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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틈과 바깥의 언어― 성기완의 시세계

비평/전체의 바깥

by POETIKA 2015. 9. 24.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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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틈과 바깥의 언어

― 성기완의 시세계

 

 

송승환

 

 

미적 전위의 탄생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것인가. 시의 전체, 그 안에서 시작할 것인가. 시의 전체, 그 바깥에서 시작할 것인가.

가능한 시의 전체, 그 안에서 시를 시작한다는 것은 시적인 것의 문법과 그 자명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이것이 시이다’라는 한정 긍정문의 시학 속에서 시적인 것의 범주와 규칙, 운율과 수사학 등의 시적 전통을 존중하고 그 시적 전통의 문법에 근거한 시의 미학을 실천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보들레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현대시는 ‘이것만이 시는 아니다’라는 무한 부정문의 시학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발명하고 가능한 시의 전체를 부정함으로써 시의 전체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왔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적인 것과 비시적인 것의 경계를 지우고 시적인 것의 영역에서 비시적인 것의 영역으로 부단히 이동해왔다. 가능한 시의 전체, 그 바깥에서 시를 실험하고 시작(詩作/始作)한 시쓰기는 당대의 자명한 미학으로 승인된 시적 전통을 회의하고 부정함으로써 현대시의 영토를 개척해왔다. 가령, 보들레르의 산문시 「마드므아젤 비스투리Mademoiselle Bistouri」(『파리의 우울』)는 도시의 밤, 변두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춘부의 기괴한 성적 취향과 기괴한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몽상적인 회상으로 재현하는데, 그것은 이야기의 압축과 비약을 통한 도시의 환상과 알레고리를 빚어내는 현대시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바 있다.

보들레르는 제2제정 시대(1852-1870)의 파리에서 시적인 것의 미적 범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통용되는 시적인 것의 미적 기준을 확립한다. 그는 정형시에서 산문시로 나아간 현대시의 역사에서 스스로 미적 전위임을 드러내고 그 탄생을 예고한다. 제2제정 시대의 파리에서 보들레르는 ‘시적인 것’을 시인의 의식과 내면에서 소스라치듯 솟구치는 상태로 규정함으로써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현대시의 ‘시적인 것’은 정형(定形)으로 자리잡아온 기존의 시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발현되는 무형(無形)의 시적 상태에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보들레르가 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1869)을 쓰던 제2제정 시대의 파리는, 오스망(G.E.Haussmann) 시장(市長)이 파리 시가지의 대규모 철거와 재건축을 단행하고 1852년 세계 최초의 현대적 백화점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가 개점하고 1855년 물신성과 상품화가 만연한 대도시의 삶을 전시한 만국박람회가 개최되고 신문 판매 부수의 증가에 따른 문학의 상품화와 대중화가 발생된 시공간으로서 세계의 도시로 현대 소비사회의 출발을 알리고 전파한 진원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제2제정 시대의 파리는 1848년 혁명으로 성취한 제2공화정이 4년 만에 실패하고 다시 제정 시대로 회귀한 시공간이 되었는데, 그 시공간은 전망 없는 현실에 대한 냉소와 정치적 좌절감의 팽배 속에서 ‘아름다움은 무용한 것이다’를 선언한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 중심의 고답파(Le Parnasse)와 그 후예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베를렌과 랭보 등의 상징주의 시인들이 언어의 인공 미학과 전위적 모험을 감행한 언어 실험의 무대였다.

