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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월호 레이디경향 [시인과 함께 읽는 시]송승환 시인의 ‘시멘트’

리뷰

by POETIKA 2014. 1. 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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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함께 읽는 시]송승환 시인의 ‘시멘트’

2008년 12월호

송승환 시인은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나사’ 외 4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을 어떻게 시적인 것으로 풀어낼 것인지를 고민하며 시를 쓴다. 변화와 지속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즐기는 듯 보인다. 최근에는 국문학과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며, 두 번째 시집 준비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2005년「현대문학」에 신인 추천 평론 부문에 등단한 뒤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존재하고 있는 주변 사물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하고 살았으면 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과연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1 친구와 쌈지 스페이스를 찾았다. 보통 전시장은 입구를 열어놓는 편인데, 이곳은 문이 닫혀 있다. 들어가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자동문인 것 같은데 열리지 않는다. 망설이다가 한 발 물러서니까 문이 스르륵 열린다. 열린 틈으로 얼른 몸을 들이밀고 보니 문 모양도 좀 이상하다. 안은 더 이상했다. 휑한 그곳에는 똑같이 생긴 문 다섯 개가 있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건가? 손잡이를 당겨본다. 어, 열리지 않는다. 옆에서 친구는 “문이 아니라 전시품인 것 같다”고 일러준다. 그런데 또 옆문은 열린다. 2층으로 가봐도 똑같다. 비슷하게 생긴 문과 벽, 계단들만 계속 보인다. 대체 뭘 감상하라는 건지. 이젠 나가는 길도 모르겠다.

알고보니 건물 전체를 활용한 전시란다. 공간에 대한 낯섦을 이야기하는 이 전시는 우리의 시공간 감각을 낯설게 보도록 해준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공간이, 굳건하게 서 있는 건물조차도 완전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내 눈으로 보고 있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말이다. 어쩐지 배신감이 드는 상황이다. 당연하게 확신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랄까.


#2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들, 이를테면 ‘파란 바닷물’을 떠올려보자. 파랗게 보이는 바닷물은 실제로 파란색을 띠지 않는다. 한 걸음 더, 그렇다면 파란색은 어떤 색이기에 바닷물이 파란색은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빨강과 보라가 섞인 색을 파란색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그건 그렇게 하기로 사회적 약속을 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알고 있던 것들 중에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뭘까? ‘진짜’ 모습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있을까?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이 무척이나 알고 싶어진다. 누군가에 대한 나의 감정이 뭔지 확신이 없고 헷갈릴 때면 내가 따져보는 것이 딱 두 가지 있다. 함께 있지 않을 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 그리고 매사에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혹은 ‘그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지.

그렇게 ‘알고 싶던’ 그를 만나다보면 언젠가는 그 사람에 대해 ‘다 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온다.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에게 솔직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서버린 그 사람은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다. 한 몸처럼 잘 맞고, 내가 잘 아는, 내 품 안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낯선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는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3 생각해보면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지도 모른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은 지나간 과거를 원인으로 하여 현재의 결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다시 내일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려고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그 사람이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나보다’라는 해석을 하게 된다. 시간적으로는 분명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앞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뒤에 일어난 결론을 보고, 거슬러 올라가 ‘사랑’을 인식하게 됐으니 시간이 곧게 흐르지만은 않는 것 아닌가. 언젠가 책에서 본 철학자 라캉의 ‘논리적 시간’이 생각난다. 정말 시간이 논리적으로 흐르고 있나보다.


#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후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그가 꽃이 되었다. ‘이름’이라는 언어가 ‘그’를 만든 것이다. 이름이 주체를 앞서고 말았다. 당신이 나를 꽃으로 불러준다면 나는 꽃이 될 것이다. ‘나’를 접어두고 ‘당신의 꽃’으로.


에필로그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번화가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용기를 내서 잡은 그녀의 손은 딱딱하다. 나를 반기지 않는 손이다. 낯섦이 끼쳐온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은 막상 집에 돌아와 꺼내보면 내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꿈을 꾸는 줄 알았던 그녀도 이제는 빌딩으로 들어가버렸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남겨진 자에게 비치는 햇빛은 찬란하지만 서글프다.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 정말 알고 있는 걸까요? 존재에 대해 끝까지 고민해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흔히 주변 사물을 보면서 이름을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름은 사물의 속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물과 속성 사이에는 간격이 있죠. 그 간격에 대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해요.”

송승환 시인의 시집은 제목과 본문을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 제목은 대부분 현대의 사물들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그 사물들을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금방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이 말한 대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면 제목과 본문 사이 간극은 좁아진다. 머릿속에 풍경이 그려지면서 쉽게 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주변 사물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하고 살았으면 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사는 건 슬픈 일이에요.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요. 깔려 있는 여러 의미들을 알고자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중요한 행위를 힘들어하지 마세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끝나고 나면, 그의 시집을 한 번 더 찬찬히 읽어보려 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준비를 하고서. 당신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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