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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칼날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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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TIKA 2014. 2. 2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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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들> 2012년 겨울호 머릿말

부러진 칼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리는 고구려의 제2대 왕이 되기 전에 아비 없는 아이로 자란다. 아비 없는 아이로 놀림을 당한 유리는 어머니께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어머니 예씨(禮氏)는 유리의 아버지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동명왕)이라고 답한다. 어머니는 유리에게 주몽이 남긴 수수께끼를 전한다.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둔 유물을 찾아오라는 주몽의 수수께끼. 유리는 유물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하다가 자신의 집 주춧돌과 소나무 아래에서 찾아낸다. 그 유물은 부러진 칼날. 유리는 부러진 칼날을 쥐고 주몽을 찾아간다. 주몽은 유리가 갖고 온 칼날과 자신의 칼자루를 맞춤으로써 한 자루의 칼을 완성한다. 한 자루의 칼이 완성되자 주몽은 유리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태자(太子)로 삼는다. 완성된 한 자루의 칼은 주몽과 유리가 부자(夫子) 관계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유리왕 설화는 상징의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 상징(symbol)의 어원은 그리스어 symballeim이다. 그것은 ‘조립하다’, ‘짜맞추다’, ‘함께 포괄한다’는 뜻이고 그 명사형은 symbolon인데, 이는 표상, 증표, 신표를 뜻한다. 즉 부러진 칼날은 아들 유리에 대한 증표이고 칼자루는 아버지 주몽에 대한 증표인데, 각각의 칼날과 칼자루는 한 자루의 칼로 완성될 때 부자 관계라는 상징을 획득한다. 그때 칼날과 칼자루는 아들과 아버지에 대응하는 각각의 은유이자 상징으로 수렴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상징은 칼날과 칼자루의 은유를 알레고리로 조립해내고 수직적으로 수렴하는 의미 체계를 구축한다.

전근대사회에서 상징은 비교적 잘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마을공동체와 봉건 국가는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신분질서 속에서 경쟁할 필요가 없는 직업들을 만들어냈는데, 그 각각의 직업들은 각각의 은유와 알레고리를 지니고 마을공동체와 국가의 상징적 의미 체계를 구축한다. 예를 들자면 칼과 낫과 책과 왕관은 백정과 농부와 선비와 국왕의 은유인데, 그 각각의 은유가 조립되어 완성되어 갈 때 그 은유들은 알레고리로 변모하며 상징의 부속물이 되고 최종적으로 왕관을 정점으로 한 상징을 완성한다. 그 상징 질서 속에서 국왕을 제외한 그들은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은 있었겠지만 ‘무엇으로 살 것인가’라는 직업에 대한 고민은 현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다. 백정의 아들은 백정으로, 국왕의 아들은 국왕으로 평생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근대의 예술가들이 ‘무엇을 쓰고 누구를 위해 노래할 것인가’라는 예술의 자율성을 고민하는 대신 예술을 후원하는 파트롱(patron)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예술의 타율성으로 작업한 것과 상응한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마을공동체와 신분제도를 기반으로 한 봉건 사회의 몰락은 상징의 의미 체계 또한 파괴했다. 붕괴된 마을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대도시에 모여들었다. 대도시에서 그들은 그동안 마을공동체에서 지녀온 삶의 알레고리적 의미를 상실하고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삶의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일종의 서로 다른 퍼즐 조각들로서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완성할 수 없는 개인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들은 신분제도로부터 벗어났지만 매번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삶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현대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매번 스스로 부여한 삶의 상징적 의미를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거나 이미 상실한 개인으로서 파편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끝없이 삶의 의미와 직업을 고민하고 있다. 예술가들 또한 왕과 귀족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무엇을 쓰고 누구를 위해 노래할 것인가’라는 예술의 자율성을 매순간 고민하고 있다.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그려진 퍼즐에서 비어있는 퍼즐 조각들. 어디에서 퍼즐 조각들을 찾아낼 것인가. 주몽을 찾지 못한 유리가 부러진 칼날을 들고 대도시의 한복판에 서 있다. 지금 칼자루 찾기를 포기할 것인가. 지금 맞춘 녹슨 칼자루에 만족할 것인가. 새로운 칼자루를 찾아 떠날 것인가. 다시 찾아낼 칼자루는 과연 원래의 칼자루인가. 새로운 칼자루는 사파이어가 박힌 칼자루인가. 아니면 나무로 된 칼자루인가. 우리에게 칼자루는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가.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는 저 많은 칼자루들 중에서 우리가 찾는 칼자루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칼자루 찾기를 포기하거나 곧 찾아낼 칼자루에 쉽게 만족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일이다. 그것은 삶의 윤리이자 문학의 윤리이며 끝까지 되물어야 할 문학의 자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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