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김용민 옮김, 책세상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 나는 무엇인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물여덟인데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카르파초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형편없고, <결혼>이라는 희곡을 썼지만, 잘못된 내용을 모호한 수법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를 썼다. 아아, 젊어서 쓴 시는 별로 대단치가 못하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시란 사람들이 말하듯 감정이 아니라 (감정은 이미 젊어서부터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사물을 보아야 하며 동물들을 알아야 한다.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자그마한 꽃들이 아침이면 만들어내는 몸짓을 알아야 한다. 낯선 지방의 길들과 예상치 못한 만남 그리고 오래 전부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던 이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아직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과,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 했으나 아이가 그것을 알지 못하여 부모가 마음 상한 일과 (다른 아이한테는 분명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아주 이상하게 시작되어 몇 번이나 매우 깊고 무겁게 변화해간 어린 날의 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고요하고 외진 방에서의 나날들과 바닷가에서 맞은 아침, 그리고 바다 그 자체, 이곳 저곳의 바다들, 하늘 높이 올라가 별과 함께 날아가버린 여행 중의 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하나하나가 각각 달랐던 사랑의 밤들에 대한 기억과 산고(産苦)의 외침 그리고 산후에 다시 몸을 닫고 가벼워져서 하얗게 잠든 산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어보아야 한다. 창문이 열려 있어 이따금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다란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추억 자체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 우리 몸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을 잃어버리고, 우리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아주 드물게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시들은 이와는 다르게 생겨났다. 그러니 시라고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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