그 언어 실험의 무대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미적 현대성을 드러내면서 세계의 현대 시사에 미적 전위 운동을 촉발시켰다. 1987년 선거의 실패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다른 삶의 가능성이 봉쇄되어 제2제정 시대의 파리를 연상시키는 1993년에서 2008년에 이르는 서울의 시공간에서 그 전위의 언어는 재점화되었다. 김언, 이준규, 이민하, 신영배, 황병승 등의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일으킨 언어의 폭발은 다양하게 분산된 시인들의 독립적인 언어 운동이었는데, 그들의 전사(前史)로서 1990년대의 함성호, 박상순, 함기석, 이원, 이수명, 성기완 등의 시인들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탄생을 잉태시킨 미적 전위의 진지였다. 1930년대 식민지의 경성과 1950년대 전후(戰後)의 서울과 달리 성숙한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축적된 1990년대 서울은 본격적인 소비사회와 디지털 문화로 전환되는 시공간이었다. 1990년대 PC 통신과 인터넷 보급, 일본 문화의 개방과 홍대 인디 문화의 출현, 시네마테크 운동과 휴대폰의 보급 등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와 다양한 소수 문화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그 중에서 성기완은 인디 뮤지션의 역할과 함께 그 소수 문화와 디지털 시대의 시쓰기를 적극적으로 살아내면서 ‘위기에 처한 서정시를 어떻게 새로운 언어로 확립할 것인가’라는 보들레르의 성찰을 재사유하고 시적인 것의 바깥에서 서사의 구축과 의미의 공백을 매번 동시에 수행하는 전위의 언어를 전개해왔다. 그것이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1998), 『유리 이야기』(2003), 『당신의 텍스트』(2008), 그리고 『ㄹ』(2012)이다.

 

 

이야기의 틈과 마디

 

틈과 마디를 다오

빛이 옹이지게 해다오

봄볕 아지랑이처럼

춤추는 그림자를 다오

땅바닥 위로 일렁이는

돋아난 마디를 다오

틈서리 비집고 크는 비밀을

문틈으로 들여다본 어둠 속에서 찰랑이는

너를

내게 다오

―「서시―틈과 마디」 전문(1:9)


*이 글에서 논의되는 성기완의 시집은 1.『쇼핑 갔다 오십니까?』(문학과지성사,1998) 2.『유리 이야기』(문학과지성사,2003) 3.『당신의 텍스트』(문학과지성사,2008) 4.『ㄹ』(민음사,2012)이다. 이하 인용되는 책과 쪽수는 (1:9)의 형식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1994년 등단한 성기완의 첫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의 「서시―틈과 마디」는 그가 나아간 시적 행로의 기원을 호명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시한다. 2월, 이른 봄부터 그 해 겨울까지 계절의 순환에 따라 4부로 완결된 첫 시집은, 서사의 구축과 의미의 공백을 매번 동시에 실천해온 성기완 시의 고유성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그의 시는 한 권의 시집을 통해 구현되는 서사의 구축을 매번 시도하지만 그것은 완결된 서사의 상징적 의미에 도달하지 않고 매번 파편적 서사의 알레고리적 의미에 머문다. 4부에 걸쳐 고루 편재된 5편의 연작시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는 무엇보다 성기완의 현실에 대한 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골격 시편들이다. “오늘도 추도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발인 시간은 오전 9:00입니다”(1:28), “문을 열고 들어가 서류 봉투를 받는 것이/인생의 원리?”(1:56), “단속반원들은 구원이라 씌어진 완장을 차고 아줌마들을 성전에서 내몬다”(1:78), “그렇게 사소한 것으로 일관할 수가”(1:87)에 나타나듯 다른 삶의 가능성이 폐쇄된 자본주의의 일상이 개인의 삶에 깊게 침윤된 1990년대 서울의 삶에 대한 시적 인식을 보여준다.

