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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현대시』 송승환 커버스토리 ―이현승, 「그는 왜 아방가르드가 되었는가」

좌담과 인터뷰

by POETIKA 2019. 7. 31. 08:47

본문

 

그는 왜 아방가르드가 되었는가

 

이현승 시인

 

그는 나와 아주 오랜 사이다. 나는 그를 대학에서 만났다. 그가 나를 학교 내의 문학 동아리로 이끈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빵하기 짝이 없는 새내기를 동아리로 데려가는 친절한 대학 선배의 모습을 누구든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친절한 선배 이미지였다. 그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일망정 사악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그가 데려다준 동아리에 많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를 연합 동아리에 착륙시켜 놓고 정작 본인은 대학 신문사 기자일 같은 것을 하느라고 동아리엔 좀 등한하였다. 어쨌거나 그는 친절한 사람이고, 일생을 통해 자주 이 인상을 내게 반복적으로 각인시켰으므로 의심할 나위 없다. 그의 요청에 따라 너무 옛 시절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 옛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일까? 정작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런 사적인 것일 터인데 말이지. 그러나 사람이 한 직업에 한 20년 종사했거나, 곡식을 축내온 시간이 40년이 넘으면 옛날 이야기는 안하는 게 좋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그 법은 금주법이지만. 하여튼 우리는 틈만 나면 전화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각자의 삶을 혀를 늘어뜨리며 살다보면 저절로 만나게 된다. 그래도 둘다 아직 현역이니까 이런저런 문학인들의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만나도 공연히 친한 척을 하거나 반대로 소원한 척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개구리밥처럼 이리저리 쓸리다가 맞닥뜨리면 가족의 안부와 이런 저런 일들을 그냥 알아서 술술 풀게 된다. 우리 삶이라는 게 들어도 알고 안 들어도 아는 빤한 삶이라서 그렇다. 그래도 나보다 그는 좀 더 다이내믹한 삶을 사고 있는 것 같다. 빤한 삶끼리 오랜 만에 만났을 때 큰 애가 몇 학년이지?” 하면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시작될 거 같은가? 혹은 지금 어디서 강의해(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거 봐라. 우리처럼 오래 본 사이는 어느 각으로 치고 들어가도 처연인지 처참인지 모를 삶이 덩그마니 놓여 있다.

그래도 법은 어기라고 만들어 놓은 거니까 옛날에 무슨 짓들을 하고 다녔는지 한 토막만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멋진 시를 쓰고 싶었고,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뭐 좀 거지같이 지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이런 게 다 내로불이라고 그 시절을 진짜 거지같다고 추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가장 어이 없달까. 기형도의 대학시절에서 두 군데 줄을 그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학교 공부를 등한히 하고, 시집 읽고 열에 들떠서 밤귀신들처럼 쏘다니거나 누군가를 벳겨 먹었다. 기생충처럼 동가식서가식하는(숙보다는 식) 것이 그때는 좀 재밌었는데, 선배들은 구더기를 잔뜩 슬어놓은 왕파리처럼 우리는 한껏 귀여워해주었다. 가끔씩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 중 부모 다음으로 따뜻한 사람들은 그때의 선배들이 아니었나 싶을 때가 있다. 그래도 염치가 있지 한번은 낼 줄도 알아야하고 그러자면 여윳돈이 있어야 하니 혹자는 교재를 사지 않았고, 혹자들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성격상의 결함으로 서비스업에서 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대부분 몸을 쓰는 노동일을 했다. 일단 시간대비 임금이 높고, 비용의 회수시기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그편이 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험한 일을 할수록 마음이 어질어지는 이상한 공식이 있는지, 우리 같은 책상물림들에게는 인생경험보다 더 좋은 보약이 없는데 공사현장 같은 데서 만난 아저씨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얻어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도 첫 시집에는 관련 경험이 녹아 있는 시가 있다) 한 번은 그가 지하철에서 신문을 파는 일을 해 보자고 하여 같이 나선 적이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과 랩탑의 뒤안길로 아스라이 사라진 스포츠신문이라는 것이 주로 전철 안에서 소비되는 품목이었다. 아 그거 봤어. 하면서 갑자기 휴대용 등산 매트나, 다용도 ○○○을 파는 아저씨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스포츠 신문은 합법적인 판매물품이었다. 형이 나보다 한 몇 번 더 한 것 같고, 나는 딱 3일을 해 보았는데 뭘 판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는 없는 재주였다. 그때도 그는 어떤 수완이 있었다. 그래 봤자였겠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한결 잘 팔았다.

