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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9월호》조강석, 「크로핑(Cropping)과 언어의 시계(視界)」

리뷰

by POETIKA 2019. 9. 2.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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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석 

 

 

이런 시가 있다. 아래 전문 인용된 시의 제목을 짐작해 보자.

 

    이것은 ······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시도 있다. 역시 전문이다. 다시 제목을 짐작해 보자.

 

    그러나 이것은······이다.

 

송승환의 시집 『클로로포름』에 실린 위의 두 시의 제목은 공히 「카메라」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같은 제목의 시가 한 편 더 실려 있다.

 

    이 파란색
    저 파란색
    사이

 

    다른 파란색
    다른 파란색

 

    그 모든 파란색의 경계

 

    파란색
    파란색
    파란색

 

    사과

 

    붉은 토마토와 붉은 토마토 사이
    – 「카메라」 전문

 

    이 글은 세 번째 인용된 작품을 읽어 보려는 취지로 쓰이고 있다. 편의상 위에 인용된 시를 카메라(1), 카메라(2), 카메라(3)으로 임의로 지시하기로 하고 각각의 카메라에 포착된 전모 ― 여기에는 시각적이고 언어적인 풍경이 모두 포함된다 ― 를 시계(視界)(1), 시계(2), 시계(3)으로 지시하고자 한다. 까닭이 있다.

 

(그림 – 에드워드 호퍼, 「밤의 창문(Night Windows)」, 1928)

 

이 그림은 잘 알려진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밤의 창문(Night Windows)」이다. 많은 설명이 가능하겠으나 현대인들의 불안과 고독을 선명한 명암 대비와 크로핑(cropping) 기법에 의한 특수한 시계(視界)의 분절에 의해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가시적·가촉적 질료에 의해 비가시적 주제를 표현하려는 그림의 이상을 현대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사(前史)가 있다.
    미술이 사유와 느낌을 시각화한다는, 라파엘로와 루벤스 이래 오래 당연시되어 온 전제는 19세기 후반 들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현대적 삶의 양상과 더불어 사유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프랑스의 국립살롱전에서 당선작이 될 수 있는 그림은 역사화, 신화화, 정물화, 인물화 등이었다. 양상은 각기 다르지만 이와 같은 그림에서는 대개 주제적 중심과 회화적 중심이 자연스럽게 일치하고 보편적 주제가 균형 잡힌 구도에 의해 일목요연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새롭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현대적 삶'이었다. 길게 부연할 필요는 없겠으나, 보들레르의 「현대 생활의 화가」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국면이었다. 그 첫 대목을 눈여겨볼 만하다.

    세상에는, 심지어 예술계에도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는, '이류'일지언정 아주 흥미로운 수많은 그림들에는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복제 판화의 보급으로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 가령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의 작품 앞에서는 꿈꾸듯이 붙박여 있다. 그러고 나서 미술관을 나설 때 대개 만족해하며 "내 미술관에 대해 나는 훤히 알지." 하고 중얼거린다. 또, 오래전에 보쉬에나 라신의 작품을 읽고서는 자신이 문학사에 정통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비평가들, 애호가들, 호기심 많은 사람들 등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들이 간혹 등장하여, 라파엘로 안에 모든 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라신 속에 모든 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소위 '군소 시인poetae minores'들에게도 우수한 것, 믿음직한 것, 매혹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고전 시인들과 예술가들이 표현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특수한 아름다움, '현現 상황(circonstances)'의 아름다움, 풍속에 깃든 감성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1)

1)  샤를르 보들레르 지음 · 도윤정 옮김, 「현대 생활의 화가」, 『화장예찬』, 평사리, 2014, pp.12-13.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콩코르드 광장」(1875)이 그것이다. 미술사가 줄리언 벨에 의하면, "1875년에 완성된 이 작품 이전에는 유럽에서 누구도 사각형 틀 안팎에 되는 대로 인물들을 배치한 적이 없었다."2)라고 한다. 줄리언 벨은 이 그림이 마치 카메라로 찍은 스냅사진처럼 보이지만 10년이 더 지나야 사람들이 사용하게 될 사진의 형태를 드가가 예측했다고 보는 게 더 그럴듯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그림이 "당대 도시 생활의 본질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찰나의 느낌"3)을 잘 포착하여 전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드가의 노트 한쪽을 옮겨 본다.