계절마다 삽입된 또 다른 4편의 연작 산문시 「볼 만한 티브이 프로」는 보들레르의 운문시 「지나가는 여인에게 A Une Passante」(『악의 꽃』)를 연상시키는데, 영화 감독 지망생 영규가 쓸모없는 무비 카메라를 팔러 나갔다가 우연히 아랍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지만 여인은 사라지고 영규는 그 여인의 얼굴이 그려진 레코드판을 우연히 구입한 후 계속 “음악을 들으면서 꿈속”(1:123)을 헤매는 파편적 서사를 구현한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연작이 출구 없는 현실 세계를 풍자하고 그 일상이 매일 펼쳐지는 현실 서사의 허위적 의미를 암시한다면 「볼 만한 티브이 프로」 연작은 ‘볼 만한 티브이 프로’도 없이 ‘그냥’ ‘쇼핑 갔다 오’는 세계에서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연히 마주친 이국 여성의 아름다움, 그것을 매개하는 음악의 몽환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대서사가 될 수 없는 현대적 삶의 파편적 서사의 틈에서 솟아오른 꿈의 음악이며 시적 순간의 진실한 체험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시―틈과 마디」에는 현대적 삶에 깃든 일상 서사의 허위적 의미에 ‘틈’을 내고 붙잡을 수 없는 “빛이 옹이”져서 ‘마디’를 이룬다. 성기완 시의 시작(始作/詩作), 그 「서시―틈과 마디」는 현실 너머의 다른 삶을 꿈꾸게 하는 “춤추는 그림자”를 갈망하고 ‘지금―여기’의 시공간에 “틈서리 비집고” 맺히는 다른 삶의 “비밀”을 희망한다. 그리하여 성기완의 시집에서 구현되는 서사의 구축은 역설적으로 일상 서사의 비완결성과 의미의 공백을 드러내는 시적 방법론으로서 파편적 서사의 환상과 알레고리가 빚어내는 음악의 꿈, 시적 순간을 그 이야기의 틈과 마디에 움트게 한다.

 

전갈은 별자리이므로 별의 무리다 별들은 밤하늘에 그어진 그 선들을 붙들고 있는 압정이다 그러나 누가 검은 융단에 선을 그어놓았는가 선은 없다 별들은 다시 흩어진 금모래알들이고 전갈은 거기 없다 맹독을 품은 전갈은 하늘에서 오지 않는다 전갈은 왔는가

― 「전갈」 전문(1:86)

 

「전갈」은 그 이야기의 틈과 마디에 맺힌 시적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전갈은 ‘전갈좌’를 가리키는 별자리 이름인데, 전승되어온 그 이름의 명명자는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성기완은 명명자의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 호명하는 전통, 별과 별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은 없다고 단언한다. 전갈은 거기 없다고 선언한다. 오히려 “맹독을 품은 전갈”은 하늘이 아닌 곳에서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전갈로 비유되는 현실의 맹독은 왔느냐고. 「전갈」은 전갈좌에 얽힌 신화적 이야기를 전복하고 전갈좌의 명명과 호명에 깃든 전통과 단절하려는 ‘마디’의 자리에 시인의 시적 입장을 새겨놓고 있다. ‘마디’ 자체가 단절과 매듭을 의미하는 바와 같이 성기완은 “나의 집”(「여름, 장마」)과 “삶의 거울과 아버지 지옥”(「幻生, 혹은 죽음에 이르는 병」)(1:58)과 단절하고 모든 삶은 “複製를 눈앞에 둔 주형틀이라 다들 의미를 찾지 못”(1:58)하는 것임을 선언하면서도 그 단절과 선언으로 인해 발생할 의미의 공백과 삶의 무의미를 의식한다.

 

아으 의미없음이여

그러나 아으 느낌의 폭포여

 

그러나 빈 중심이여

그러나 아으 소용돌이여

 

아으 닿을 길 없는 부름이여

그러나 아으 어느 이름이여

―「불러내기」 부분(1:83)

 

「불러내기」는 첫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에서 시인이 직면한 시적 상황이자 향후 시적 행로의 전환점이다. 현대적 삶의 “의미없음”에서 시적 순간이 폭발하는 “느낌의 폭포”로, 시적인 것의 “빈 중심”에서 비시적인 것의 “소용돌이”로, 가능한 시의 언어로는 “닿을 길 없는 부름”을 불가능한 시의 “어느 이름”으로 불러내기 위한 시인의 파편적 서사가 마디지어 있다. 그 파편적 서사의 ‘마디’는 두 번째 시집 『유리 이야기』에 굵게 맺혀있다.

