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미당문학상 수상자인터뷰
계속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수상자: 황병승
인터뷰어: 송승환
송승환: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의 3부작’. <소송>, <성>, <실종자>의 주인공은 모두 갑작스러운 사건과 함께 등장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한다.<소송>의 은행원 K는 원인도 모른 채 소송에 휘말려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실패한다. <성>의 측량사 K는 성(城)을 눈앞에 두고 성의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다가 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고국에서 추방된 <실종자>의 K는 자본의 법칙 속에서 소외된 노동을 팔고 미국을 떠돌지만 미국에 정착하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서 K의 곁에는 아무도 없고 각각의 K는 모두 고독한 실존을 살아야 한다. K의 서사는 모두 실패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그 끝이 완결되지 않은 미완의 서사다.
내가 황병승의 미당문학상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의 3부작이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의 3부작의 서사가 내 문학의 동료이자 친구인 황병승의 메타포로 다시 읽혔기 때문일까. 2003년 어느 날, 한 통의 전화와 함께 들려온 당선소식은 누군가 그를 갑자기 시인이라고 호명하고 시(詩)의 소송에 휘말리게 한다. 시인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고 단지 시가 좋아서 시를 썼는데, 그는 시가 무엇이며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를 증명해야 했다. 그것은 불가능하며 실패가 예견되어 있었다. 그때는 그도 그것을 ‘체험으로’ 몰랐다. 누군가 시를 통해 현실적 삶의 욕망을 성취하는 동안 그는 다만, ‘시’에 도달하기 위해 시를 썼고 시에 가장 근접한 시인임을 보여주었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 그리고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시만 쓰는 삶을 지속하는 동안 그는 시도 삶도 사랑도 실패했다. 그것은 21세기 한국에서 예술가로서의 시인의 지위를 보여준 것이어서 아프게 아름답다. 그가 여전히 안개에 가려진 시의 성채만을 가늠하고 바라보면서 우울과 상처의 나날 속에 있을 때 미당문학상 수상소식이 전달되었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아닌 ‘황병승’의 미당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 소감을 듣고 싶다.
황병승: 폭염 속에서 물을 만난 기분이었다. 물을 먹었고,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물 위에 올라와 폭염 속에서 물을 바라보고 있다. 묘한 감정이다.
송승환: 20세기의 프랑스 시인들이 말라르메가 예언한 바 있는 「시의 위기」에 대처했던 것과 비슷하게 21세기의 한국의 젊은 시인들은 어떤 일률적이고 집단적인 경향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감수성에 의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은 모두 서로 다른 시를 쓰고 있는 동료 시인들에게 감사하면서 ‘따로 또 같이’ 시를 쓰는 2000년대를 ‘행복한 시대’라고 서로 느꼈다. 그리하여 황병승의 수상소식은 황병승과 함께 문학 활동을 나눈 200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2003년 등단부터 지금까지 문학적 동료들과 함께 보낸 감회와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다.
황병승: 따로 또 같이, 행복한 시대, 라는 말에 동감한다. 다들 개성 넘치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고, 서로 자극을 주고 받으며 함께 써나갈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미래파 논쟁이 시작되면서 미래파와 관계없는, 그러나 좋은 시를 쓰는 동료 시인들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고, 그 점이 내내 아쉽다.
송승환: 2003년 등단 이후 지금까지 시를 쓰고 세 권의 시집을 출간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
황병승: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한계를 느낀다.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갱신해 나갈 것인가, 시의 영토를 어떻게 확장하고 확보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한다.
송승환: 지난 5월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을 출간했다. 세 번째 시집을 출간한 소감은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트랙과 들판의 별>을 출간했을 때의 소감과 어떻게 다른가?
황병승: 창비 가을호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힘들게 썼던 시들이 대부분이어서 시집의 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에 비해 첫 시집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은 시집이어서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에 무수히 등장하는 개인적인 상징들과 시적 장치들을 덜어내고 즐기면서 썼던 시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시집이 나왔을 때, 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던 시집이다.
송승환: 이번 황병승의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은 무엇보다 실패의 글쓰기와 실패한 삶의 기록을 끝까지 보여준다.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2005)와 두 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을 거친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은 다양한 주체들을 통해 발언하던 전작들과 달리 무엇보다 적극적인 1인칭의 고백이 두드러진다. 그 고백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변화의 지점인데, 그것은 여전한 황병승의 언어 리듬과 서사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실패하는 시인의 삶과 시의 알레고리로 구현된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계기는 무엇인가?
