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분에게
이제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 소녀들은 가슴에 시집을 품고 다니기를 그만두었고 청년은 그의 연인에게 시를 외어 주지 않는다. 흰구름을 바라보는 소년의 부푼 꿈, 한밤내 베개를 적시는 고뇌의 눈물, 인생의 심연을 지나온 자의 확신,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황홀과 무력감, 풀잎에 묻은 한 방울 이슬에서 우주의 신비를 깨닫는 지혜, 그리고 무한과 영원에 대한 인간의 억누를 수 없는 동경…… 일찍이 시는 이 모든 것 한가운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시는 그것으로 생각을 교환하며 감정을 나누며 깨달음을 함께 하는 인류의 위대한 공통어였다.
그러나 이제 시는 대중의 입술에서 자취를 감춘다. 시의 자리에는 재즈의 광란적인 리듬이, 여배우의 풍만한 육체가, 정치가의 제스처와 저널리스트의 선동적인 어휘가, 그리고 도시 청년의 재치있는 화술이 차지한다. 과연 저 아름다운 시대의 언어는 사라지고 마는가?
그렇다. 오늘날 우리는 시가 남지 않고 시인이 남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만이 남고 그것을 쓴 시인이 남지 않던 고전적인 시대는 이미 가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시를 읽기보다 시인을 읽는다. 그들은 시인의 정신의 내부를 은밀히 스쳐간 흔적과 상처에 흥미를 느긴다. 개인과 개인의 편차, 한 시인의 내부 체험과 딴 시인의 그것과의 상이(相異)가 오늘날처럼 강조된 적은 없었던 것같이 보인다. 우리가 이 사화집을 꾸미는 데 있어서 가장 주의한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1919년 주요한 씨의 「불놀이」가 발표된 이래 수백 명의 시인들이 시를 써 왔다. 더욱이 해방 후에는 삼백 명이 넘는 시인들이 수많은 시를 발표해 왔다. 그 중에서 이 선집에 적당한 만큼의 분량을 뽑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한두 편의 훌륭한 작품이 우연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우수한 시인이란 한두 편의 작품에서라기보다 그의 전작품으로써 자기의 존재이유를 부각시키는 내적 경험에서 증명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리하여 우리는 해방 이후 등장한 50여 시인을 선정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자기의 시대적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대를 초하려는 몸부림조차 그 시대의 특징적인 각인을 면치 못한다. 그런 뜻에서 여기 50여 시인들은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총체적 모습이 혼란되고 모순되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시대가 그만큼 혼란과 모순에 가득차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이 선집을 읽으면서 일종의 곤혹을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 이 시인은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이런 시를 썼는가. 이 시의 이런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게 과연 시일까. 시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런 회의에 빠진다는 것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러분이 이미 현대시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실상 오늘날 시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소수의 훈련된 독자만이 그것을 읽는다는 데에 근본적 문제점이 있다. 시인과 독자 쌍방의 집요한 노력이 결합될 때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시의 존망(存亡)은 다시 검토될 것이다. 이 선집이 시인과 독자에게 다 같이 그런 계기를 마련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1967년 1월.
『52인 시집』 편집위원 일동.
『52인 시집』, 신구문화사, 1968.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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