시집 『유리 이야기』는 그 불가능한 시의 ‘어느 이름’을 불러내기 위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리와 나, 초록의 고무 괴물, 이렇게 셋이서 서로를 쓴다. 그 셋은 모두 내 마음이고 내 바깥”의 이야기로서 분열된 주체의 글쓰기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글쓰기의 의미 없는 이야기를 지우기 위해 이야기하는 시집으로서 시에 대한 메타시(Metapoetry)이다. 일련 번호로만 편집된 48편의 시, 그 속편까지 포함한 63편의 이야기는 시인이 의도한 순서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파편적 서사의 환상과 알레고리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 파편적 서사는 의도적인 비완결성과 비유기적 구성으로 인해 하나의 서사로 집약할 수 없는 이야기의 압축과 비약을 발생시키는데, 처음과 중간과 끝의 시편들 배치를 통해 그 이야기를 단순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자막이 지나가는 동안) 초록의 고무 괴물이 시나리오를 가져왔어…중략…그는 어느 틈에 그 자리에 놓여 있어 나와 자기 그리고 유리가 등장한다고 했어 액션물은 아니지만 치정살인극이래…중략…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겨누고 있는 내용이라고 했어 자기는 아버지이자 연인이라고 했어 하긴 유리의 첫 남자는 틀림없이 그였어 비 오는 거리 위로 자막이 지나가 초록의 고무 괴물은 시인이야 나는 질투를 느껴

―「1」 부분(2:9)

 

유리가 학교를 다녀와서 흰 양말을 벗고 있어 아주 태연한 얼굴, 창백하고 드라이한 그 얼굴엔 그러나 눈물자국이 있었어 ‘아이를 죽였어’ 초록의 고무 괴물이 ‘나의 아들, 나의 아들’ 너는 엄마였구나 ‘약을 모조리 갖다 변기에 처넣어’ 알아보지 못했다 어지러워 ‘그렇게 쓰지 마’ 나는 말했/어

―「35」 부분(2:64)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중략…하얀 침대 위에 하얗게 탈색된 유리의 시체가 놓여 있어 바람이 부드럽게 커튼을 춤추게 하고 유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유리는 바람을 느껴 오해였어 왜 그렇게 받아들이지 ‘컷!’

마지막 신이 끝났어 그래도 유리는 일어나지 않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자막이 올라가 이제 유리의 일기장에는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아 사랑하는 유리 나는 당신의 지우개

―「48」 부분(2:84)

 

『유리 이야기』는 시인의 분열된 주체 중의 한 명인 초록의 고무 괴물이 쓰는 시나리오로부터 시작한다. 시나리오는 현실로부터 가공한 사건들의 개연성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있음직한 현실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화적 진실을 품은 환상이다. 그 ‘환상’은 시인의 또 다른 분열된 주체를 지시하는 ‘유리’라는 이름과 다르지 않다. 초록의 고무 괴물은 유리의 첫 남자이자 ‘유리―환상’을 사랑하는 연인이며 ‘유리―환상’을 쓴 아버지로서 “시인”이다. 유리는 초록의 고무 괴물의 단골 사창가(「6」)에서 만나서 초록의 고무 괴물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켜주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주체라는 점에서 초록의 고무 괴물이 쓴 ‘이야기―시’를 암시하는데, 그 이름 ‘유리(遊離/琉璃)’ 자체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그 ‘이야기―시’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현실을 반사하거나 현실을 투영시킬 수 있을 뿐인 환영이다.

‘나’는 시인의 또 다른 분열된 주체로서 초록의 고무 괴물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가 실재(實在)의 기록인 일기는 쓸 수 있지만 초록의 고무 괴물처럼 영화 자막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시나리오, 즉 시를 쓸 수 없다는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초록의 고무 괴물의 연인, ‘유리―환상’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이유이다. 나의 질투는 ‘유리―환상’, 시적인 것이라고 가정되는 시나리오를 쓸 수 없는 글쓰기 능력의 부재와 그 시적인 것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서 기원하는데,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초록의 고무 괴물의 이야기를, 초록의 고무 괴물의 이야기가 유리의 이야기를, 유리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를 서로 겨누고 죽이는 “치정살인극”의 원인이 된다. “유리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나의) 일기를 지”(「3」)우고 “유리의 일기장은 차근차근 (내가) 지”(「43」)우고 “초록의 고무 괴물이 자수했어, 라고 나는”(「41 유리의 변사체」) 쓴다. 나의 일기는 실재를, 초록의 고무 괴물의 시나리오는 환상을, 유리의 이야기는 그 환상에서 탄생한 시를 각각 지시하는 알레고리로서 실재는 환상을, 환상은 시를, 시는 실재를 비추고 지우고 죽이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애증 관계이므로 ‘치정살인극’은 발생한다. 초록 고무 괴물은 유리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지만 그 아이는 죽고 유리 또한 죽는다. 유리와 아이의 죽음은 환상의 죽음이므로 그 환상의 이야기를 쓴 초록 고무 괴물과 실재의 나는 “작별”(「47 작별」)한다.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 손”(「46 빈 손」이 된다. 나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이야기, 그 글쓰기와 작별함으로써 실재 자체로 남는다. 그것은 환상이 없는 시이며 환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시적인 것이 소멸한 비시적인 것, 오직 실재만 남은 시이다. “사랑하는 유리 나는 당신의 지우개”(「48」)로서 나에게는 그 ‘유리―환상’을 지운 흔적, 지우개 가루만이 남는다.

