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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첫번째 세계― 김경후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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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TIKA 2017. 10. 2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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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부서진 항아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에서 유일한 항아리. 최초의 기원이자 존재의 의미이며 삶의 근거로서 빛을 내는 항아리. 공동체의 기억을 품고 있으면서 삶의 의미를 항상 되묻는 항아리. 어느 날 발견한 항아리의 균열. 그리고 지금 바닥에 떨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진 항아리 파편들. 그 부서진 항아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네 명의 사람.

첫 번째 사람은 산산이 부서진 항아리의 파편들을 최대한 찾아낸다. 항아리의 원형을 떠올리며 그 파편들을 하나씩 이어 붙인다. 그러나 찾을 수 없는 파편들 때문에 항아리의 원형을 복원할 수 없다. 파편들로 이어 붙인 항아리조차 균열을 안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항아리의 균열과 부재하는 항아리 부위를 응시하며 그 의미를 해석한다. 그는 상처 입은 항아리를 유리 상자에 넣고 진공 상태로 보관한다. 두 번째 사람은 흩어진 항아리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항아리의 원형을 상상하며 그 파편들을 모두 이어 붙인다. 그리고 메울 수 없는 항아리 부위에 정확히 들어맞는 형태를 종이에 그린다. 이질적인 재질의 진흙을 그 종이의 형태에 맞게 구워낸다. 항아리의 빈자리에 새롭게 구워낸 항아리 파편을 끼워넣는다. 항아리의 균열이 보이지 않도록 전체적으로 마감한다. 두 번째 사람은 복원한 항아리를 일상생활에서 활용한다. 세 번째 사람은 찾아낸 파편만으로는 항아리의 원형을 복원할 수 없다고 예견한다. 그렇다고 새롭게 구워낸 항아리 파편으로 복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항아리의 순수한 재질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마침내 그는 긁어모은 항아리의 모든 파편들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가루로 만든다. 그는 본래 항아리보다는 작지만 순수한 형질을 유지한 항아리를 그 가루를 재료로 삼아 빚는다. 그리하여 세 번째 사람은 축소된 원형이지만 순수한 형질로 새롭게 만든 항아리를 통해 최초 항아리의 원형을 유추하고 그것의 현재와 미래적 의미를 되새긴다.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은 항아리가 부서졌다는 것, 그 사실 자체 때문에 흩어진 파편들을 찾아낼 힘조차 없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항아리 파편들 앞에서 마모되어가는 파편들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면서 마멸되어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사라져서 행방조차 알 수 없는 항아리 파편들을 떠올리면서. 그 파편들처럼 사라져가는 자신을 응시하면서. 기억 속에서만 온전한 항아리의 원형을 떠올리면서. 부서진 항아리의 파편들과 그 폐허에서 함께 몰락하면서 겨우 숨을 내쉰다. 눈앞에 보이는 파편들의 폐허와 눈앞에 보이지 않는 파편들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면서.

부서진 항아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네 명의 사람에 대하여 부연하자면, 첫 번째 사람은 원본과 상실한 것의 의미를 되물으며 파편들 자체를 보존하려는 역사학자. 두 번째 사람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다수의 현실주의자와 정치가. 세 번째 사람은 현실의 파국을 수용하지도 그 파국을 봉합하지도 않으면서 순수한 삶의 형질을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파국을 완전히 분쇄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혁명가. 네 번째 사람은 파괴된 삶 자체의 상처로부터 외상을 입고 일상 세계에서 마멸되고 있는 삶을 살아내는 시인.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변방, 폭력적인 세계의 끝에서 첫 번째 세계, 그 맨 앞에서 세계의 파국과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죽어가는 시인. 역사가도, 일상인도, 정치가도, 혁명가도 되지 못하거나 되지 않으면서 세계의 상처를 껴안으며 죽음을 향해 마모되어가는 세계--존재’, 그 현존으로 세계의 폭력성과 더러움을 드러내는 시인. 항아리, 그 유용함의 가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세계에서 무용한 항아리의 파편과 함께 무용한 존재로 죽어감으로써 경제적 효율 사회의 폭력성과 추악함을 드러내는 시인.

 

물 위에 어른거리는

잃어버릴 게 없는 지갑처럼 잃어버릴

이끼 낀 해골바가지

―「0부분

 

그가 살아 있는 소리는 살이 썩어가는 소리, 봄 먼지바람에 터지는 비누거품 소리,

 

화장실 바닥 발에 차인 비누 쪼가리를 나는 바라본다.

―「비누 쪼가리부분

 

어쨌든 이젠 나도

그 집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는 허물어진

모래보다 자잘한 어둠

 

바닷가 나뒹군다

내장이 빈 납작게 껍데기 하나

―「모래집부분

 

더 미끄러지기 위해

나는 이글거리며 조금 기어오르기도 한다

미끄러진다

―「팔월부분

 

난간 위

나는 붉은 지네의 잘린 다리들이었다

―「두도막 형식부분

 

으스름달의

턱 빠진 해골의 웃음소리

홀로 듣는

나는 언제나 너와 달만 공유하는 사이

―「우리는 달을 공유하는 사이부분

 

김경후의 세 번째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 2017)은 세계의 끝에서 첫 번째 세계에 놓인 시인을 시적 주체로서 전면에 드러내는데, 이는 세계의 끝으로 내몰린 시적 주체의 심리적 양상과 존재의 형식을 극단적 태도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은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 2001)와 두 번째 시집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 2012)에서도 견지한 시적 주체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 번째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의 시적 주체는 세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죽음을 응시하면서 무()의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한 실존을 더욱 깊이 살아내는 양상을 전개한다.

최근작 06편은 끝에서 첫 번째 세계에 위치한 시적 주체의 극단적 심리 상태와 마멸하는 자기 존재의 응시를 형상화한다. 그 시적 주체는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존재의 형식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유용한 현실 세계로부터 상처 입은 존재들과 동일시한다. 그 시적 주체의 시적 대상들은, 돈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서 잃어버려도 잃어버릴 게 없는 지갑”(0), “화장실 바닥 발에 차인 비누 쪼가리”(비누 쪼가리), “내장이 빈 납작게 껍데기 하나”(모래집), “더 미끄러지기 위해” “조금 기어오르는(팔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붉은 지네”(두도막 형식), “턱 빠진 해골의 웃음소리”(우리는 달을 공유하는 사이), “그림자/조차/비어있는//텅 빈/”(물병자리 아래서)인데, 그것들은 모두 무용하며 죽음이 임박한 존재이거나 소외되고 버림받아 죽은 것들이다. 김경후의 시는 그 시적 대상들을 응시한다. 김경후의 시적 대상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세계에 잔존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와 상응(correspondances)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현존한다. 현존하는 한 그것은, 제거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현존은 세계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소멸하고 있는 무용한 존재들의 투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이 세계에서 마모되면서도 현존하고 있는 한 김경후의 시는, 끝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그들과 함께 존재해야 할 근거이자 홀로거처하는 터전이다.

 

<원고지 19>


월간 현대문학2017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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