그래도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등록금을 내거나 보태고, 사고 싶은 책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름지기 돈이 가치 있을 때는 먹는 것과 바꿔질 때, 입는 것과 바꿔질 때. 그때 나는 지독한 흡연가였는데,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 무렵엔 잊을 만하면 동료들이 대학문학상이라는 것을 타 와서 한 잔씩 사거나 했던 것 같은데, 그에게도 그 멋진 기회가 찾아왔었다. 그가 4학년 때였나? 그가 고대신문에서 주최하는 고대문학상에 당선되었다. 밤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가 포장마차 어디쯤에서 그에게 달큰한 소주를 얻어 마셨던 것 같다. 당선작에도 그가 바닷가에서 했던 노동의 체험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에 다니는 아르바이트생이지 노동자는 아니었다. 글을 쓰는 문제에 있어 이런 고민들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했다. 시에 슬그머니 아내를 언급하는 화자를 노출하거나, 세상 절망한 사람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갔다가도 한참 머쓱하게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암중모색이라기보다는 본질적인 관심과 취향이었을 텐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죽 주로 프랑스문학에 많이 매료된 거 같았다. 하긴 90년대엔 한참 프랑스 소설들도 대중적으로 많이 읽혔고, 바슐라르의 상상력은 문청들에게 핫한 아이템이었다. 그에 의하면 그에게 문학적 원체험을 제공한 텍스트도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이었다고 하니 프랑스문학에 그는 빚이 많았나 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방송통신대학의 불어불문학을 편입학하여 공부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나 나나 이미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으니, 어쩌면 나만큼 놀란 사람이 그를 가르친 분들 중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이야기를 길에 늘어놓은 것은 커버스토리 청탁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가 전위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가 큰물처럼 쓸고 지나간 후쯤 낸 평론집의 제목이 측위의 감각인 것을 보면 그가 아방가르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미학적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제목처럼 그는 그 측위의 최첨단에 한 관심이 놓여 있다. 등단 전에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종종 그와 창작시를 가지고 모이기도 했다. 어떤 시를 써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만족시킬 수 없었는데, 그나 나나 몸에 밴 시형과 쓰고 싶은 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우리의 삶의 모습과도 잘 맞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침묵의 시간이 길어져갔다. 시가 시들해질 때는 잘 안 보다가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와서 너댓 편의 시를 보여주었는데 환골탈태한 시형이었고, 어딘지 그와 잘 어울리는 시들이었다. 시를 보여주고 간 지 한 달이 안 되어 그 시로 등단했다고 연락이 왔다. 첫 시집에 여일하게 들어서 있는 시풍은 그가 2000년대 초반에 각고의 시간을 견디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그는 2000년대의 시로 진입한 것이었다. 대체로 그것은 사물시와, 이미지 시의 전통 속에 있으면서도 종래의 그것들이 !’하고 떨어지는 것과는 달리 행간과 시의 원근에서 빤한 정향을 노출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2000년대 초반은 아무래도 한국의 시가 가장 핫한 시기였다. 그 공동의 열기 안에서 한국의 시는 한껏 소통보다는 개성을 더 뽐내기 위한 충일성을 담고 있었다.