2)  줄리언 벨 지음 · 신혜연 옮김,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 예담, 2009, 43쪽.
3)  줄리언 벨, 같은 책, 343쪽.

 "과감하게 잘라낼 것, 무희라면 그 팔이나 다리를······ 모든 종류의 일상적인 사물을 맥락 있게 정돈하여 남자와 여자처럼 '생기' 있게 느껴지도록 할 것,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 기념물이나 집을, 가까이 다가가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사람은 없다."4)

4)  여기 인용된 에드가 드가의 노트는 줄리언 벨, 위의 책, 343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드가가 골몰했던 문제는, "세상을 그리는 새로운 방식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어떻게 미술을 즉각적인 심리 경험에 더 가까워지도록 할 것인지" 등이었다고 줄리언 벨은 설명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지적으로 즐겨야 한다."라는 드가의 말은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크로핑(croppomg) 기법과 현상학적 시계(視界) 구성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크로핑이나 현상학적 시계와 관련된 맥락을 상기하며, 이 글의 서두에 놓인 카메라의 시계들을 다시 들여다보자. 카메라(1)과 카메라(2) 즉, "이것은 ······이다."와 "그러나 이것은······이다." 사이에서 주목할 것은 저 역접이다. 만약 두 시계 사이에 순접의 언사가 위치했다면 이는 사물의 연접을 강조하는 열거로 기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그러나"가 놓여 있다. 이는 독립과 변별을 강조하게 된다. 세계를 시계로 분절하는 언어가 세계에 대해 무엇을 프레이밍(framing)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파노라마 속에서 태연한 세계를 매 순간 분절시키며 취하는 욕망이 저 뜻밖의 역접에 도사리고 있다. 물경 이쯤은 되어야 세계를 건사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1)과 카메라(2)의 사이는, 흡사 기억의 천재 푸네스(보르헤스)가 기억을 통해 세계를 낱낱이 분절해 내면서 시간의 미세한 사이를 무한에 인계하듯이, 그렇게 n개의 시계를 분절시킨다. 그러니 카메라(3)의 시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1/n의 시계가 분절되는 양상을 추상한 하나의 도식과도 같다.
    카메라(3)의 시계를 살펴보기 위해, "사이"와 "붉은 토마토"라는 시어가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의 선례에 가닿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1)
    쥐똥나무 울타리 밑
    키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돌멩이 하나
    키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돌멩이 하나 그림자
    키작은 양지꽃 한 포기 그림자 옆에 빈자리 하나
    키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새가 밟는 새의 길 하나
    키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바스락거리는 은박지 하나
    – 오규원, 「양지꽃과 은박지」 전문

 

    (2)
    토마토가 있다
    세 개
    붉고 둥글다
    아니 달콤하다
    그 옆에 나이프
    아니
    달빛

 

    토마토와 나이프가 있는

 

    접시는 편편하다
    접시는 평평하다
    – 오규원, 「토마토와 나이프-정물b」 전문

 