황병승: 3인칭 화자로만 시를 쓰는 데 싫증이 나기도 했고, 좀 더 내밀한 자기 고백을 하고 싶기도 했다. 생활과 시 쓰기에 대한 회의와 반성 속에서 나,라는 1인칭에 대해 좀 더 밀착해서 써나가고 싶었다.
송승환: 이번 미당문학상 수상작 「내일은 프로」는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의 특성과 추구하는 바를 암시하는 것 같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내일은 프로」는 파편적인 사건의 연쇄이면서 동시에 매우 음악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시쓰기의 방법에 영향을 준 작가의 작품이나 다른 장르의 작품은 무엇인가?
황병승: 파편적인 구성과 음악적 구조는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포스트락의 요소들을 활용한 결과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 보다는 여러 다양한 작품들로부터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송승환: 수상작 「내일은 프로」는 2003년 등단 이후 시인이 10여 년 동안 무엇을 시도하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실패의 실제 기록이자 시인의 자화상이다. 「내일은 프로」는 고딕체의 서사와 명조체의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고딕체의 소제목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영원’이 되고 말겠지” “세탁기하곤 말이 안 통하니까” “차와 간식이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쿵쾅 쿵쾅 쿵쾅 쿵쾅” “앞으로의 인생은 둘째 치고” “벙어리는 침묵과 절름발이는 목발과”라는 소제목들은 시인으로서 직면한 시와 삶의 파국 속에서도 끝까지 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윤리를 드러낸다. 파편적인 문장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거나 쓰지 않으면서 맞이한 고독과 죽음 앞에서 삶의 파국을 체감하지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시인의 육성이 내포된 알레고리다. 이와 같은 시적 구성은 어디서 모티프를 얻었고 어떻게 서사를 구축했는가?
황병승: 생활도 글쓰기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실패의 반복 속에서 결국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압도적인 욕망이다. 바닥을 치는 생활 속에서 내가 간신히 해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써나가는 것이었고, 그렇게 써두었던 메모들을 실패라는 냄비에 넣고 끓인 결과이다.
송승환: 앞서 언급한 프란츠 카프카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이며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병승: 카프카의 몽환적인 글을 읽고 있으면 기분 좋은 미열 상태가 되고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성>을 비롯한 다른 작품들도 좋아하지만, 카프카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변신>이다. 카프카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에 <변신>과 유사한 단편 소설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러다 우연히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송승환: 프란츠 카프카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 쓰는 삶을 살았다. 시인은 주로 언제 어디서 시를 쓰는가? 시 쓰는 일 외에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황병승: 오래도록 전업시인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고, 밤낮이 수시로 바뀌는 생활리듬 속에서 시간 구분 없이 그때그때 떠오를 때마다 쓴다. 한동안 고시원에 틀어박혀 썼던 적도 있고 또 한동안은 피시방에서 헤드폰을 쓴 채로 쓰기도 했다. 쓰는 일 외에 하고 싶었던 일은 음악과 영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 쓰는 일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송승환: 프란츠 카프카와 더불어 토마스 베른하르트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뷔히너상 수상 연설문 「그리고 결코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리라」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연극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런 연극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이 연극에 덤벼들지만 결국 아무 역할도 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연극의 흐름은 더 빨라졌고, 그리하여 중요한 대사를 제대로 읊어 보지도 못한 채 놓쳐 버리고 맙니다. 이 연극은 우선 전적으로 육체의 연극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황병승의 시집 <육체쇼와 전집>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이며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병승: 그의 연설문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냉소와 자조가 베른하르트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베른하르트 특유의 씁쓸한 유머를 좋아한다. 단편집 <모자>도 좋고, <소멸>은 심심할 때마다 아무데나 펼쳐서 읽는다.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베른하르트적인 것을 느낄 수 있다.
송승환: 계속해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문제는 언제나, 그리고 결코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리라는 생각 속에서 작품을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할 것인가, 즉 야멸치게 계속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중단할 것인가, 아니면 종결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의혹과 불신, 초조함이 문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황병승은 한 편의 시를 보통 어느 지점에서 완결 짓는가?
황병승: 의혹과 불신, 초조함이 문제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써나가는 고통보다 중단과 종결을 서둘렀을 때의 자괴감이 언제나 더 고통스럽다. 나 역시 시를 써나가는 과정의 고통과 초조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지점까지 야멸차게 밀어 붙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송승환: 그렇다면 황병승은 어느 지점에서 시를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시를 쓰기 시작하는가?
