계를 가로질러 시인의 운명과 시적인 것의 사유를 불러일으킬 때 발휘된다. 아울러 소월의 ‘자연’과 한용운의 ‘님’을 불러올 때, 문학사에서 자명한 것으로 자리매김된 시적 의미로 귀착하지 않고 시의 언어가 지닌 숨결의 맥락을 되짚는 읽기를 통해 실현된다. 그 독해를 통해 소월의 자연은 “민요적 자연이 아니”(p.252)며 “저 거룩한 님 앞에서 만해의 이별은 ‘어느 것들’의 조건이 다 파악되지 않는 자리에서 그리운 ‘어떤 것’을 말하고 내다보는 알레고리”(p.241)로 파악된다. 국문학자와 국문학을 전공한 비평가들이 수많은 이론과 오식(誤植)에 근거해서 이상(李箱)을 읽어낼 때, 비평가이자 불문학자 황현산은 그 오식을 바로잡고 최초의 발표지면에 근거한 텍스트 자체를 읽어냄으로써 식민지 청년으로서 “폐허에서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안에 웅크려들었”(p.283)던 이상의 지조를 눈앞에 내어보인다.

그의 비평이 집중의 기술을 통해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경계와 언어적 한계를 뚫고 순수 언어에 도달하려는 모험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보들레르와 베를렌, 아폴리네르와 말라르메의 시를 한국어로 옮긴 그의 ‘번역’과도 상통한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과 말라르메의 『시집』, 그중에서도 특히, 말라르메의 『시집』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그가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맺는 정식 계약이 아니라 이면 계약의 행간에 숨어 있는 순수 언어에 도달하려 한 것은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다. 말라르메는 언어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고 프랑스어의 일상적 의미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면서 극시 「에로디아드」에서 에로디아드와 유모의 대화, 독백의 모든 시행의 각운들을 2행씩 맞추고 장문(長文)의 한 문장들로 이어지는 시를 썼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의 조건과 언어의 한계를 인지하고 실패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성으로 도전할 수 있는 바를 끝까지 감행한 시인의 윤리이며 최초로 비행기를 만들고 이륙하는 순간의 아름다운 장경을 연출하는 발명가가 기하학적 엄밀성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술과 동일하다.

황현산의 비평은 언어의 모든 한계와 여전히 불완전한 한국어의 문법 조건 속에서 말라르메가 견지한 시인의 윤리를 똑같이 요구받고 프랑스어 낱말과 한국어 낱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순수 언어로 도약하는 집중의 기술과 기하학적 엄밀함을 체득한 번역 과정에서 비평의 개념과 비평의 윤리를 심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서문에서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p.7)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말라르메의 시를 번역함으로써 심화된 황현산 비평의 윤리에 되돌려주어도 무방하다. 보들레르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제한된 정신적·물질적 조건들을 한계에까지 밀어붙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설계하고 책임지며, 하늘을 비롯한 삼라만상과 정신적 유대가 심각하게 의혹을 받는 “지옥”의 삶을 자신의 창조적 공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긍지를 확보하려는 반항인”(p.111)이라고 평가할 때, 이는 그가 견지하는 비평의 윤리와 겹쳐진다.

그가 집중의 기술과 번역을 통해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를 마련할 때, 그 시적 시간은 과거와 기억 속에서 망각되고 있는 역사적 사건과 시적 의미를 현전화하고 ‘지금-여기’의 역사적 현실 속에 그 사건의 의미를 재구성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미래의 전망을 현재의 지평에서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현대 도시에서 위기에 처한 서정시를 어떻게 새로운 언어로 확립할 것인가’라는 보들레르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현실에 닿기 위해 어떤 길도 가로막지 않은 언어”(pp.74~75)를 탐색하도록 한다. 황현산의 비평이 한국의 젊은 시인들과 전위적인 시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표명하는 것은 그가 불문학자로서 지닌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현대적 삶의 일상적인 파국과 극단적인 것들의 상존을 항상 직시하면서 전망 없는 현실을 확인하고 현실 너머로 초극하려는 그의 비평의 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비평은 현대 도시라는 시공간의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고 무시간적인 자연과 반성이 필요 없는 주체의 말로 귀향하는 시뿐만 아니라 거짓 위안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근거 없는 삶의 낙관과 종교의 신비로 귀의하는 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현상과 본질 간의 직접적이고 내적이고 모순 없는 관계가 드러나는”(p.88) 상징을 통해 그 자체가 완전무결한 순수미를 구현하는 시의 편이 아니라 “두 대상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도 내적인 관계도 없”(p.88)는 알레고리의 파편들이 상존하는 현대시의 편에 서서 상징으로 구축되는 시의 신비와 삶의 환상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는 알레고리적 비평가다. 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p.86)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치적이다. 현대적 삶의 한쪽에서는 매순간 파국과 난관이 몰려와서 삶의 포기를 초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기루처럼 진보의 환영이 피어올라 근거 없는 삶의 환상을 심어줄 때, “알레고리적 비평가는 역사적 환상의 연쇄가 끊어지는 예외적인 순간에 과거의 마술환등을 변증법적 이미지로 바”(p.92)꾼다. 황현산의 비평이 여전히 현재형으로서 한국시가 씌어지는 현장과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알레고리적 비평가로서 일상적인 파국과 충격의 연속인 역사적 현실의 현재를 직시하고 집중의 기술을 내장한 시적 시간을 통해 현실을 초극하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비평의 윤리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긍지의 현실주의자이다.

 

 

『문학과사회』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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