    (3)
    내 앞에 안락의자가 있다 나는 이 안락의자의 시를 쓰고 있다 네 개의 다리 위에 두 개의 팔걸이와 하나의 등받이 사이에 한 사람의 몸이 안락할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작지만 아늑하다….. 아니다 나는 인간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다시 쓴다 네 개의 다리 위에 두 개의 팔걸이와 하나의 등받이 사이에 새끼돼지 두 마리가 배를 깔고 누울 아니 까마귀 두 쌍이 울타리를 치고 능히 살림을 차릴 공간이 있다 팔걸이와 등받이는 바람을 막아 주리라 아늑한 이 작은 우주에도….. 나는 아니다 아니다라며 낭만적인 관점을 버린다 안락의자 하나가 형광등 불빛에 푹 싸여 있다 시각을 바꾸자 안락의자가 형광등 불빛을 가득 안고 있다 너무 많이 안고 있어 팔걸이로 등받이로 기어오르다가 다리를 타고 내리는 놈들도 있다….. 안 되겠다 좀 더 현상에 충실하자 두 개의 팔걸이와 하나의 등받이가 팽팽하게 잡아당긴 정방형의 천 밑에 숨어 있는 스프링들 어깨가 굳어 있다 얹혀야 할 무게 대신 무게가 없는 저 무량한 형광의 빛을 어깨에 얹고 균형을 바투고 있다 스프링에게는 무게가 필요하다 저 무게 없는 형광에 눌려 녹슬어 가는 쇠 속의 힘줌들 팔걸이와 등받이가 긴장하고 네 개의 다리가….. 오 이것은 수천 년이나 계속되는 관념적인 세계 읽기이다 관점을 다시 바꾸자 내 앞에 안락의자가 있다 형광의 빛은 하나의 등받이와 두 개의 팔걸이와 네 개의 다리를 밝히고 있다 아니다 형광의 빛이 하나의 등받이와 두 개의 팔걸이와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안락의자와 부딪치고 있다 서로 부딪친 후면에는 어두운 세계가 있다 저 어두운 세계의 경계는 침범하는 빛에 완강하다 아니다 빛과 어둠은 경계에서 비로소 단단한 세계를 이룬다 오 그러나 그래도 내가 앉으면 안락의자는 안락하리라 하나의 등받이와 두 개의 팔걸이와 네 개의 목제 다리의 나무에는 아직도 대지가 날라다 준 물이 남아서 흐르고 그 속에 모래알 구르는 소리 간간이 섞여 내 혈관 속에까지…… 이건 어느새 낡은 의고주의적 편견이다 나는 결코 의고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지금 안락의자의 시를 쓰고 있다 안락의자는 방의 평면이 주는 균형 위에 중심을 놓고 있다 중심은 하나의 등받이와 두 개의 팔걸이와 네 개의 다리를 이어 주는 이음새에 형태를 흘려보내며 형광의 빛을 밖으로 내보낸다 빛을 내보내는 곳에서 존재는 빛나는 형태를 이루며 형광의 빛 속에 섞인 시간과 방 밑의 시멘트와 철근과 철근 밑의 다른 시멘트의 수직과 수평의 시간 속에서….. 아니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안락의자의 시를 보고 있다
– 오규원, 「안락의자와 시」 전문

 

    오규원 이래 토마토는 그냥 붉기가 어렵게 되었다. 카메라(3)에서 "붉은 토마토와 붉은 토마토 사이"가 시계(3)에 현상하는 순간, 이 이미지는 위에 인용된 시들의 맥락을 모두 안고 나온다. 인용(1)이 사물을 묘사함으로써 사이 자체를 현상하게 한다면 인용(2)는 사물에 접근하는 각도들을 확보함으로써 물성 그 자체와 공간을 현상하게 한다. 인용(3)은 이 모든 '사태(die Sache)'의 '시말서'가 될 것이다. 카메라(3)의 시계에는 이처럼 인용(1), (2), (3)의 시계들이 포개져 있다. 카메라(3)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세계가 크로핑과 프레이밍에 의해 단절되기는커녕 무한히 분절되는 것처럼 카메라(3)의 시계는 수평적으로는 바넷 뉴먼과 같은 이들의 수고를 언어적으로 덜어 주고 수직적으로는 오규원의 '시말서'를 완결 짓는다. 눈 뜬 시계공, 송승환!

 

 《문장웹진 2019년 09월호》

 

조강석

문학평론가.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이미지 모티폴로지』, 『경험주의자의 시계』, 『아포리아의 별자리들』, 『한국문학과 보편주의』, 『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 등이 있음. 《현대시》, 《쓺-문학의 이름으로》 편집위원,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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