황병승: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이 시작점이다.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불가능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송승환: 그렇다면 시를 믿는가? 시를 믿을 수 있는가? 고쳐 묻겠다. 분리할 수 없는 삶과 언어 중에서 꼭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황병승: 언어를 선택할 것이다. 언어가 없는 삶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송승환: 두 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은 음악 밴드 <Belle & Sebastian>의 동명의 곡명 제목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시기에 많이 듣던 음악은 무엇이었고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시기에 많이 듣던 음악은 무엇인가?
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은 벨 앤 세바스찬의 ‘The Stars Of Track And Field’라는 곡의 제목을 직역한 것이고, 의역하면 ‘육상 경기의 스타들’이다.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할 때는 시부야계 음악부터 세계의 민속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었다. 하루에 네다섯 장의 앨범들을 거의 매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할 때는 차분하고 쉽고 편안한 음악들을 주로 들었다.
송승환: 20대에 주로 듣던 음악은 무엇이고 최근에 듣는 음악은 무엇인가? 그 음악 취향의 변화는 시를 쓸 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황병승: 실험적이고 중독성이 강한 음악에서 차분하고 편안한 음악으로 바뀌었고, 취향의 변화에 따라 시적 뉘앙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송승환: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 수록된 시 「Cul de Sac」은 로만 폴란스키가 제작한 동명의 영화 「Cul de Sac」(1966)과 다른 상황에 있지만 ‘자루 밑바닥’을 뜻하는 프랑스어 “Cul de Sac”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결국은 비슷한 궁지에 몰린다는 점에서 현재 시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과 그의 시가 직면한 곤궁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그 알레고리는 고딕체의 파편적 문장으로 서술되는 서사와 명조체의 고백적 진술이 교차하면서 구현되는데, 고딕체 문장의 서사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객관적 사건의 음악적 환기 효과를 낳고 명조체 문장의 진술은 주체의 고백을 주체의 내부뿐만 아니라 주체의 바깥인 독자에게까지 질문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어설픈 감정의 과잉과 직설의 함정을 간단히 넘어서게 하고 주체의 고백을 깊이 있는 성찰의 목소리로 심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은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서 두드러지는 형식과 내용의 특질로서 전작들보다 일관된 주체의 목소리와 171페이지에 이르는 시집의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Cul de Sac」과 시 「Cul de Sac」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황병승: 궁지라는 공통의 주제는 있지만, 구성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을 모두 보았고, 그의 영화들을 좋아하지만, 그의 영화, 「Cul de Sac」은 이상하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에 두세 편의 영화를 보고 인상에 남는 영화들만을 기억한다. 시 「Cul de Sac」에서 궁지에 몰린 상황과 주체의 고백은 오히려 일본의 시인이고 감독인, 소노시온의 영화들과 더 가깝다.
송승환: 장 뤽 고다르의 영화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다르를 비롯한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좋아하는가?
황병승: 고다르의 연출과 구성은 완벽에 가깝다. 그가 천재라는 의견에 망설임 없이 동의 하고, 어떤 특정한 장면을 얘기하기에는 훌륭한 장면들이 너무 많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두서없이 보는 편이고 좋아하는 특정 영화나 장면들을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영화들을 좋아한다.
송승환: 영화의 장면들을 어떻게 응용해서 시에서 활용하는가?
황병승: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과 에피소드, 대사를 변형 확장하거나 떠오르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적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송승환: 미술사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사조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황병승: 특별히 좋아하는 사조는 없다. 그러나 굳이 꼽자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초현실주의를 들 수 있겟다.
송승환: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르네 마그리뜨의 작품 중에서 특히 어떤 작품들을 좋아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황병승: 그의 모든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에피소드와 대사가 떠오르고 등장인물과 사건의 결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송승환: 지금까지 답변한 소설과 영화, 음악과 미술 작품들은 황병승의 시의 무의식적 배경이 되고 있다고 보인다. 그것들은 황병승의 시에서 서사와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황병승의 시는 굉장히 서사적이면서 그 서사를 어느 지점에서 시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이 황병승의 시의 극단(極端)의 고유성을 창조한다. 특별히 파편적 서사에 관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병승: 영화도 음악도 전형적인 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콜라주적인 구성을 좋아한다. 돌발적인 괴리감,은 시의 중요한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송승환: 파편적 서사는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새로운 세계의 서사를 꿈꾸는 것에 다름 아니다. 폴 베를렌이 「시학 Art Poétique」의 마지막 시구에서 “그대의 시가 훌륭한 모험이 될 수 있기를/세찬 아침의 바람 속을 떠돌다/박하와 백리향을 꽃피우고 사라지는……/그 찌꺼기가 문학이란 것이니”라고 당대의 엄격한 규칙과 규범적인 문학을 경멸하면서 그 ‘모험’에 주목한 것처럼 황병승의 파편적 서사는 그 ‘모험’의 실험성과 주변 문화로 새로운 세계의 시적 서사를 창조했다. 규범적인 문학과 주류 문화에 대한 황병승의 의견을 듣고 싶다.