 

다시 내린 눈으로

 

바퀴 자국이 지워졌다

 

찌그러진 자동차가 견인되었다

 

앰뷸런스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눈물 없이 울던 그녀의 뒷모습

 

새벽 안개와 함께 지상에서 걷혔다

 

불을 품은 뜨거운 얼음에 데인 적이 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 사라진다*

 

하늘 한가운데 구름이 흘러간다

 

-드라이아이스전문

 

지금 다시 봐도 신기한 것은 송승환의 첫 시집 드라이아이스에는 희한하게 사고 난 풍경이 많다는 점이다. 이 시 드라이아이스에도 찌그러진 자동차와 멀어지는 앰뷸런스를 통해 교통사고를 알린다. 눈은 자동차의 사고 흔적을 지우고, 새벽안개가 걷히면서 이 모든 것들은 걷혔다’. 그런데, 이 축소지향의 시인은 이 모든 기억과 경험을 단 하나의 이미지 위에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 환유적 대상물은 드라이아이스이다. 드라이아이스는 냉각재면서도 맨손으로 만지면 화상을 일으키므로 극단의 열기와 극단의 냉기를 연결시킨다. 더욱이 얼음이 녹아 흥건해지는 것과는 달리 이 냉매재는 휘발된다. 그러므로 치워진사고의 흔적은, 드라이아이스는 사라졌는데, 그것을 만진 사람의 화상만 남아 있는 것과 잘 겹쳐진다. 열과 냉, 고형과 기화, 있음과 없어짐, 그러한 사라짐을 다시 압축하는 구름은 드라이아이스의 두 번째 성상일 것이니 이 시는 비교적 구심점이 뚜렷한 작품에 속한다. 아무튼 나사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사물시를 쓰면서 질탕한 고백의 시와는 완전한 이별을 고한다. 그의 시에 자잘한 낭만이나 감동이나 눈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평소 그가 미학적으로 가장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는 신파처럼 그렇게 감정의 분출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이상하게 첫 시집에는 교통사고나, 건설현장에서의 사고 같은 사고 이미지가 많이 보인다고 했는데, 달리 말하면 그의 첫 시집에는 도로나 작업장 같은 공간이 주력 공간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에 오면 그의 주력공간은 실내가 되어 있고, 그 실내는 수술실(사무실)과 집()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두 공간에서 자주 보일 법한 동사와 명사들이 파편적으로 채워져 있다.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은 클로로포름이니 이곳은 수술실이다. 동명의 시가 여러 편 있으니 그 중 첫 번째 작품을 보자.

 

나는 나아간다

 

돌아서는 들판의 길목마다 먼 곳

 

숲 속의 빈터

 

솟아 오른 빛의 기둥

 

사물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낱말은 마비되어 잠들어간다

 

내 입술에서 이름은 투명하게 타오른다

 

아름다움은 불리워지지 않고

 

깨어나지 않은 채 있는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다

 

안개는 맑고 비는 멈춘다

 

검은 옷 입은 여인이 걸어 나온다

-클로로포름전문

 