 

문득, 내가 지금 그 ‘무엇’이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시 안에서 그 무엇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환상이다. 예술 작품 안에 진짜로 그 무엇이 들어 있지를 않은 것이다. 그 무엇들의 흔적이 겨우 있을똥 말똥이다. 흔적은 그 ‘무엇’의 그림자일 뿐이다…중략…무엇을 지우고 나면 빛의 흔적만이 남는다.

―「42 자술서」 부분(2:73-74)

 

현실의 정확한 지점은 늘 지시되지 않는다. 거기서는 지도를 버리고 잡초들 틈을 손으로 뒤져야 한다. 손이 풀에 씻긴다. 그 지점을 찾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손은 긴장과 흥분 속에 약간 떨리기까지 한다. 이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는 방법은 사랑밖에는 없다.

―「42 자술서」 부분(2:76)

 

「42 자술서」에서 내가 진술하는 바와 같이 시적인 그 ‘무엇’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시인의 환상이다. 시에는 그 무엇이 들어 있지 않다. 그 무엇마저 지우고 나면 “빛의 흔적”만이 남는다. 빛의 흔적은 시적인 것의 언어로 명명하고 호명할 수 있는 환상을 지우고 남은 실재의 흔적이다. 그것은 시적인 것의 전체 바깥의 흔적이자 의미의 공백이 발생하는 세계이며 가능한 시의 언어로는 “닿을 길 없는 부름”이고 불가능한 시의 “어느 이름”이다. 그것은 아직 비시적인 것으로 실재하는 무의미가 소용돌이치는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시집 『유리 이야기』는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시적인 것의 ‘의미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파편적 서사를 구축함으로써 그 모든 이야기를 지우는 무의미의 시이다. 성기완은 완결된 서사의 시적 진실의 환상과 시적인 것의 전체를 부정하고 ‘유리 이야기’ 바깥의 시쓰기, 비시적인 것의 무의미한 실재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야기가 지워지는 틈에서 펼쳐지는 그 실재의 세계, 그 “현실의 정확한 지점”은 “지도”로 지시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느낌’의 세계이다. “그 지점을 찾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손”은 실재하는 “풀”과 직접 닿는 “사랑”의 감각이다. 성기완은 시적인 것의 바깥에서 그 실재와의 사랑을 육체의 감각으로 받아쓰는 시쓰기를 실천한다. 그것이 세 번째 시집 『당신의 텍스트』이다.

시집 『당신의 텍스트』는 시적인 것의 바깥에서 ‘당신’이라고 호명되는 실재와의 만남과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음악적인 구성으로 펼친다. 이제 성기완에게 있어서 시의 전체 바깥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의미 부여를 통한 명명과 호명에 그치는 시적인 것과 완전히 결별하고 ‘당신’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는 호명할 수 없는 실재와 만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파편적 글쓰기이다. 성기완은 그 파편적 글쓰기를 ‘스파팅(spotting)’으로 정의한다. “스파팅이란, 글을 쓴 시각, 공간의 정황을 글 속에 기입하고/그 글의 느낌을 그 정황과 연결시키는” 글쓰기로서 “일상적인 것들을 가지 치지 않고/있는 그대로 놔두는 글쓰기”(「당신의 텍스트 4」)이다. 즉 어떤 이름으로도 명명할 수 없는 실재와 만나는 순간과 장소를 포착하는 글쓰기를 의미하는데, 그 글쓰기는 실재와 만나는 육체의 감각이 느끼는 사랑의 흥분과 함께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재와의 사랑의 기록을 남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당신의 텍스트」 연작이다.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나