황병승: 규범적인 문학과 주류 문화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기쁨을 준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예술은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새롭고 파격적인 것은 낯설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험과 시도의 결과이다.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태도와 비주류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제도적으로 필요하다.
송승환: “저는 생각이 없어요 전집이 없습니다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골방의 아이들은/뒤죽박죽 서로를 배신하기로 협약을 맺었고/어두워진 창가를 서성이는 검은 육체의 그림자와/누구의 부모인지 모를 백 년 전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습니다”(「육체쇼와 전집」)는 마음의 눈길이 오래 머물게 한다. “악착같이 꿈꾸면서 악착같이 전진하면 악착같은 현실”(「육체쇼와 전집」)이 기다리는 현재의 나는, 이름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여줄 육체도 없고 전집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있다. 나는 “검은 육체의 그림자”로 있다. 나는 그 모든 ‘없음’의 형식, 즉 ‘무(無)’로 있다. 무(無)는 시인이 삶을 희생하고 실패하면서까지 도달한 실재이다. 무(無)의 제전에서 시인은 시적 순간을 체험할 때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고 세계를 최초로 바라보는 시선을 얻는다. 이른바 ‘실패의 성자’, 황병승 시인에게 ‘없음’, 즉 무(無)와 죽음이란 무엇인가?
황병승: 반복되는 일상이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오로지 고통스런 시선만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없음’과 ‘죽음’을 오래오래 핥는 기분으로 써나간 시이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병든 육체를 마치 타인의 것처럼 바라보며, 고통스런 시선조차도 사라질 완전한 ‘없음’의 임박을 기다린다. 반복되는 일상의 순간과 기다림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송승환: 시는 정직하다. 시를 쓰기 위해 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에게 시는 자신의 옆얼굴을 ‘순간’ 보여준다. 시를 쓰려고 전력을 다하기보다 시인으로서의 지복을 먼저 누리려는 무의식조차 시는 외면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황병승은 시의 옆얼굴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계속 응시한 시인이다. 그리하여 삶의 판돈을 모두 잃은 시‘만’을 위한 시인이 되었다. 그것이 나는 기쁘고 슬프다. 시에 가까스로 성공한 듯 싶었을 때 시는 이미 실패했고 그 시에 전력을 다한 삶은 더욱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시와 삶, 시와 일상의 균형 또는 편향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황병승: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다. 나는 시와 삶, 삶과 시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최소한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고 써나갈 것이다.
송승환: 패배와 실패는 다르다. 패배는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있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것을 뜻하고 싸움에 져서 도주하는 패주와도 같은 말이다. 이와 달리 실패는 일을 잘못해서 뜻한 대로 이루지 못하거나 일을 그르친 것을 뜻한다. 패배의 반대어는 승리인데 실패의 반대어는 성공이다. 시는 싸움에서 오직 승자와 패자만 있는 글쓰기가 아니고 승자가 되기 위한 글쓰기도 아니다. 시는 시인이 언어를 통해 삶과 세계의 사태를 포착하고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를 형상화하고 성찰함으로써 ‘지금-여기’의 결핍과 난관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미지-거기’의 세계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글쓰기이다. 그러나 언어는 실재의 삶과 세계와는 자의적 관계이고 그 실재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시는 실재가 부재하는 언어로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미지-거기’의 세계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실패가 예견되어있고 완전한 삶과 미(美)의 이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는 실패의 글쓰기이고 실패담의 기록이다. 황병승은 실패의 전위다. 나는 가혹하지만 그가 더욱 실패하면서 시에 가장 가까이 항상 머물러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내리는 눈발속에서는」)는 미당의 시구를 황병승에게 건네고 싶다. 이번 미당문학상 수상을 거듭 축하한다. <끝>
<2013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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