첫 시집에서와는 확연히 달라진 특징이 두 번째 시집에서부터 생겼다. 퍼스펙티브가 달라졌다. 종전에 그는 인간의 진부한 감정체계와 한참 떨어져 보여도 여전히 인간의 눈으로, 현실적인 중력장(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 관계가 있는)에 위치한 어떤 사람의 눈으로 현실의 한 부분을 예각적으로 포착하는 시를 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에 오면 그의 시의 진술은 현실적인 중력장을 이탈한 정황이나, 심지어는 사물에 이입된 관점에서 서술한다. 사람들에게 어디든 가보라고 주문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바다나 산이나 제가 가고 싶은 어떤 곳을 떠올릴 테고, 그때마다 그 각각의 이미지에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 기입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 이미지는 기입된 그 감정에 대한 환유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시는 마치 꿈이야기를 풀 듯 전개된다. ‘는 나아간다.(걷거나, 달리거나, 뭘 타지 않고, 다만 나아간다는 말은 참으로 꿈속이나 의식적인 체험의 적절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먼 곳 숲 속의 빈터에서는 빛의 기둥이 솟아오른다. 화자는 낱말은 마비되어 잠들어간다고 썼는데, 시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읽으면 마비되어 가는 것은 화자자신이고, 그것은 약효(클로로포름)이 퍼져가기 때문인 것 같다. 그가 자기 자신이면서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해 버린 상태에 접어들면서 이상한 체험공간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통상 마취는 고통에 대해서는 반응하지만 다른 감각적인 경험이 아직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클로로포름은 송승환 시인이 언어와 대상세계의 안으로, 즉 어떻게 사물의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경험을 전유하게 되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취된 자신의 신체는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화된 사물이다. ‘로서의 퍼스펙티브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쳐들어오는 몽환에 대해서도 관찰자이자 체험자로서 그것을 기록해 두려고 한다. 마취와 함께 수면상태에 들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파롤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사유의 언어인 랑그와 이미지의 중간 상태로 느낌과 감각을 수집한다. 낱말은 마비되어 잠들기에’ “아름다움은 불리워지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깨어나지 않은 채 있는다와 같은 구절은 명확하게 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잠들어버린 것도 아닌 이 특별한 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말처럼 보인다. 수술실의 감각이 환유한 안개와 비 이후에 이윽고 걸어 나오는 검은 옷 입은 여인은 각몽 상태에서 맞닥뜨린 낯선 현실의 왜상일 수도 있고, 완전히 몰입된 몽상 속에서 만난 내면적 대상일 수도 있다.

정서적으로 전통에 충실한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이 내면의 상처를 보다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경유하면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모던한 시인의 자연 이미지의 근원은 수술실에서의 마취이고, 그 환상을 그대로 원고지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이런 공간성은 마치 집필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어에 골똘한 그는 꼭 30년대 시인 이상의 한 후예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상은 의사놀이를 하는 시인이었지만. 아마도 그는 대부분의 사실주의적 언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사실보다는 관념에 충실한 것에 비해, 보다 경험적 개연성을 높일 수 있는 하나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약국에 있는 많은 화학약품들은 저마다의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능과 목적의 과학적 합리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은 신화시대의 신비한 가루와 같은 효과를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잠이 오는 꽃향기, 통증을 덜어주고 용기를 북돋는 약초라고 쓰면 이것은 자연물이지만 그 기능과 효과만 본다면 한 알의 알약이 우리를 미지의 숲길과 그 길 끝의 빛의 기둥으로,(여하튼 기둥이란 어떤 건물의 입구 같은 느낌을 환기시킨다) 다시 그곳을 지나쳐서 마침내 검은 옷을 입은 여인에게로 우리를 안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쩌다 수술실로 가게 된 것일까? 잘 모르겠다. 그의 여러 시에서 그렇듯이 수술실 자체는 우연하게 가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우연히 환유의 한 축으로 시에 이끌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 왜 수술실인가? 그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근대적인 무시간적 공간에서 열렸다. 무시간적 공간이란 가령 사고의 순간처럼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경험하고 포착할 수 없는 증강현실이다. 인용한 클로로포름의 수술실도 그러한 전형적인 증강현실 공간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도로와 건축현장 같은 공간이 비교적 근대 초기의 대표적인 공간이라면, 수술실과 병원이라는 공간은 보다 첨예한 근대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심증은 최근에 발간한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에 있는 시편들에서 더욱 집요하게 붙잡힌다. 가령 병풍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병풍의 공간을 끌어와 겹쳐놓고, 병풍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서술된 구문의 형태로 겹쳐서 배치하고 있다. 시집의 발문을 쓴 김정환 시인의 말마따나 섣부른 부분 인용을 할 수 없도록 구조화된 송승환의 시는 인용자로 하여금 비교적 닫힌 구조의 짧은 시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응당 에 대해 더 말하고 싶다. 병풍이 죽음이 어떻게 사물화하여 언어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시라면, 은 언어가 어떻게 사물성을 현현하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다.)