나의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당신

텍스트의 당신은 텍스트의 나

당신의 나는 텍스트의 텍스트

텍스트의 나는 텍스트의 당신

당신의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당신은 텍스트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 1―사랑하는 당신께」 전문(3:9)

 

「당신의 텍스트 1」은 읽을수록 ‘당신의 텍스트’에 근접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음악적 효과와 의미의 소음과 혼동을 일으키고 음성 자체의 텍스트를 창조한다. ‘실재’라는 당신은 나의 글쓰기 대상의 텍스트이자 독해 대상의 텍스트인데, ‘나’ 또한 어떤 이름으로 명명할 수 없는 실재라는 점에서 당신의 텍스트이다. 나와 당신은 서로 감각할 수는 있지만 어떤 언어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나의 당신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나와 당신의 사랑은 실패하고 그 의미의 소음과 흔적은 남는다. “당신은 대답이 없”(「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오후 1시 50분」)고 당신은 “불러도 소용없는 그 이름”(「나의 새벽이 넘겨야 할 또 한 장의 페이지라면」)이며 “이 시가 자라기를 그칠 때쯤 당신은 잊혀”(「자라나는 시」)질 것이다. 그 사랑의 흥분과 사랑의 실패가 반복될 때마다 시집 『당신의 텍스트』의 간주에는 어떤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후렴구 “아릐 리마레 어무릴니fa”(「미셸은 우주의 라디오」)가 반복된다. 후렴구에는 사랑의 흥분과 함께 실패로 끝난 사랑의 어떤 느낌이 묻어 있다. 그것은 가능한 시의 전체, 그 바깥에서 서사의 구축과 의미의 공백을 매번 실천해온 성기완의 시, 그 이야기의 틈과 마디에 맺힌 빛의 옹이이며 『당신의 텍스트』에서 도달한 무의미, 그 느낌의 돌림노래이다.

 

 

리듬, 바깥의 언어

 

시집 『ㄹ』은 성기완의 시가 도달한 무의미의 최전선이다. 이제 그는 시적인 것의 전체, 시적인 것의 의미와 문법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까지 매번 실천해온 서사의 구축과 의미 지우기를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어떤 시적 포즈를 취하거나 새로운 시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가능한 시의 전체, 그 바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무의미의 전위이다. 그는 무의미를 리듬으로 실천한다. 그 리듬은 시적인 것의 의미로부터 자유롭고 뜻을 버림으로써 획득한 ‘소리 다발’이다. 그 리듬은 “시라는 발성기관”(「自序」)에서 흘러넘친다. 그는 시라는 발성기관을 통해 세계의 모든 소리를 발화한다. 거기에 뜻은 없다. 뜻은 사라지고 그 소리들의 발화와 공명이 빚어내는 ‘느낌의 폭포’만이 있다. 그것이 리듬이고 성기완의 시가 도달하려는 무의미이다. 성기완의 시가 리듬을 통해 도달하려는 무의미는 현실 너머의 “죽음의바다”(「생명의주된관심사」)이다. 유한한 생명이 그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한 것이 언어의 의미이므로 성기완은 그 의미의 감옥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고자 한다. “모든 순수는 자기 자신을/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8월의 화형식」)기 때문이다. 그 무의미의 리듬, 무의미의 “반복과 후렴을 지배하는 음소”는 ‘ㄹ’이다. ㄹ의 떨림이 무한히 반복되고 후렴될 때 성기완 시의 리듬, 그 바깥의 언어는 혀끝에서 시작된다.

 

어강됴리 비취오시라

다롱디리 드리오리다

동동다리 뿌리오리다

 

시리잇고 욜세라

아래꽃섬 녀러신

흘리오리다

꼭그렇진않

얄라리얄라

어름우희댓닙자리

구름나라로맨티카

―「ㄹ」 부분(4:17-18)

 

 

― 『쓺―문학의 이름으로』 2015년 9월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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