 

1

이름

 

빈 무덤

 

어머니가 없다

 

2

 

솜으로 귀와 코를 막는다 눈을 감기고 턱을 받치고 입을 닫는다 머리를 높이 괸다 손발을 주무르고 몸을 눕힌다 백지로 얼굴을 덮는다 배 위에 왼손 오른손 올려놓는다 받침대로 옮기고 홑이불로 덮는다 병풍으로 가린다

향나무 삶은 물로 씻긴다 머리 빗질을 한다 자른 머리카락 깎은 손톱 발톱 주머니에 넣는다 이불에 넣는다 물 수건 빗 마당에 묻는다 몸을 관에 눕힌다 몸과 관 사이 메운다 문을 닫는다 나무못을 박는다 관을 묶는다 병풍으로 가린다

묘지 네 모서리 말뚝 아래 관이 내려간다

 

어머니가 있다

 

3

 

어머니가 없다 부를 것인가

 

어머니가 있다 부를 것인가

-병풍전문

 

앞에서 보았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미망인의 모습과도 겹쳐지는데, 보들레르의 시에서 그랬듯 검은 옷(죽음)과 여인의 관능미(삶과 욕망)의 대립적 결합은 송승환의 시에서도 죽음의 이미지와 삶의 이미지를 응축시켜놓았다. 그 상관물을 꼭 현실적인 누구로 호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번 시집에서는 그 여인의 자리에 어머니를 넣어 보여준다. 그의 세 번째 시집은 언어의 절대성을 향한 그의 추구를 조금 더 극단화한 결과물로 보인다. 언어의 절대성이란 익숙한 재현체계의 언어가 아닌, 따로 떼어지고, 독립된 단어들조차도, 언어 자체가 느낌과 생각과 경험과 깨달음을 체감시키는 수준에 이르는 절대성을 말한다. 시집의 대문 시나 다름이 없는 이화장이나 심우장같은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어들이 부사어들로 이루어진 시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사어는 의미 기능이 가장 적은(부수적인) 말이다. 인용된 시의 1은 입관을 위해 마련된 구덩이를 비춘다. 2는 장례와 매장의 과정을 놀랍도록 촘촘하게 묘사한다. 망자는 저와 같은 염, 입관, 매장의 절차를 거친다. 3은 마음의 공간이다. 어머니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다. 그런데 잇단 부를 것인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아마도 그 느낌은 바로 뒤에 수록된 이라는 시를 통해서 입체화 된 것 같다. 어머니의 있음, 곧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없음, 곧 어머니의 죽음과 그로 인한 부재 역시 부름이라는 주체의 행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현실의 모든 사태들이 언어적 자각을 통하지 않고는 있으나 표현할 수 없고 그 결과로 없는 것과 다름없는 이미지 상태에서 머무는 것처럼 이 언어주의자는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자신의 언어를 언제까지라도 동시적으로 분해함으로써 점점 더 첨예한 시들을 써나가고 있는 것 같다. 미학적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나의 관점을 나는 박민정 소설가가 인터뷰에서 원용한 말로 대신하는 편이 보다 요긴하리라 생각한다. “모든 이방인은 필연적으로 진에 가까워진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비슷하게 변주해 보고 싶다. “모든 전위적인 언어는 필연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내면 가까이에서 힘을 얻는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그에게나, 나나 다른 모든 인간에게 어머니란 말은 하나의 근원적인 상처다. 그러니 미학적 급진성은 언제나 그 내면적 충실성과 함께 언어파괴에 이를 수밖에 없으리라.

 

약력: 이현승. 시인. 2002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현 계간 파란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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